06년 5월 5 - 7일
5/5 22:00 신도림 출발
5/6 03:20 밤티재(520)
05:00 늘재(380) 3.3km
06:40 청화산(984) 2.49km
07:50 801 암릉 안부(아침식사)-08:10 출발
08:30 갓바위재(730) 3.7km
09:10 조항산 (951.2) 1.15km
09:40 고모령(734)
11:00 밀재 (690) 4.35km
12:10 대야산 (1015) 1.25km
13:30 촛대재-촛대봉(668)
14:00 불란치재 -곰넘이봉(733)
15:40 버리미기재 (485) 4.55km
12 시간 20분 20.79km
(산장 숙박)
5/7 06:10 버리미기재 출발
07:20 장성봉(915) 1.97km
08;30 809봉
09:00 787봉
09:15 공터 (5분 휴식)
09:50 악희봉 갈림길 5.35km
11:10 은치재 (545) 2.16km
11:35 주치봉(5분 휴식)(683)
12;30 마당바위
13:00 구왕봉(977)
13:30 지릅티재 (10분 휴식) 2.75km
14:40 은티마을 2.0km
8 시간 30분 14.23km
진행 시간 총 20시간 50분 35.02km
5월 5일_금_22:00
월롱역 부근에서 소대장 인수인계를 마친 신임 배소위가 복분자 술병을 들고 5월의 연휴를 맞은 외박 첫날 카네이션 술잔을 따른다. 2박 3일의 산행에 호우주의보와 강풍소식을 걱정하며 우의를 챙기는 나를 보는 물푸레의 시선이 편해 보이지는 않지만 부디 일기예보가 틀려지기를 기대해 본다. 대간 8개월 동안 큰 비는 이번이 처음일 것 같은데... 꾸려 놓았던 비박용 텐트와 침낭을 내려놓고 산장 숙박을 계획한다. 신도림 출발지로 향하는 차창에 벌써 빗방울이 후두둑거리기 시작한다. 자유인 7기(덕유종주, 빼재-육십령-영취산) 팀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지만, 날씨도 날씨이고, 가정의 달 첫 연휴에 2박 3일을 긴 종주구간을 위하여 감히 가정을 탈출하기가 미안한 탓에 다소 인원이 적은 것에 섭섭하다.
여주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도 간단한 이슬이 취침약 복용도 내키지 않고, 오직 하늘만 쳐다보지만 일기예보는 틀릴 기색이 아니다. 점점 북서쪽에서 바람이 일며 빗방울이 굵어진다. 비교적 여유로운 좌석에서도 잠은 오질 않고 검은 차창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새로 산 우의를 만지작거린다. 출발 전 안방 벽에 걸린 부모님 영정을 바라보며, 지금의 나보다 더 젊은 안타까움에 또다시 한해의 5월을 새삼스레 느낀다. 일찍 가신 님들을 그리워해 볼 틈도 없었던 지난 세월 속에서, 知子莫如父라 했던가, 나를 알아줄 부모가 없으니 하물며 님들을 알기엔 태부족인 홀로서기가 내게 가져다준 기억들이란, 옹이 져 가슴에 못 박힌 모진 세월이 되고 말았다. 슬픔도 사람을 키운다는데..
문경을 거쳐 가은을 지나고 힘겹게 꾸불거려 올라선 밤티재 동물 이동통로 밑에서, 출발시간을 기다리며 바깥에 나서보지만 세찬 비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심란한 기분으로 배낭 속의 살림들을 비닐봉지에 다시 싸서 넣고, 다음 날의 필요장비들을 버스 안에 보관하며 배낭 무게를 최대한 줄여 우중산행에 대비한다.(02:00) 부디 발목 붕대가 물에 젖지 않았으면 하고 겹겹이 비닐로 싸 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앞으로 한 달여 동안은 치료기간이므로 조심하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치료효과가 있으니 크게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5월 6일_토_03:20
심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이동통로 밑에서 복장점검과 준비운동을 하며 출발이 다소 지체되었으나 화이팅을 외치는 自由人들의 의지가 우렁차다. 아무런 조망이나 주변을 기대할 수 없이 오직 무사히 걸어 새벽까지 늘재에 도착하여 동이 트는 시간에는 비가 그치기를 바라 볼 뿐이다. 한 달 전 속리산 문장대를 오를 때 기기묘묘한 암릉의 연속을 짐작했던 구간이라 멋진 모습들을 많이 담기 위해 디카메모리를 두 개나 더 준비했지만 빗 속에서 별로 건지지 못할 것 같아 비닐로 싼 채로 배낭에 집어넣는다. 696봉까지의 첫 된오름 속에서 비록 적은 인원이지만 철저한 인원 점검을 거쳐 선두와 후미의 짧은 행렬을 유지하기 위해 속도를 조절하며 천천히 암반 길을 밟아 오른다.
696 암봉 직전의 절벽을 왼쪽으로 돌아, 한 명씩 차례로 비에 젖어 미끄러운 크랙을 힘겹게 올라섰으나, 칠흑의 비바람 속에서 바위 길이 끊어진다. 비록 3-4m의 짧은 길이지만 매우 위험한 슬랩을 손바닥으로 릿지해야 할 상황인데 선두와의 거리가 멀어진다. 결국 마지막 두세 명은 조심스레 왼쪽 우회길을 찾아 돌아 나왔지만 이미 대부분은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오늘의 상황에서 선두는 비록 늦어지더라도 끝까지 안전한 길을 찾아야 했었다. 이어지는 628봉 안부로의 내림길은 빗물에 젖은 흙탕길로 매우 미끄러워 한 발씩 내딛는 걸음걸이에 힘이 빠진 느낌이다. 우의 속으로 이미 땀과 빗물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이후 늘재로 향하는 내림길은 비교적 완만하고 모처럼 낙엽 쌓인 마루금을 트래킹 하며 잠시 여유를 찾는다. 신발 속으로 빗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장치한 비닐이 벗겨져 되려 위험할 것 같아 제거하고 나니 이내 양말이 젖어 온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물속을 걷기 시작하다니... 늘재가 가까워 오는 안부에서 벌써 새벽이 밝아옴을 느끼며 서둘러 비에 젖은 헤드랜턴을 닦아 넣는다. 괴산으로 향하는 32번 국도에 내려서서 잠시 숨을 돌리니, 오늘의 첫 워밍업이 앞으로의 유격훈련을 예고하듯 우의와 함께 뒹굴며 잡아야 할 로프들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다행히 이제 날이라도 밝아 오니 제발 빗줄기가 가늘어졌으면....(05:00)
5월 6일_토_06:00
늘재에서 청화산으로의 오름길은 꽤 잘 정비된 계단길로 시작되어 40여분 된오름 끝에 마루금 능선 안부에 올라선다. 빗속에서 온통 흐린 안개로 뒤덮여 있지만, 남쪽으로 전망이 좋을 듯싶은 안부 끝 조망바위에 예쁜 소나무 병풍을 펼치고 白頭大幹 中元地 靖國祈願壇 표지비가 잘 정비되어 마련되어 있다. 날이 맑았으면 향이라도 피우고 이 땅의 안녕과 대간능선 좌우를 넘나드는 영혼들의 안녕을 빌어 볼만한 제단이다. 잠시 묵념하고 서둘러 청화산 된오름 암릉 능선을 밟아 나간다.
계속되는 빗방울 소리가 우의 모자 위 귓전을 세차게 때리고 아침이 밝아 오면서 잠시 잦아들던 바람이 청화산 정상 된오름을 오를수록 점점 세차게 불어오며 마지막 정상 부근의 기암들을 몇 차례 줄잡이와 크랙 밟기로 정상에 올라서니 (06:40) 의상골 내리막 갈림길 표지판과 정상석의 높이 표기가 차이가 난다. 몇십 센티 돌무덤을 쌓으면 해결될 일이다. 역시 구름에 가려진 조망으로 가까운 시야의 암릉들도 디카에 잘 담겨지질 않는다. 10리 밖에서도 푸르른 기상이 서려 있을 이 봉우리에서 한치도 보이질 않는 주변을 아쉽게 둘러보고, 서둘러 기념 촬영을 마친 후 976봉 안부로 간단한 로프잡이를 거쳐 내리막 암릉길을 밟는다. 여전히 바람은 세차고 우의가 펄럭이니 시야가 좋질 않다.
5월 6일_토_07:00
시루봉 갈림길을 지나 20도 방향으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 채 1시간 남짓 계속되는 비교적 평탄한 암릉길이 날카로운 사량도 능선처럼 반복된다. 작은 봉우리마다 어김없이 계속되는 기암과 거암들이 줄을 서서 발길을 멈출 만도 하건만, 비는 계속되고 일일이 디카에 담을 생각을 하질 못한 채 훗날을 기약하며 허기진 배를 채울 가릴 데를 찾지만 결국 갓바위재가 보이는 801봉 암릉 안부에서 비를 맞으며 선채로 김밥 한 줄의 아침을 때운다.(07:50) 누가 시키지 않은 이 대간 밟기를 날씨에 관계없이 계획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약속은 나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스무 명이 넘는 저 대간 동지들에게 진부령 고개에서 어떤 영광을 안겨 줄 것인가...
걸머진 배낭 속에서 우의 속으로 서로의 손을 빌어 김밥통을 꺼내고 챙기는 모습에서 협동을 배운다. 1978년,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도 못한 채 반학생 시절의 예비역 배병장은 만리동 꼭대기에 자리 잡은 친구의 옥탑방에서 위암으로 고생하시는 친구의 어머니를 함께 돌보며 젊음을 보내고 있었다. 도울 힘이 없으면서 남의 어려움을 듣고 지켜보는 고통이란... 그러나 그 고통에 자주 접함으로써 그 원인과 우리네 삶의 가치라는 것을 깊이 천착해 가고 있었다.
5월 6일_토_08:30
선 채로의 식사를 마친 후 갓바위재에 내려서니 다소 휴식의 여유를 느끼며 천천히 트래킹을 즐긴다. 신발 속의 출렁이는 빗물이 되려 시원하고 평발의 따가운 열기를 잊게 해 줌에 다행이라 자위한다. 발목 압박붕대 속에선 습진이 진행되는지 가려워 오지만 어디 붙이고 앉을 여유가 없으니 그냥 계속 걸을 수밖에. 다행히 조항산 오름길은 비록 몇 번의 암릉 줄잡이는 거치지만 다소 완만하여 사위를 둘러싼 비구름 속에서 둘러볼 경치나 조망할 능선도 보이질 않으니 구름 속을 홀로 걷는다. 선두는 이미 앞선 지 오래다.
5월 6일_토_09:10
조항산 정상에서 잠시 선 채로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나눈다. 계속되는 비바람에 몸은 우의 속에서도 젖어들지만, 다행히 5월의 날씨답게 많이 차갑지는 않아서 저체온의 걱정은 크게 줄었다. 제발 두세 시간 후에 맞이할 대야산 정상에서는 비가 좀 거쳐야 할 텐데.. 왼편 급경사 내리막 크랙들을 보조 로프의 힘을 빌어 조심스레 30여분 밟아 내리니 734 안부를 지나 고모령에 내려선다. 죽은 질녀를 찾아 헤매는 고모의 영혼이 고모샘을 돌아 나와 비구름 안갯속으로 흰옷자락을 적신다.(09;40)
천천히 쉬질 않고 1차 탈출 예정지인 밀재까지의 발걸음을 서두른다. 마귀할멈 통시바위 갈림길까지 30여분 된 오름과 암릉 크랙을 번갈으며 숱한 기암괴석에 그나마 위안을 찾는다. 안개 같은 비구름이 계속 시야를 가리니 아직도 가까이 다가올 대야산이 잡히질 않는다. 연이어 오르내리는 854봉, 849봉을 지나면서 설흘산 칼바위 능선을 떠올린다.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날카로운 암릉들을 지그재그로 돌아 나와 집채바위를 지나면서 급경사 내림길을 미끄러지며 내려서니 계획한 시간에 밀재에 다다른다.(11:00) 두세 명의 동지들이 아쉽게도 용추골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또 다른 내일 구간을 위하여 현명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이 미련 곰탱이는 습진이 스물 거리는 발목을 끌고 대야산 오름길을 찾아 이어간다. 솔직히 텔레비젼 앞에서 라면을 끓이고 이슬이 벗하는 휴일 날의 한가로움이 그립다.
5월 6일_토_12:00
급경사 오르막을 10여분 숨차게 올라서니 701 안부를 장식하는 기암들의 연속이다. 젖어드는 디카를 꺼내어 물에 젖어 망가질지도 모르는 바위 촬영에 걸음이 지체된다. 선두는 대야산 정상에 거의 다다른 무전이다. 범바위, 고래바위를 거쳐 대야산 정상 부근의 대 슬랩에 다다르니 다행히 비구름이 간간이 걷히면서 정상 부근의 암릉 절경을 보일락 말락 애태우기 시작한다. 암석과 수목이 조화롭게 산을 장식하는 전형적인 암봉이건만 군자답게 펼쳐 보이질 못하고, 수줍은 여인네 첫날밤 마냥 사나이 애간장을 녹인다.
대문바위를 지나 대야산 정상이 바로 앞에 보이는 바위 안부에서 구름이 걷히길 기대해 보지만 결국 포기하고 바위틈을 기어올라 멋진 大耶山의 정상에 올라섰으나 가까운 바위들만 눈에 들어올 뿐 시네마스코프는 옛날 얘기다.(12:10,1015 m) 내 가슴을 적시며 흐르는 동서 양편의 선유계곡 맑은 물살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암초에 부딪치며 흰 물결을 뽐내며 대간 마루금으로 거꾸로 솟아 흐른다. 문경 가은 용추골 선유구곡을 노래하는 고운 최치원의 영혼이 괴산 선유동으로 구름 속에서 훨훨 넘나 든다. 대홍수 때도 대야만큼 남았다면 우리말 세숫대야가 어울릴 텐데 억지 한자글이 그런대로 중후하게 적혀있으니, 역시 한자는 뜻이고 소리고 간에 우리네 머리에 이미지로 한 품위 자릴 잡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 100여 m 직벽 줄잡이로 표시된 하산길을 서둘러야 한다. 오른쪽 다소 가파른 언덕을 내려서서 생각보다 길지 않은 로프를 한번 잡고 나니, 용추골 팻말이 나오면서 뭔가 잘못된 느낌이다. 지도를 확인하니 피아골 하산길이 틀림없다. 대간길을 벗어난 20분간의 알바를 경험하고 다시 대야산 정상에 올라서서 북쪽으로 난 표지를 발견하니 발아래 낭떠러지 로프 위에 대간 리본이 비바람에 젖은 채 떨고 있다. 내 마음도 떨고 있다.
5월 6일_토_12:30
아래로 내려다볼수록 아찔한 현기증이 날 만큼 직벽 크랙이 짧은 다리로서는 확보가 불가능한 길이로 디딜 틈을 만드니, 우의가 걸려 찢어질 것 같아 로프에 매달린 채 미끄러운 직벽 경사면에 점프 접지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훈련소의 고마움을 새삼 실감한다. 20여 미터 로프를 너댓 번 번갈은 후에야 촛대재가 내려다 보이는 가파른 안부에서 떨리는 다리를 버틴 채 한숨을 몰아쉰다. 다행히 후미조 일행들이 전원 무사히 안착하여 촛대재에 내려서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13:30)
아직도 두 고개를 남겨놓고 두 시간 정도를 걸어야 하는데 마주 보이는 봉우리들이 구름 속에서 잠깐씩 고개를 내밀며 그 수를 짐작키 어렵게 만든다. 暗中摸索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만, 그간의 대간 길에서 이 정도 타임이면 이젠 웬만큼 부드럽게 진행할 마무리 지점일 텐데.. 아뿔싸, 오늘의 이 끝자락이 구간의 마지막이 아니라 잠시 힘들어 쉬어 넘기로 한 중간점임을 두 시간 후에야 깨달았다. 크고 작은 봉우리마다 집채 만한 암봉을 머리에 이고 우회를 허락지 않으며, 비록 짧지만 지친 가랭이가 힘주어 벌리기엔 너무 높아 보이는 촛대봉을 힘겹게 넘어 내리니 불란치재 표지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14:00)
'불이 났던 고개'라는 붙임보다는 '不寒嶺'에서 유래됐음이 그럴싸하다. 아무튼 문경 완장리와 관평리를 통하는 이 길이 버리미기재에 포장도로를 빼앗기고 점점 풀섶으로 뒤덮여지는 통에, 내일이야 남은 구간이 길어지든 말든, 지친 오늘 다리를 쉬게 할 수 있는 중간점을 다시금 곰넘이봉 너머로 연장을 해야 하니, 계속 마주하는 언덕으로 올라서는 발길이 땅을 끌고 있다. 조금씩 약해지는 빗줄기를 의식하며 우의를 벗을까 생각도 해 봤으나 젖은 체온이 염려되어 계속 걸치기로 한다. 올려다보이는 738 곰넘이봉이 꽤 높은 자세로 마지막 유격을 예고한다.
5월 6일_토_15:00
비교적 덜 가파른 오름길을 밟아 제법 훤해지는 마루금 안부에 올라서니 미륵바위 유연한 자태에 잠시 날개 달린 여인의 아름다운 몸매를 느낀다. 끝까지 맑은 배경을 거부하는 날씨를 탓하며 훗날 원수 갚으러 오리라... 지친 오기가 가여워 보인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곰넘이봉(738) 지나 끝나지 않는 675봉, 552봉을 오르내리며 마지막 줄잡이를 거쳐서야 버리미기재인지 빌어먹을재인지가 내려다 보이는 전나무 숲길을 내려선다. 아무 생각이 없다. 젖은 신발 속의 냉각수가 효과를 보아 평발 열선을 라디에이팅 해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내일의 장성봉을 올려다본다.
한 동안 23만 명 동포 중에서 최대 2만 명을 자랑하던 한인 농장(콜호즈)인 김병화 집단농장을 다음날 방문해 보기로 계획을 세우며, 불모지의 땅에 면화농장을 일군 역사를 상상해 본다. 조선 민족의 한반도 정체성과 해양으로의 발전성을 차치하고도, 대륙을 향한 개척의 발걸음이 정착한 이곳이 자의든 타의든 결코 머물면서 만족할 수 없는 한반도 한민족의 운명을 확인할 수 있길 바래본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사막에서도 홀로 일어서서 걸어갈 만큼 강하고 고집스럽게 성장해 감을 교육의 지표로 삼고, 또한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게 우리 부모나, 선생들의 일반적인 가르침이겠지.. 한데.. 죽을 고비와 외로움과 스스로의 고단함 속에서 얻어지는 개인주의적인 결벽성이, 한 인간의 덕성을 도야해 감에 있어 분명한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걸까.... “
먼 산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자신의 변화되는 60년대 40 초반의 격랑을 이어가는 K노인의 눈자위엔 석양이 내려다 준 그늘 속으로 감춰지는 방울 빛이 잠시 번득였다.
개인적 덕성의 자기 완결이라는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도, 격랑의 세월이 가져다준 한쪽으로 편벽된 경험이 기형화 되고 주관의 궁벽을 엿보이는 그동안의 고초 속에서, 그가 원하는 사회적 연대성을 기대하며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위스키잔만 비우고 있었다.
“결국.. 내 모자라는 심성들... 완전하지 못한 주장과 이성들.. 겉으로는 합리적인 체하지만 매우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스스로를 합리화 함에 전전긍긍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결국 의지하고 기대고 부대끼고 나누면서 살아야 할 우리들이 아니겠는가... 자유라는 거.. 참 좋은 말이지... 내가 원하는 자유가 남의 자유를 구속하면 안 된다는 주장들... 만인을 위한 자유라는 게 가능한 것일까... 소위 평등이란 이름으로 결국 자유의 통제와 소수의 자유를 위한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면.... 그것이 과연 변화요,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K노인의 스스로의 인생의 변화를 이끌만한 사상적인 변화를 기대하며, 우즈벡의 이틀째 저녁 시간마저도 인내하며 궁금증만 더해가고, 자유를 찾아 헤매는 K노인의 젊음은 60년 그해를 다 보내면서도 아직도 종착역을 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일이란 마침내 그의 삶의 터전을 선택함에 있을진대 과연 그 후로 그에게 다가온 삶이란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일까....
지친 오늘 하루의 종착역인 버리미기재에 내려서서 벌 목(밀재)처럼 산허리가 가늘어진 913 지방도로를 남으로 돌아 용추골 산장에서 하룻저녁을 신세 지기로 한다.(15:40)
----첫째 날 돌마당 산장의 친절한 된장국과 감즙초에 피로를 풀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054-571-6542 문경 가은 용추골)
仙遊九谷(문경 가은, 고운 최치원)
옥하대(玉霞臺) 영사석(靈梭石) 활청담(活淸潭) 세심대(洗心臺) 관란담(觀瀾潭) 탁청대(濯淸臺) 영귀암(泳歸岩) 난생뢰(鸞笙瀨) 옥석대(玉釋臺)
仙遊九谷(괴산 송정, 퇴계 이 황)
仙遊洞門(선유동문), 경천벽(擎天壁), 학소암(鶴巢岩), 연단로(鍊丹爐), 와룡폭(臥龍瀑), 난가대(爛柯擡), 기국암(碁局巖), 구암(龜岩), 은선암(隱仙巖)
아래쪽 괴산의 선유구곡이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 원림은 문경 쪽으로 최근 학술조사 되었다. 그냥 하룻밤 묵은 용추계곡에서 꿈속으로 노닐어 보았던 구곡이었습니다. 그렇게 피곤한 몸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초저녁 꿈나라로 갈 것을....
5월 7일_일_04:00
전날 초저녁부터 막걸리 한 사발에 골아떨어진 잠이 일찍 깨어 바깥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주위를 걸어본다. 새소리마저 잠든 새벽에 용추골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서둘러 된장국에 한 그릇 따뜻한 밥을 먹으니 잠시 대간 길을 잊는다. 전날의 많은 비가 다소 개이기는 했으나 깊은 산중을 감싸고도는 운무는 걷힐 줄을 모르고, 잎사귀 맺힌 빗방울이 내리는 비처럼 머리를 적신다. 어제의 강행군의 여파가 오늘 언제쯤 피로를 가져올지.. 장성봉 들머리 턱이 유난히 힘겹게 느껴진다. (06:10)
40여분의 된오름에 시작부터 비 오듯 흐르는 땀으로 온몸이 적셔지고, 습한 기운이 산허리를 감싼 채 따라 오르니 첫 워밍업에서 머리가 몽롱해지는 기분이다. 애기암봉 갈림길에서 왼쪽 경사를 택하여 안부로 올라서니 잠시 걷히는 구름 속으로 희미한 햇살이 비추이니 그나마 반갑다. 장성봉을 마주하는 안부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사위를 조망해 보지만 좀처럼 지나온 대야능선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질 않는다. 이틀 동안에 몇 점은 건져야 할 텐데..
봉암계곡과 애기암봉을 감싸 안은 장성봉 마저도 오늘은 그리 좋은 조망처가 될 것 같지가 않다. 서쪽 관평리 산골 언덕에서 올라오는 5월의 훈풍이 감미롭다. 저 아래 구름으로 가려진 천수답 어느 귀퉁이에서, 春耕의 수고로움에 젖은 이마를 닦아주는 노부부의 사랑 담은 영혼이 어버이날을 떠올리는 50대 시골스런 남정네의 머릿속으로 그림처럼 스며든다.
5월 7일_일_07:20
1시간여의 워밍업에서 흘린 땀이 윤활유처럼 몸을 가볍게 만들고, 이번 구간의 남은 진행 방향으로는 지나온 어제의 난이도보다는 여유가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발목도 큰 무리가 없다. 잠시 선채로 휴식을 취한 후 왼쪽으로 길을 잡아 막장봉 갈림길을 향한다. 남쪽 하늘이 구름을 재우는가 싶더니 대야산 상대봉이 뾰족하니 머리를 내밀면서 떠나는 대간꾼들에게 섭섭한 인사를 나누고는 이내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저수리재 갈림길 못 미쳐 막장봉이 보이는 안부에서 당귀 몇 그루를 발견하여 깊은 뿌리를 캐는 행운을 함께 지켜본다.
1시간여 만에 877, 852,827봉 깔딱 오름들을 지쳐나간 후 마지막 801봉 암릉을 올라서서부터 발 뒤꿈치가 쓰려온다.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러니 미련 곰탱이 소릴 듣는가 보다.. 발목 인대 치료를 위해 목이 긴 신발을 골라 신은 것이 너무 오래되어 뒤꿈치가 안쪽에서 벗겨지고 또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견디며 앞길을 걸어야 하는구나.. 아직 5-6시간이나 남았는데.. 그래 잊자.. 인생도 고행이라면 대간길도 수행이다.. 한걸음 한걸음.. 소걸음(牛步) 걷는다..(08;30)
1975년 그해의 한 여름도 참 장마가 길었다.. 잦은 빗 속을 떠도는 20대 초반의 젊은 영혼은 장화를 신을 일이 없었다. 지필묵이 없는 독서로 세월을 죽이며 읽어 나가는 책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킬 때면 차라리 잠 잘 오는 참고서가 그리웠다. 고척동 102번지 3上8 방 작은 창 밖으로, 거추장스런 창살을 헤집고 시선을 돌리면 언덕 위 국민학교 학생들의 귀갓길이 비닐우산들로 가득 찬다. 문득 창 아래 처마 밑에서 살찐 쥐 한 마리가 지천으로 늘린 나팔꽃씨와 노란 콩을 줏으며 다정한 눈으로 친구 되기를 청한다.
5월 7일_일_09:00
몇 번의 신발 벗음으로 진행은 느려지고 후미를 함께 지켜주던 동료는 산나물을 뜯으면서 보조를 맞추어 주는 보살핌을 베푼다. 배낭에서 힘들게 날라 온 동동주 한 잔을 따라주니 이리도 고마울 데가 없다. 힘이 솟는다. 지난 수개월 동안이 비록 긴 세월은 아니라 할지라도, 힘들고 험한 어려운 길을 함께 겪어 오면서 이젠 정도 많이 들었다. 늘 얻기만 하고 나누어 줄 것 없음에 한탄스럽다. 조금씩 산허리를 감싸던 구름들이 벗겨지고 가끔씩 주위의 능선들이 5월의 살찐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건만 먼 곳의 조망은 힘들 것 같다.
787봉을 지나 내림길을 내려서니 살구나무골 고갯길인 커다란 공터가 나오고, 쉬고 있는 선두조의 꽁무니를 잡았으나, 신발 고쳐 신는 동안에 또 놓친다. 배낭에서 먹을거리는 나오지 않고 밴드와 연고들만 꺼내는 것이 한심한 듯이 쳐다본다. 한 달 전에 생긴 인대 염증은 많이 가라앉았으니 다행이고 어제의 빗물 속에서 생긴 습진과 뒤꿈치 정도는 다음 주엔 충분히 나을 수 있으리라.. 악휘봉 갈림길까지의 된오름이 30여분 동안 계속되고, 능선을 가로막는 기암들 틈새로 솟아 나는 작은 나무들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삶의 끈질긴 연유를 떠올려 본다. 틈새 먼지 같은 밑천에도 뿌리내려 강풍을 견뎌낸 후 저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나는데.. 온 천지를 휘젓고 나다니면서도 홀씨 하나보다도 못한 삶의 기반을 찾아 헤매다가 쓰러질 수는 없겠지...
5월 7일_일_09:50
악휘봉 갈림길에서 구름에 싸인 계곡 조망을 포기하고 대간길에서 30여분 벗어나 있는 악휘봉을 다음으로 미루고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 북쪽 방향 진행을 남동으로 돌리니 힘겹게 지나온 능선 길이 오른 어깨에 나란히 따라온다. 대간 마루금에서 만나기 힘든 계곡 물소리가 들려, 오른쪽 발밑을 향하니 마루금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어제 내린 비로 실고랑을 이루며 제법 애기 울음 같은 물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820봉을 지나 암릉에 올라서니 구름이 걷히며 멀리 대야산이 맨 끝에 서서 지켜보고 있다. 급경사 내리막을 조심스레 밟으며 내려선 후, 722봉 슬랩 암반에서 지릅티재에서 출발한 역방향 산행객 일행을 만나 잠시 길을 비킨다. 아직 모두들 싱싱한 기운으로 봐서 남은 길이 그리 험하지 않은 것일까.. 바람도 가상타... 은티재에 내려서니 성황당 나무는 흔적으로 남고 봉암 계곡 길은 역시 흉물스러운 목책으로 막혀있다.(11;10)
선두와의 거리가 멀어져 리본을 찾으나 대간 길 표지 리본을 누군가 몽땅 제거하여 은티재 내림길 쪽에다 매어놨다.. 참 심술궂은 고얀 놈들 같으니라구.. 오봉정 고개라 불리우던 이 고개가 어쩔 수 없이 봉암사 길이 막혀 삼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대간 꾼들의 사랑을 받는 은티마을 이름을 붙이는 게 옳은 것 같다. 참나무 숲으로 울창한 남쪽 사면과 북쪽의 활엽림이 대조를 이룬다.
5월 7일_일_11:35
구왕봉 마지막 고개를 향하는 마루금을 가로막은 주치봉 오름길이 60도 경사를 이루며 미끄러운 흙길을 밟게 한다. 20 여분 동안에 몇 차례 숨을 고르며 주치봉에 올라서서 간식을 나누고 있는 선두조의 꽁무니에 따라 앉는다. 복분자 한잔이 짜르르하게 느껴진다. 결국 신발을 벗어 칼로 낡은 곳을 수술하고 발에 바를 반창고를 신발에 바르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역발상.. 이리 쉬운 것을... 오늘 또 하나 배웠으니 이번 구간 여러 가지 이익이 많다.
후미를 걷던 동료와 함께 구왕봉을 향해 먼저 출발하여 선두와의 걸음을 벌어 놓기로 한다. 잠시 내림길을 걷는가 싶더니만 이내 가파른 오름길에서 1시간 남짓 긴 오름을 계속하여 마당바위에 올라서니 발아래로 봉암사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12:30) 잠시 바람을 쏘인 후 마지막 구왕봉 정상을 향해 안간힘을 쏟으니 이번 구간에서 가장 초라한 정상에 다다른다. 그렇게 흔하던 암석 하나 구경할 수 없고 마치 시골 동네 뒷산 같은 오솔길 삼거리에 , 누군가 고목 껍질 벗긴 팔목 굵기의 막대기 하나 세워 놓고 매직펜으로 구왕봉을 써 놓았다. 그나마 다행이다.(13:00)
아마도 높이로 봐서 정상은 분명 하나, 대간길 쪽으로 갈라지는 안부에 뒤이어 나타나는 암릉 조망처가 워낙 아름다워 그 사랑을 빼앗기고 말았을 게다. 지릅티재로의 직벽 내림길을 앞에 두고 이 구간의 마지막 줄잡이를 시원 섭섭하게 여기면서 발길을 쉽게 내려서질 못하고, 희양산과 봉암사 계곡을 한 없이 조망한다. 그러고 보니 맑은 하늘과 구름 없는 조망이 3일 만에 처음이다.
5월 7일_일_13:30
힘든 여정의 마지막은 항상 나아갈 봉우리를 쳐다보며 위안을 삼는다. 마주 보이는 희양산 북벽은 이미 한 달 전 어두운 밤에 긴 줄다리기를 끝낸 구간이고, 다음 주엔 조령을 건너 날라 포암산으로 오를 것이다. 대간의 중간점인 차갓재에서 나는 또 내 26산케 친구와 기념의 잔을 들 수 있으리라.. 발아래 직벽 크랙에 긴 로프가 나를 반긴다. 마지막까지...
30여분의 조심스러운 내려 밟기로 새벽을 깨웠던 지릅티재에 내려서서 흉물스런 목책이 더욱더 보강되었음을 확인한다(13:30) 귀찮게 돌아 넘어야 되겠다.. 다음의 대간 주자들은..
휘파람 불면서 은티마을을 향해 내려선 후, 사라진 선두조의 뒤를 밟으며 시원한 계곡에서 주저앉아 발을 식힌다. 지금 내게 그리운 건 편안한 안방이 있는 서울이 아니라, 작은 오름길이라도 좋으니 그늘 진 계곡에 한 평 돗자리나 깔아놓고 막걸리 한 사발 권하는 농부가 그립다..
“이제 형님 개인을 버릴 때입니다. 사사로운 행복을 위해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형님께서 그토록 원망하시는 전쟁과 그 기간 동안의 수모들을 이젠 한꺼번에 원수 갚고 역사의 증언대에 올라서서 일본 놈들에게서의 수모를 증언하고, 미제의 앞잡이들을 처단하고 만인이 웃으면서 살아가는 그날을 위하여.... 이제 혁명의 앞장에 나설 때입니다 “
도대체 혁명이 무엇이고, 행복이 무언 지는 스스로도 참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K노인에게, 그렇게 바로 얻을 수 있을 만큼 가깝고, 단 한 번의 급격한 폭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하며 가르치려는 이 사람은 대체 어떤 교육을 거친 것일까... 과연 혁명은 역사의 일부분으로서 늘 인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온 것일까... 그들의 혁명과 반혁명은 역사의 어떤 시기에, 누구에 의해서, 어떤 집단의 행복잣대로 옳고 그름을 결론 낼 수 있을 것인가...
60년의 봄, 젊다 못해 어린 학생들의 희생을 딛고 겨우 얻어진 자유라는 정치질서 속에서 과연 일부 자유당 독재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그들에게 린치를 가하고 진보의 필수 불가결한 폭력을 내세우며 역사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혁명주의자들은 이 땅의 민중들이 키워낸 역사의 산물인가, 그들은 반혁명에 대한 방어적 폭력이라 일컫고 있지만 러시아를 거쳐온 또 다른 공산당 독재의 탄압을 정당화하는 말들의 잔치인가... 소위 과도적이라는 미명하에...
아내의 비록 짧은 설명이었으나 믿음이 갈 만큼, 10년 전 전쟁 발발 수개월 후에 장례를 치르지는 못했으나 전사통지서 한 장으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던 아내의 옛날 남편이, 지금 느닷없이 형님이라 칭하며, 북에서 살아 넘어와 그더러 함께 혁명을 운운하니 K노인으로서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질 않고 그저 멍하니 길가 쪽 가게로 난 문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아내의 출현만 고대하고 있었으나 도무지 나타날 기색이 없었다...
5월 7일_일_14:40
한 달 전 새벽 밤길에서 홀로 약속했던 주막집 아줌마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따갑다. 소걸음을 채찍질하여 서낭당 아래 주막집 창가에 걸터앉아 생두부에 한 잔 막걸리를 들이키니 만사가 형통이다. 멀리 구왕봉 아래 배나무 과수원에서 꽃잎을 털고 있는 부부가 정겹다. 서로 나누는 말은 없어도 오늘 저녁 해거름엔 어디 시원한 물가에 앉아 발이라도 담글 수 있겠지.. 올 한 해 또 이 꽃만큼이나 흐드러진 배를 수확하면... 서울 가서 고생하는 아들놈 불러들일까.. 먼하늘 조령산 능선이 유난히 선명하게 마을어귀를 감싸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5/8 어버이날에
불효자 배 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