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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21회 소백산 종주(저수령-죽령)

06년 6월 10 - 11일

6/10  22:00      신도림 출발

6/11  02:55      저수재

        03:25       촛대봉(1,080)-투구봉(03:34)

        04:00       시루봉  (1,110)  

        04:30       배재                                      3.98km

                      1053봉

        05:00       싸리재                                    1.0km

        05:30       1033.5봉(흙목정상)-철탑

        06:00       뱀재 (헬기장, 10분 휴식)              2.6km

        06:40       솔봉(1,102)-07:00 모시골정상-1,011봉

        07:20       1,027봉   

        07:40       묘적령-아침식사(-08:00)            4.05km

        08:30       묘적봉                                     1.05km

        09:00       1185 안부

        09;30       도솔봉(1314)                             1.7km

        10:30       삼형제봉(1261) -10분 휴식 

        11:10       1286봉 갈림길

        12:10      죽령                                         5.8km

                                            9시간 15분             20.18km


         (12:40 풍기온천-13:30 안동향출발-14:30 하회마을-17:00 상경) 

新綠


 6월 10일_토_22:00

 기다리던 주말 대간길을 준비하는 베란다에 앉아서 쳐다보는 하늘이 다소 원망스럽다. 천둥 번개가 올해 들어 처음 느낄 만큼 요란스럽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중부지방 호우주의보라니... 배낭에서 우의를 위쪽으로 챙기고 본격적인 우중산행을 각오하며 부디 내일 새벽까지 다 쏟아붓고 적당한 안개비 정도라도 기대해 본다. 짐 챙기는 모습을 쳐다보는 물푸레와 배병장, 배소위가 걱정스런 눈치다. 부디 여러 대원들의 결원이 적었으면.. 그래, 자유인 8기가 나서면 날이 좋아지겠지... 연이은 4주 동안 궂은 날씨로 새벽 일출을 맛본 지도 오래고.. 벗들에게 보여 줄 멋진 풍광들을 내일은 담을 수 있을까... 다행히 내일 오후에는 개인 다니 안동에서의 경부 대동제 행사는 그런대로 지장이 없겠다.

 출발시간을 기다리다 신도림역으로 향하는 물푸레의 애마 속에서 신기하게도 날이 개이기 시작하니 안도의 한 숨이 절로 나온다. 부디 내일도... 신도림역 포장마차에서 장포드와 이슬이 한잔을 나누며 산행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내일의 산행에 이은 안동행사를 위하여 바쁜 시간계획에 염려스런 작전을 나누고 여러 산케 친구들을 떠올린다. 궂은 날씨에도 대간길에 함께 계속 동참하는 벗에게 고맙고, 진부령까지 즐겁게 자유인의 이름으로 남아, 두루 이 땅 곳곳을 함께 걸을 수 있으리라.. 

 비록 험상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결원이 그리 많지는 않아 산행버스 속은 다시금 활기가 넘치고 한밤을 달려 단양 톨게이트를 벗어나니(6/11 01:00) 완전히 개인 하늘이다. 아! 오랜만에 쳐다보는 보름달... 벌재 길을 잘못 들어선 산행버스를 돌려 저수령 길에 들어서니 맑은 하늘이 반갑고 부디 1000 고지 마루금에도 맑은 새벽이 이어지기를..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사로 출발하여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다소 피곤하기는 하지만, 저 달처럼 둥근 마음을 배우려 나선 이 길을 가벼운 걸음으로 춤추고 넘어서 죽령에 다으리라.. 그리고 동행하는 세 친구(장포드, 박검찰, 정원장)와 함께 안동 하회마을 강가로 내달아 부산 친구들과 작년 문경새재에서의 만남처럼 즐거운 축배를 나눌 것이다. 

안개비 속의 투구봉

 6월 11일_일_02:40

 저수령에 도착하여 산행채비를 하는 동안 우의를 꺼내어 배낭 무게를 줄인다. 다소의 안개비는 예상되고 6월 광엽에 맺힌 빗방울이 꽤 옷을 적시겠지만 차라리 가볍게 젖어 들리라.. 아직은 장마철이 아니니 정해진 량의 비를 쏟아부은 하늘에 무슨 큰비를 머금은 구름이 남아 있으려나.. 비록 1시간 전 산아래 쪽에서 동행하던 달빛은 사라지고 1000 고지 산허리는 구름 속에 흐리지만... 이제 서툰 관상대 수준으로 날씨도 전망해 본다. 화이팅을 외치는 대원들의 팔에서 졸음이 사라지고 녹음이 우거진 밤길 안갯속을 흐린 이마 등으로 밝히며 들머리를 오른다.(02:55) 

 길게 자라난 풀섶에 젖은 물기가 발걸음을 미끄럽게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짓자락이 젖어든다. 30여분의 워밍업이 꽤 가파른 밤길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구름 속에서 진행되니, 고도를 높인 마루금이 좀처럼 맑은 새벽을 내놓지를 않을 작정이다. 가쁜 숨으로 올라선 촛대봉 표지석 앞에서 한 밤중의 촬영이 제대로 담아질지 의문의 디카 샤터를 눌러본다.(03:25) 주위가 온통 어두운 구름 속에서 지체할 이유도 없이 곧장 시루봉을 향하여 10분 남짓 작은 물결 능선을 지쳐 나간 후 내림길에서 희미한 투구봉 표지판을 발견한다. 풀섶에 가려져 대부분 그냥 스칠만하다. 아직 소백산 국립공원(묘적령부터)은 아닐진대 소백산을 그리워하는 발길들에 보탬을 주려는가보다.. 

 잠시 카메라에 한 컷을 담고 나니 선두와 거리가 멀어져 어느새 앞선 조의 불빛마저 사라진 밤길에서 칠흑의 구름 속을 걸어 나가자니 자칫 긴 풀섶에 가려진 샛길이라도 나오면 영낙없이 길을 놓칠 상황이다. 큰 소리로 자유인을 외쳐가며 앞선 조를 따라붙으려 속력을 내보려 하지만 내림길이 만만치 않고, 오른쪽 가파른 사면이 어둠 속에서도 큰 각도를 느끼게 하니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20여 분간의 어둠을 헤친 후 작은 오름을 올라서니 시루봉(1,110) 안부에서 선두조와 합류하여 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고른다.(04:00) 

새벽안개-싸리재

 6월 11일_일_04:30

 시루봉을 지나 10여분 후 작은 헬기장를 지나 가파른 경사길에서 결국 미끄럼을 타고 바지 뒤쪽을 흙탕물로 적신다. 꽤 긴 내리막을 조심스레 밟아 잣나무 숲을 지나니 야목마을 갈림길 표지가 있는 배재에 다다른다. 이어지는 1,053봉을 오르는 숨길은 그리 힘들지 않으나, 좀처럼 걷혀 지질 않는 안갯속에서 새벽 일출을 기대할 수 없음이 안타깝고, 후두둑거리는 빗방울이 혹시나 뒤덮인 녹엽 위쪽 하늘에서 떨어질까 은근히 걱정도 하면서 배낭커버를 꺼내 씌운다. 

 1053봉을 단숨에 넘어 작은 암봉을 오른쪽으로 돌아 내리막길에서 선두대장이 인원 점검을 시도한다. 앞서 나간 정원장을 찾는 모양이다. 무전으로 안심을 시키고 조금씩 밝아오는 사위를 느끼며 싸리재에 내려선다.(05:00) 새벽을 기다리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이어지는 1033.5봉을 향하여 잠시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선 후 지루한 녹엽 터널을 이어간다. 6월 초하(初夏)의 싱그러움을 느끼며 바빠질 시골 농촌의 여름 정경을 상상해 본다. 그 옛날에는 모내기 시절, 벼 베기 시절, 철마다 짧은 방학으로 부모님들의 농사일을 돕게 하는 참 교육을 하던 때도 있었는데... 넓은 벌에서 힘든 허리를 구부리며 힘겹게 살아 이 땅을 지켜온 농민들이 어떤 까닭에 정치인을 대신하는 일에 내몰려 미국 땅 이역만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가...  


어느새 타쉬겐트에서의 이틀째 저녁도 제법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한낮의 더위를 잊게 하는 소슬한 바람이 도시 중앙을 흐르는 보스보강으로부터 러시아풍의 집들 사이에 자라난 나무들 사이를 헤집고 불어온다. 약간의 취기를 느끼는 K노인과 함께 비록 우중충한 거리이지만 젊은 미녀들의 날씬한 다리들이 꾸며주는 화려함을 맛보며 브로드웨이로 나선 후 왼쪽 칼마르크스 거리로 걸어 본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외치는 거리에서 그 이름마저도 낯설다.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정치 지배자들의 선택과 음모에 의해  해석된다는 점은 여타 종교 지도자들의 시대상황에 따른 교리 해석과 다를 것이 없겠지... “
러시아에서 독립하자마자 우즈벡공화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로 선회하여, 러시아식 공산주의를 극복하고 정치적인 통합을 꾀하는 대체이념으로 자릴 잡았다. 곧바로 우즈벡 언어를 공용어로 택하여 모든 교육과 공무에 적용하니, 러시아에서 이민 와서 정착한 한민족들에겐 심각한 환경 변화를 가져왔고 꽤 많은 젊은 고려인들은 소수민의 아픔을 간직한 채 모스크바 등지로 다시 역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통치자들에겐 물론이려니와, 모든 정당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가장 보편적인 담론으로 자릴 잡았다. 단지 관조주의자들의 중간적 성격으로 좌우 양편의 질시를 받아야 했던 아나키즘 세력의 몰락은 60년 혁명 이후 초기 민주주의 정치일정에서 치루어진 선거를 통해서도 확연했다. 오늘날 21세기의 세계화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어쭙잖은 이데올로기로 치부하고, 소위 객관적인 역사해석을 강조하며 전 세계 인류의 신자유주의를 역설하는 발 빠른 담론자들의 눈에 비춰지는 50년 전의 한국정치 현실은 매우 얕은 우물 안 개구리들의 논란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인데.. 민족이든 세계든.. 좁은 우물 안에서도 죽어 나가고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건.. 개구리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사람이 당하는 현실에서는... “
 1960년이 지나고 1961년 봄이 다가올 무렵, 기존 위 체제와 권위에 도전하는 수많은 시민단체를 비롯하여 학생운동의 주력들은 정치적인 목소리를 키워나가고 있었고, 봇물처럼 쏟아지는 사회적인 요구들을 채 수용할 겨를도 없는 민주당 과도정부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속에서도 배고픔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처절한 욕구가 상존하고 있었으니, 민심을 대변하겠다는 또 다른 쿠데타 세력의 가능성은 늘 도사리고 있었다.
 “대구에서 선거에 지고 난 뒤 유림선생은 한동안 민족주의에 대한 자체적 반성을 강조하며 좌우 합작을 통한 민족통일론을 거둬들일 계획이었지.. “
 결코 공산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청량리 집에서 칩거하며 새로운 혁신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한 정치적 이념을 재구상하고 있었다. 또한 혁신 세력이 빨갱이 집단에 동조하는 기회주의적인 친 공산주의자로 내몰린 남한의 정치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노선 정립에 골몰하고 있었고, 그해 초 깊은 겨울을 K노인은 유림선생을 위한 마지막 봉사로 여기며, 다가오는 봄에는 친지의 도움으로 영등포 쪽 공업학교에서 교단을 밟을 꿈에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묘적령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풍기 쪽 죽령 고갯길

 6월 11일_일_05:30

 봉우리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밋밋한 걸음으로 1033.5봉에 다다르니 표지판에 '흙목정상'이라 적혀 있다. 내림길로 이어지니 정상은 정상일진대.. 어디쯤 흙목마을이라도 이어져 있는 것일까.. 내림길 이후 버려진 헬기장처럼 보이는 공터가 풀섶에 뒤덮여 있고, 이어지는 대간 마루금에서 거대한 송전탑을 만난다. 생활에 꼭 필요한 전기를 높은 산을 넘겨서라도 실어 보내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훗날 개발의 방향에서 가능하면 지역별 발전을 구상하여 긴 거리의 이동을 피할 수만 있다면 경제적으로도 좋을 것인데... 큰 오르내림 없는 숲길을 걸으며, 헤드랜턴을 접은 지 오래고 벌써 허기짐을 느끼며 뱀재(헬기장)에 다다른다.(06:05) 

 어느새 밝은 아침을 맞았으나, 바라던 일출은 또 보지도 못한 채 계속되는 안개구름만이 조금씩 엷어짐을 느끼며 도솔봉쯤에서 소백산을 조망할 수 있길 바래본다. 10분 정도 휴식을 취하며 간식으로 허기를 때운 뒤 , 1시간쯤 후에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고 솔봉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오름길을 암릉구간을 피해 우측사면을 타고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다. 공터를 지나 1063 안부를 벗어나니 솔봉(1101.8)이 제법 뾰족하니 솟아 기대를 하고 올라갔으나 잡초만이 무성하다.(06:40) 차라리 표지기를 따라 우회하는 편이 나았겠다... 다시금 이어지는 마루금을 올라서서 바삐 20여분 내림길을 밟아 내리니 안내 표지판이 서 있으나 떨어져 나간 자리에 작은 글씨로 모시골 정상이라 적혀 있다.(07:00) 안내 지도상에 오른쪽 고항리에 모시골이라는 마을이 있으니 아마도 그 옛날 그 동네 사람들은 이곳 마루금까지 오르면 정상으로 여긴 모양이다. 흙목정상처럼... 덕유산 동엽령에

서 용추계곡 하산길에 정상을 물어오던 어느 연인들처럼... 

 아침 식사를 위해 주위를 둘러보지만 젖은 풀섶으로 마땅한 공간을 확보하기 힘들다. 밝아오는 아침의 기운이 짙은 안개를 밀어내기 시작하며 간간이 햇살마저 느껴지긴 하나 주위를 조망하기엔 둘러싼 안개가 만만치가 않다.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 1011봉을 지나고 1027봉에 이르러 지친 배를 달래기 위해 좁은 정상에서 오손도손 아침상을 펼친다.(07:20) 묘적령에서의 아침식사를 예정하고 만나기로 했던 정원장을 염려하여 대원들을 뒤로 한채 묘적령으로 계속 내려선다.(07:40) 기다리던 정원장은 추워서 할 수 없이 먼저 진행한 모양이다. 셋이서 길섶에다 신문지를 깔고 오붓한 아침상을 차려 허기를 때우지만 휴게소에서 마련한 햄버거가 맛이 없다고 박검찰이 불만을 터뜨린다. 대간길은 고사하고 밤길 긴 산행이 처음인 친구가 그런대로 잘 버텨 내고 있다. 물론 힘들겠지만 점점 재미를 붙이리라 확신한다. 참 순수하게 공무원으로 살아 만학으로 얼마 전

석사학위를 획득한 착한 친구다. 

도솔운해-도솔봉에서 바라본 묘적봉 마루금

 6월 11일_일_08:00

 간단한 김밥으로 서둘러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오후의 안동행사를 의식하며 묘적봉으로의 발길을 오름길로부터 시작한다. 10여 분 만에 고갯길을 지나는 오른쪽에 전망바위가 있어 맑아오는 예천 쪽 골짜기와 지나온 대간길을 조망해 본다. 서서히 걷혀오는 구름이 남으로 향한다. 곧이어 1027봉에서 식사를 끝낸 선두조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묘적봉(1148)에 올라서니 어느새 전망바위를 스쳐 지나온 선두 대장이 자릴 잡고 있다. (08:30) 잠시 디카 앞에서 포즈를 취한 뒤 맑게 개인 동쪽 능선 위로 도솔봉 오르는 암봉들이 아름답게 다가오나, 짙은 녹음에 가려진 시야가 좋은 촬영을 방해함이 아쉽다. 몇 차례 뒷걸음질 쳐가며 나뭇가지 사이로 애를 써보지만 보급형 카메라의 한계를 느낀다. 

 약간 힘들게 올라선 1185봉 안부에서 (09:00) 돌아보는 묘적봉이 마루금을 사이에 두고 남으로 운해를 안고 있다. 힘겹게 올라온 계단의 숫자가 107 계단이라니... 멋진 풍광을 감탄하며 오랜만에 좋은 사진을 디카에 담아본다. 마주 보이는 도솔봉이 두 개의 연이은 봉우리로 솟아 화려한 녹엽으로 풍성하게 치장한 채 정상 암봉을 살짝 보이며 반기며 기다리고 있다. 힘겨운 암릉구간을 밟아 오르니 헬기장 같은 공터를 지나고 까만 오석으로 잘 새겨진 도솔봉 표지석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기념 촬영을 마쳤지만 뭔가 이상하다. 미리 본 도솔봉 사진에서 한자로 된 표지석을 본 것 같은데... 바로 이어지는 연봉으로 향하는 왼쪽 거치른 암릉을 올라서니 제대로 된 표지석과 돌탑이 정겹게 맞이한다. 두솔봉(兜率峰)이라..'여지도서'에 두솔산이라 적힌 대로 제대로 적은 표지석이다. 투구처럼 거느린 봉우리들을 둘러본다. 마루금에 이어지는 소백산 줄기의 여러 봉우리들을

제하고도 흰봉산, 삿갓봉, 양장봉, 봉.. 봉.. 봉들... 멀리 남서쪽으로 저수령에서부터의 대간길이 참 길게도 느껴진다. 

 동쪽 소백산 봉우리들은 아직도 구름을 완전히 벗지를 못한 채 멀게 느껴진다. 힘겹게 올라온 이 정상에서 주위를 독도 하며 잠시 머무른다. 나를 강하게 지탱해 줄 수 있는 긍지를 위하여 더 높은 곳으로 끊임없이 향해 걸어가는 이 발길이 부디 아름다운 구름바다처럼 광활한 이 땅을 두루 밟을 수 있는 영광을 간직하기를.. 돌탑에 작은 돌 하나 얹으며 빌어 본다.(09:30) 흰봉산을 왼쪽으로 어깨 하며 북쪽 마루금으로 10여 미터 조심스레 직벽을 내려서니 먼저 지나온 제2 도솔봉 정상에서 9부 능선으로 쉽게 이어지는 오솔길이 보인다. 아마도 위험한 두솔봉을 피하기 위해 일반등산로를 개설한 모양이다. 

두솔봉에서

 6월 11일_일_10:00

 삼형제봉으로 향하는 두솔봉에서의 내림길은 간간이 젖은 줄잡이를 거치며 날카로운 암릉이 이어져 매우 조심스럽다. 너덜바위로 이어지는 내림길이 발목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 30여분 만에 삼형제봉 직벽 오름길을 마주하는 안부에서 앞서가던 친구들이 멈춰 선채로 기다리고 있다. 웬일인가 했더니 검찰 친구가 도솔봉 암릉 오름길에서 오른 손바닥을 다친 채로 말없이 버텨 온 모양이다. 미련한 친구 같으니라고...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다. 재빨리 소독약과 연고를 꺼내 바르고 반창고를 붙인다. 먼저 간 익래 친구가 몇 년 전 도봉산에서 입었던 상처가 다시금 떠오른다. 부디 좋은 하늘에서 편히 쉬고 있겠지.. 오늘은 부산 신발 공장시절 너를 좋아하던 부산 친구들도 많이 만나는데... 

 이어지는 풍광들로 선두와 후미의 거리가 꽤 멀어져 조용한 홀로 산행을 맛보며 가파른 삼형제봉을 오르기 시작한다. 지난 삼봉산 구간에서 한겨울의 동양화 같은 산수화를 맛보았다면 이젠 녹엽이 화려한 채색 짙은 풍경화를 맛보는 계절이다. 더욱 푸르고 짙어지는 이 풍요로움을 모든 이 땅의 영혼들이 한껏 누리며 고산 준령을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니, 무릇 善이란 내 하나의 이로움보다는 주변 모두의 共同善으로 태어날 때 그 본질을 아름답다고 하겠지...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길을 오른쪽으로 하염없이 걸어 오르니 삼 형제는 간 곳이 없고 멀리 죽령고개 넘어 소백산 연화봉에 자릴 잡은 천문대가 구름을 벗은 채 마주 보며 오라 손짓한다. 그래 2주 후에 찾으리다. 좁은 고스락에 삼 형제를 기념할 표지석을 세울 자리도 없을만하여 소나무에 예쁘게 매달아 놓은 명찰로 대신한다.(10:30) 다시금 아래쪽으로 내려서서 1286봉으로 향하는 안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즐긴다. 강대장의 한 잔 복분자 술이 입 속에서 감칠맛이다. 

삼형제봉에서 바라본 죽령, 소백산-연화봉, 천문대, 비로봉...

 6월 11일_일_10:40 

 삼형제봉 아래쪽 안부에서 잠시 휴식 후 1286봉으로 이어지는 왼쪽 9부 능선길을 내려서고 있을 때 마주 오는 등산객.. 아니 정원장이다. 출발 후 처음 보는 얼굴이다. 역시 산케중의 으뜸이다. 함께 걸으면서 안동으로의 이동계획을 꾸며 본다. 그리 높지 않은 오름길을 거치면서 1286봉 갈림길에서 잠시 친구들과 의논하여 풍기온천에서 목욕 후 택시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서둘러 오른쪽으로 급히 꺾어 내리는 내림길을 밟는다.(11:10) 마음은 급하지만 첫 대간길에서 힘겨울 친구를 위해 천천히 여유로운 걸음을 걷는다. 멀리서 죽령을 거쳐 도솔봉으로 오르는 단체 산행객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버스 2-3대 정도의 꽤 많은 인원들이 연이어 올라온다. 다들 휴일을 즐기는 즐겁고 간편한 걸음걸이다. 지치고 땀에 절은 마지막 발길을 걸어 내리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산죽군락지대를 지나고 1130 안부를 지날 무렵  꽤 큰 묘터를 지나며 그런대로 잘 보살펴진 느낌이다. 지난주 방문한 고향 선친의 묘소에서 잔디가 소담스레 펼쳐지고 주변 방문객들의 칭찬에 기분이 좋다는 형님 내외의 애쓴 보람에 많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다. 무덤이란 그곳에 누워있는 저승의 영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승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질긴 인연을 맺어주는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으리라... 


느닷없는 방문객이 하룻저녁 나절을 정신없이 지나간 작은 집 마루턱에서, 마치 태풍이 쓸고 간 흔적 없는 들녘처럼 휑하니 비어진 안방을 바라보며, 건너편 가게쪽문을 드나들던 아내의 모습도 기억이 나질 않고, 수년간의 정겨운 밥상자리마저도 전쟁 중의 산간 오지 마을로 바뀌어 보인다. 인연이라는 끈질긴 숙명을 타고 들어오는 비극의 역사가 온 방을 가득 적실만큼 초겨울 찬비와 함께 엄습해 온다.
“미안합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그냥.. 장수 본가로 날라 온 전사통지서를 믿고...”
황해도가 고향인 아내의 슬픈 운명을 짐작하는 K노인은 가만히 안아줄 수 밖에는 아무런 물음도 가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날 밤 속절없는 운명의 얘기들로 바깥에서 지새웠을 아내의 힘없는 어깨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었다. 또한 다시금 마지막 이별이 될 수밖에 없는 방문객의 사라짐에도 아무런 배웅도 없이 스스로의 자취를 숨김으로서 이 작은 집을 지키려는 아내의 뼈아픈 행동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래요.. 나도 이젠 정치고 뭐고 다 집어치울 거요.. 빌어먹을 민족이니 민주니 자유니.. 다들 배부른 놈들이 벌이는 부질없는 논쟁이겠지.. 걱정 말아요.. 내년 봄엔 잘 될 테니... “
K노인은 진심으로 아내를 더욱 사랑스럽게 여기며 점점 작아지는 그의 꿈마저도 아내와 가족을 위해 접을 수 있었다. 인간의 삶이 결코 한 순간의 흘러가는 역사의 한 부분만은 아닐진대, 스스로의 의식으로 인간적인 삶을 느끼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또한 다소 이기주의적인 소시민의 바램일지라도 내 지나온 삶의 대부분 동안 갈구해 오던 자유라는 것이 이 작은 행복이라는 것도 새삼 느끼고 있었다.
“잊어요... 그냥... 잊읍시다... 다... 미친놈들 때문에... 이놈의 세상이 좋아질 때까지...”
부디 그 사람이 아무런 흔적 없이 북으로 잘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아내와 마찬가지로 K노인으로서도 더욱더 절실했다. 다시금 이 작은 행복이 상하지 않기를 바래는 두 사람의 희망은 오직 두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는 그날까지 가까스로 가꾸어 온 가정을 지켜나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춥고 황학동 언저리에 얼어붙는 청계천의 흐름만큼이나 두 사람의 가슴은 시려오고 있었다. 
하산길 샘터 옆 추모표지석

 6월 11일_일_11:40

 맑은 샘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10년 젊음을 마시고 곁에 마련된 어느 산객의 영혼을 추모하는 벗들의 글귀를 읽어 본다.. 산을 좋아하다 백두대간의 품으로 돌아간 친구에게 편히 쉬라고... 참 행복한 영혼으로 잠들겠구나... 죽령으로 내려서는 마지막 봉우리는 군부대가 위치하여 오른쪽 사면으로 우회하여 8부 능선으로 이어진다.. 30여분의 꽤 긴 내림길을 서둘러 먼저 내려가 교통편을 예약하기로 한다. 멀리서 검은 등뻐꾸기(속명 "홀딱 벗고")가 네박자 울음으로 홀로 산길을 동행한다. 


 6월 11일_일_12:10

  죽령 옛길에 내려서니 주막이 반겨주고 힘든 발걸음을 달래 줄 동동주를 한 잔 마시니 그냥 오랫동안 죽치고 앉고 싶기도 하다. 주막집주인이 붓글씨로 적어주는 멋진 택시 기사의 핸펀 전화번호로 풍기 온천에서의 대기를 예약하고 잠시 산행버스의 도움으로 10여분을 달려 풍기 온천에 도착하여 유황물에 몸을 담그니 매끄러운 물맛처럼 오늘의 진행이 매끄럽게 안동 하회마을로 이어진다.... 

 

 소백산 아랫마을 풍기 인삼 맛이 풍긴다. 


2006.06.12 배기호


어느 분이 전화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심에 오히려 기뻤습니다.. 


두율(兜率): 범어(梵語)의 tusita(미륵보살이 사는 하늘)를 이두문으로 차음(借音)하여 적은 것임.


 신라 경덕왕 19년 (760) 월명대사의 향가 '도솔가'를 삼국유사에 적혀 내려오면서 두리, 덧노래, 두율, 두솔, 등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산이름 중에 한자로 兜率山, 또는 兜率峰으로 적은 문헌이 많은데, (비로봉만큼이나), 과연 불교정신으로 붙인 이름이냐? 한자의 뜻으로 여러 봉우리를 거느린 으뜸산이라는 뜻이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지리서의 견해로는 두솔로 읽음이 맞는 것 같고, 이번 소백산에서 처럼 비로봉을 마주 보는 讚佛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도솔로 불러도 괜찮은 의미가 되겠습니다.. 아무튼 양쪽 다 많이 불리고 있으니 같은 이름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6/15 배  기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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