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년 9월 23 - 24일
9/23 22:00 신도림 출발
9/24 02:50 삽당령(680) 출발
-862봉-철탑-임도-방화선(벌목능선)
04:00 대화실산 갈림길-912봉
04;15 들미재-978.7봉
05:05 석두봉 (982) 6.8km
05:15 헬기장 -산죽밭 -989.7봉
06;30 1006봉
07;12 화란봉 (1069) 5.4km
07:30-08:00 아침식사(30분)
08;35 닭목재 (690) 1.95km
09:37 956.6봉(맹덕목장 후문)
10:10 제1쉼터 2.0km
10:30 1031봉
10;45 제2쉼터 2.0km
11:20 고루포기산(1238.3)-왕산 3쉼터 1.75km
11:40 오목골 삼거리 전망대(5분 휴식)
12;32 횡계치-857봉
13:34 돌탑-능경봉(1123.1) 5.4km
14:00 샘터-임도
14:10 대관령 1.8km
11시간 20분 27.1km
9월 23일_토_22:00
지난주부터 시작된 구강 공사로 인해 이번 주 산행은 신체적 환경 및 여건이 수준이하다. 그동안 대간 일정 때문에 미루고 미뤄 왔지만 고민 끝에 꾹 참기로 하고 내린 공사돌입이지만 막상 만만치 않은 수술등 대공사로 인하여 한쪽 볼이 부은 채로 배낭을 짊어지는 내 모습에 물푸레의 한숨이 오버랩된다. 겨울 옷을 가지러 온 배소위가 양주와 군인가족카드를 선물하고 간다. 물푸레는 농담 삼아 말뚝(?)을 박았으면 좋겠단다. 자식봉양받는 기분이 이리 좋은데.. 어릴 적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에 풀도 한 번 제대로 못 뽑는 추석맞이가 마음 한 편에 걸린다. 다행히 장인 장모님이 건강하게 장수하시고 언제든 내 작은 마음 씀씀이만큼 봉양을 받을 수 있으니 참 다행이고 고맙다.
추분 날씨답게 秋凉을 느끼며 모처럼 맑은 하늘을 보이는 영동고속도로를 지나던 산행버스는 용인 휴게소에서 출정의 막걸리 건배로 또 한 구간의 무탈산행을 빌어본다. 원두커피 한잔으로 대신하며.. 이제 이 고속도로도 오대산을 넘고 나면 한동안 뜸하겠지만, 대관령 터널을 지나 강릉휴게소에서 동해의 새벽 밤바람을 맞는 기분은 항상 상큼하고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미시령을 넘어 속초 앞바다를 맞이할 때처럼.. 강릉저수지를 지난 35번 국도는 남대천 상류를 따라 왕산면을 지난 삽당령에 작은 오름을 거쳐 단숨에 닿아 있다. 지난 구간 익숙해진 삽당령 표지석이 음력 초이틀 달도 없는 칠흑의 밤하늘 아래 별빛으로 반가운 미소를 띤다.(02:20)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인가.. 이슬이 한 모금 못 마시고 산행버스에서 앉은 새우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결국 한 잠도 맛보지 못한 채 오늘 10시간 여를 행군하자니 벌써 긴장이 되며 왠지 몸이 무겁다. 다행히 날씨는 지난번과는 달리 그리 춥지도 않고 서늘하여 산행에 딱 알맞은 날씨다. 서둘지 않고도 천천히 산행 준비를 마치고 힘찬 화이팅을 외치며 어둠 속의 대간 들머리를 찾아 임도를 밟아 오른다. 일산 출발의 대원이 동행한 예쁜 따님을 챙기는 모습에서 한밤을 밝히는 아빠의 사랑을 부러워한다. 딸을 키워 보질 못해 참 아쉬운데.. 저런 예쁜 며느리를 빨리 보고 싶다.(02:50)
9월 24일_일_03:00
짧은 임도 오른편 들머리에 올라선 대간 밟기는 동네 뒷산처럼 매우 편안하다. 그믐 갓 지난 새벽은 밝은 별빛이 동행하니 가을 하늘 높은 줄은 칠흑의 밤에도 느낀다. 어디 숨어있던 초생달이라도 장식으로 함께했으면 하는 욕심도 내어 본다. 왼쪽 화실 마을 불빛 서너 개가 별빛처럼 가물거리며 가지사이로 숨바꼭질하며 따라붙는다. 20여 분 후 통신 중계탑 거대한 철망을 스치듯 돌아 내리니 왼쪽 임도를 거쳐 다시 마루금을 찾아 대간 맥 잇기 걸음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에서 방화선 벌목지를 놓치고 어느새 大花實山 갈림길의 표지목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다.(04:00) 소문으로 큰 열매 형국의 산세에 고랭지 채소밭을 일구어 볼품이 없다 하나, 온통 칠흑이라 상상으로 스쳐간다.
다시 오른쪽 북쪽으로 꺾어 912봉을 가볍게 지나 짧은 내림으로 들미재에 다다라 선두조와 함께 랜턴을 꺼고 고개를 젖힌 채 하늘 별바라기를 즐긴다.(04;15) 편한 걸음으로 978봉을 올라서니 어느새 땀이 배인다. 300미터 고도를 무심결에 올라서니 대간 구간 중 비교적 편안한 워밍업이다. 왼쪽 잡목지대를 지나 짧은 된오름을 거치니 모처럼 너덜 돌로 이루어진 石頭峰(991) 좁은 정상에 올라서지만 아무런 표지석도 없이 잡목에 걸린 명찰만 선명하다. (05:05) 왠지 그 돌머리 이름이 부담 없이 가깝게 느껴진다. 정상에 돌이 많으니... 이렇게 우린 당연하고 자연스런 어감을 느끼는 말에서 인간에게 접목되면 부정적인 어휘로 다가오게 되는 것일까.. 소위 잘 난 머리들이 지어낸 비유들이라서 그런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헬기장 쉼터로 내려서서 산죽밭 이어지는 길에 배낭을 벗은 채 휴식을 취하며 대용수동 갈림길 표지판에 기대선 채 목을 축인다.(05:15) 오랜만에 동행한 산케 친구의 얼굴이 밝다.
긴 산죽밭길을 천천히 걸어 오르며 여름을 지나 청초함을 유지한 채 겨울을 채비하는 키 작은 산대닢이 랜턴 불빛에 광택을 발하며 가을 새벽이슬을 머금은 채 바지자락을 적신다. 간간이 하늘거리며 줄을 잇는 억새 머리카락이 더더욱 정겹기는 하나 갈길을 붙잡으며 막아서는 긴 풀섶에 스틱 쥔 양팔이 바빠진다. 968 안부를 지나고 잡목 숲을 헤쳐 나가니 989봉 큰 오름에서 잠시 표지판을 놓친 선두조를 기다려 왼쪽으로 90도 꺾어 내린다.(06:00) 꽤 긴 사면을 서쪽으로 밟아 내리며 점점 일출 방향이 가려짐에 돌아서길 반복한다. 946봉을 지나고 1006봉 오름길에서 일출을 담고 싶으나 가려지는 나무들 탓에 아마추어 카메라의 한계를 느낀다. 참 좋은 날씨에... 시간상 위치 선정이 아쉬울 뿐이다.
9월 24일_일_06:30
1006봉을 넘어서면서 일출을 포기하고 화란봉 오름길을 재촉한다. 왕산리 마을로 이어지는 계곡의 시발점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반가워 새벽의 어둠을 뚫고 샘을 찾으려 하나 붉게 물드는 키 작은 단풍이 가로막고 버틴다. 대간길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참 귀한 소리다. 일출과 함께 선두조와는 꽤 멀어진 기분이다. 아직은 땀도 많이 나질 않을 만큼 청명한 가을 새벽을 즐기며 지난가을 지리산 만복대의 가을을 회상해 본다. 천천히 화란봉을 향한 오름 길에서 이제 마무리되어가는 대간 후의 아쉬움을 달랠 방법도 생각해 보고, 짧다면 짧은 1년 동안의 긴장 속에서 내가 일구어 낸 보람들을 살펴본다. 4년 전, 갑작스러운 건강 이상을 발견한 뒤 짊어진 배낭이 이렇게 내 인생의 마지막 자락을 아름답도록 챙겨주니 참 다행스럽고 행복을 느낀다. 심신의 여유로 돌아볼 내 강산은 이리도 넓고 많은데.. 왜 이 땅을 좁게 느끼며 저 아래 회색의 도시 속에서는 답답해져야 하는지.. 갈길도 바쁜 중생들인데..
이제 수많은 지맥들을 좇으며 골골이 스며 있는 역사의 원혼들을 접하고, 산산이 뿌려진 아름다운 영혼들과 춤추며 걸어가리라.. 그리하여 환갑 전 어느 봄날 낙동정맥의 끝자락 몰운대(혈청소라 불렀던가)에서 발 담그는 날 작은 목소리로 되뇌어 볼 수 있을까.. 이제 세상을 조금 알 것 같다고.. 내가 찾던 자유로움을 온몸에 다가오는 전율처럼 느낄 수 있기를.. 그리도 먼 길을 돌아 돌아 찾아가는 고향 어귀에서 나는 무슨 보람을 한 손에 움켜쥐고, 또 한 손에 무슨 선물 보따리를 들고 있을 것인가...
9월 24일_일_07:00
화란봉 직전 안부에서 동해 쪽을 뒤돌아 보며 맑은 가을 아침을 호흡하며 잠시 숨을 고른다. 모처럼의 오름길이 어느새 30여분이 흘렀나 보다. 오늘 산행의 전반부는 긴 거리에 비해 그리 힘들지 않은 오르내림 탓에 새벽의 트레킹이 상큼하게 여겨질 만큼 여유롭다. 후미조도 그런대로 많이 뒤쳐 지지 않고 좋은 행렬을 이어오는 모양이다. 꽃모양의 화관이 둘러싼 형상이라는 花蘭峰(1069)은 무성한 녹음에 둘러싸인 채 아직은 그 조망을 숨기며 역시 멋들어진 정상석 하나 챙기질 못했다. 다소 초라해 보이지만 정겨운 표지목을 배경 삼고 땀을 씻으며 한 장 사진을 남겨 본다.(07:15)
화란봉을 넘어서서 남서로 돌아내리니 멀리 옥녀봉 넘어 발왕산이 펼쳐지고, 발아래 닭목이 마을의 자칫 삭막할 풍경들을 감싸는 운무가 遠景을 장식하니 바로 한 폭의 수채화를 펼치고, 詩句로 화답할 수 없는 짧은 내 재능을 탓할 수밖에... 행여 다른 님의 재담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디카에 담아 나르기에 바쁘기만 하다. 도암호수에서 흘러내리는 운무는 피덕령 넘어 새벽의 왕산 계곡 자락을 떠날 줄을 모른다. 낭떠러지 암벽에 키운 백색구절초의 화려함이 돋보이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고고한 자태와 품위를 뽐내는 금강송 군락에 또 한 번 나의 보람을 느낀다. 내가 찾는 이 길이 바로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수없이 간직한 채 행여 부질없는 속세의 티끌에 물드는 심사들을 씻어주리니...
타쉬겐트에서의 마지막 날 새벽이 밝아왔다. 3일간의 여정이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K노인과의 만남에서 현대사의 꽤 긴 이야기들에 빠져 들었던 시간들이 왠지 아직도 미흡하게 느껴짐은, 오히려 60년대 이후 이 땅의 젊은이들과 함께 살아온 나 자신의 자아를 찾아야 되겠다는 숙제만 남겨 놓은 채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함이 아쉬운 탓이리라 여기며 공항으로 떠나기 전에 오늘은 중년의 그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결론을 기대해 본다.
김병화 농장에서의 비닐하우스 골재 설치교육을 위해 떠나는 찦차에 오르며 K노인의 설명은 다시금 70여 년 전 연해주(블라디보스톡)에서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된 후 중앙아시아의 사막성 기후의 땅에 쌀과 목화를 생산하는 집단 농장을 일구는 슬픈 고난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그 지독한 고통의 세월에 대한 역사 이야기는 김병화 박물관에서 손자며느리 엠마 예쁘니 여사의 고향 할머니 같은 웃음을 볼 때 가지 계속되었다.
오전 일찍 출발한 탓에 1시간여의 교육이 오전 중에 끝나고, 차르박 호수 쪽의 재배농장으로 이동하면서부터 고산지대의 경치는 나무도 별로 없는 광활한 초원으로 이어진다.
“60년대 한반도의 배고픔을 피부로 느끼며, 정치 이전의 현실을 인식하고, 민주든 민족이든, 자유든 평등이든 간에, 진보든 보수이든 모든 것을 뒤로 미루며 강한 개발정책을 밀고 나간 박대통령 시절에 사실 누구든 그 명분을 그슬릴 만한 힘이 없었지.. 어쩌면 그것이 백성들이 원하는 쉬운 개혁이었는지도... “
오늘날 소위 개혁이라는 미명으로 진보와 보수 공히 부르짖는 그들의 역사에 대한 파괴적이고 궤변적인 부르짖음들이 과연 이 땅의 힘없는 백성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지.. 이제 지난 40여 년 전의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될 일이다. 대중들의 이목을 교묘하게 피한 채 정치적 비난으로부터는 전체적으로 보호되는 오늘날의 소위 민주 정치인들은 모두 그들의 행동에 대해 무책임하고, 결과에 대해 눈이 어둡고, 가공적이고 명목적인 개혁에 매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좌파라고 자임하며 성공한 듯한 개혁자들은 그들이 차지한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모든 제도적 장치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으며, 점진적 세력을 강화해 나가 이 땅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도 완수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보수 우파라고 자임하는 자들은 이 땅의 무관심한 백성들을 극히 개인주의적인 移民의식으로 내몰아 자아의식을 상실한 자본주의의 순교적인 집단으로 지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사회적 발전이나 그 변형은 결코 어느 집단의 의도된 결과를 위한 들러리로 머무르진 않을 것이다. 조직화되지 않은 수많은 농민들,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 근로자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먼 훗날의 혁명적 사회제도를 위한 오늘의 희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박대통령을 사회주의자로 인정하고 이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훗날 골고루 배 채울 정책이라도 세울 수 있게 몰고 갔으면.. 차라리 민족주의자로 인정하여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북한과의 대등한 협상에 나설 수 있게 몰고 갔으면.. “ K노인의 정치적 의식이 다시금 혼돈스레 여겨질 만큼 방향이 선회되고 있음을 느낀다.
9월 24일_일_07:30
화란봉 내림길 조망처 아래 가파른 길을 밟아 내리다가 길섶 작은 평지에 잠시 머물러 앉아 아침 식사를 때운다. 입안이 완전치 못해 우유와 토스트 한 조각으로 배를 채우자니 영 개운치 않다. 이럴 땐 막걸리에 열무김치가 제격인데.. 역시 토종을 벗어나질 못하나 보다. 1년여 30회에 달하는 동행 산행에서 느껴지는 동지애들.. 이 대간 밟기가 끝나면 또 얼마나 심한 몸살들을 앓을 것인가.. 함께 걷고 함께 나누어 먹고 함께 힘들어했던 지난 구간들만큼 많이 쌓인 이 아름다운 정겨움.. 이른바 대간병이라는 허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곧바로 정맥길을 이어 나가고 싶다.
새벽 내내 편평한 오르내림으로 높여 온 1000여 m 고지에서 식사 후 급경사 된비알을 밟아 내리자니 앞으로 남은 본격적인 고루능경이 걱정되어 무릎에 보호대를 착용한다.(08:00) 가끔씩 마주치는 대관령에서 새벽 02시에 출발했다는 남하 대간팀들을 만나고 배낭 없이 아버지와 함께 걸어 오르는 열서너 살 어린 학생의 예쁜 손도 잡아 본다. 참 보기 좋은 삶이요, 자식 교육은 이런 것이 아닐까.. 즐거운 걸음으로.. 아빠와 함께..
오늘날 고교 평준화에 대해서는 결코 찬성하질 않는다. 중등 수준의 의무 교육을 마친 후 제 각기 적성화 교육의 길로 찾아갈 수 있는 예전의 고교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80년대 어느 권력자 한 사람의 결론으로 고교 평준화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목적의 전부는 아닐지 모르나, 민심의 방향을 돌리고 다수 백성들의 불만을 무마하며 소위 일류 학교 출신들끼리의 기득권에 못마땅해하는 다수 집단의 지지를 유도한 면은 없을까.. 그것이 정치적 목적이든 교육적 실패이든지 간에 지금까지의 정치와 관료사회를 차지하고 있는 일류 출신들의 끼리 문화에는 반성도 필요할 것이다. 현 정부의 낙하산 코드 정책은 어쩌면 그 이전의 정치 문화에 대한 컴플렉스의 결과일지도..
농산물 저장창고 뒤를 돌아 내리는 닭목령 415번 지방도에 내려서서 후미조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한다.(08:30-08:50) 간간이 닭목처럼 좁은 길을 지나는 차량이 조심스럽다. 서쪽으로 이 길을 따라 내리면 노추계곡을 거쳐 아우라지 정선까지 이어진다는 가.. 길섶의 노란 달맞이꽃 한 송이가 추석 보름을 기다리며 피었다.
9월 24일_일_09:00
닭목재의 긴 휴식 후 고루포기로 향하는 긴 오름은 목장으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시작된다. 길가운데와 양 켠에 무성한 풀포기로 보아 차량 통행은 거의 없어 보이고 목장 개발도 원할치 않은 느낌이다. 30분 남짓 도로를 따라 오르다 목장 정문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오르니 목장 쪽으로 경사진 언덕길이 훗날 폭우에 산사태를 일으키기에 딱 알맞다. 이미 초지 조성을 위해 수목이 없어진 농장 언덕들이 허연 물길로 갈라져 속살 터진 바닥을 드러낸 채 방치되고 있다. 그 개발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멀리 숲 속에서 보이지도 않는 트랙타 굉음이 들려오니 그런가 보다 할 정도다.
목장 경계를 따라 급경사 된비알을 20여분 힘겹게 땀 흘린 후에야 능선길에 다다른다.(955봉, 09:48) 오른쪽 서득봉을 바라보며 목장 뒷문을 지나, 유난히 벼락 맞은듯한 고사목이 많은 능선 길을 올라서니 고루포기 정상이 멀리 보이는 왕산 제1쉼터에 다다른다. 양말을 갈아 신고 지난 구간의 발목 부상 후유증이 염려되어 미리 연고를 듬뿍 발라둔다.(10:10) 스테인리스 철제 긴 의자를 새롭게 만들어 산행객의 편의를 마련해 준 당국에 고맙다. 아쉬운 것은 가장자리를 다듬지 않아 모서리가 매우 날카롭고 부상의 위험이 있으니 걱정이 된다. 발주한 당국자의 검사 불충분, 제작자의 무성의.. 안타깝다.
가파르지 않은 2km의 긴 오름으로 1031봉을 지나 제2쉼터에서 마지막 숨 고르기를 마친 후 (10:45) 된비알 고루포기 정상을 향해 모처럼 땀을 쏟는다. 정상 직전 임도를 지나 철탑 조망대에 올라서니 대관령 넘어 선자령이 넘실댄다.(11:15) 다시금 임도처럼 잘 넓혀진 평지길을 밟아 고루포기 정상(1238)에 다다른 후 방울포도로 목을 축인다.所隱栢(伊)山(곧은 백이산, 골포기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선자령(선자산-소은잣산-所隱城山)과 더불어 異說이 많다.(11:20)
정상 부근의 제3쉼터를 지나 북쪽으로 잠시 완만한 내림길을 밟아가니 왼쪽 오목골 3거리 조망처에 다다라 휴식을 취하고 있는 선두 대장팀과 합류한다.(11:40) 10여분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보충하고 마지막 능경봉을 쳐다보니 그리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이미 8시간이 지났다. 이럴 땐 이슬이 한잔이 그립다. 왼쪽 횡계마을에 아파트들이 꽤 많이 지어졌다. 2년 전 산케들과 오대산 비로봉을 오른 후 용평에서의 하룻밤과 도암댐 부근의 멋진 회식이 생각나고 갑자기 배가 고프다.
긴 구간 말미에 걸음이 만만치 않을 것에 대비하여 선두에 앞서서 오른쪽 횡계치 내림길을 서두른다. 꽤 가파른 내림길을 40여분 밟아 횡계치(왕산골 갈림길)에 내려서니 터널을 지나는 고속도로 차량 소음이 꽤 소란스럽다.(12:32) 건설 기술직 외길을 걸어 안정된 삶을 즐기는 건강한 걸음의 벗이 함께하는 대간 길은 외롭지 않다. 마지막 능경봉 오름길이 두세 번 큰 봉우리를 뒤에 감춘 채 애를 먹인다. 산죽길과 번갈아 만나는 너덜길에서 오른쪽 발목에 약간의 통증이 시작되지만 길섶에 지천으로 널린 보랏빛 투구꽃의 마지막 생기를 느끼며 기를 쏟아 본다.
857봉을 지나 오른쪽으로 954봉에 또 한 번 속아 넘고 철쭉 숲과 너덜길을 밟은 후 돌탑을 지나 능경봉(1123)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1시간 동안 긴 오름에 거의 마지막 진을 쏟아낸다. 왠지 입속에서 감도는 능.. 능.. 구절이 힘든 어감으로 박혀 올 지경이다. 이미 10시간이 훨씬 넘었다. 대간길 구간 끝자락에 이런 된오름을 맛보면 지친 다리들이 참 고생이 많다. 차라리 아직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결 편할 것 같다. 점점 느려지는 걸음으로 정상 직전 돌탑에 다다라 숨을 고른 후 대관령이 발아래에 보이는 능경봉(凌頂山, 所于音山) 정상석을 반갑게 껴안는다.(13:34)
영동 고속도로가 완성되기 전, 강릉에서 대관령까지의 고불거리는 대굴길을 초보운전으로 맵시나 뒷자리에 너댓 살짜리 두 아들을 태우고는 부지런히도 넘나들던 시절이 엊그제처럼 느껴진다. 그때의 대관령 목장터는 정말 낭만적이었는데.. 지금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횡계촌 목초지는 전쟁터다. 아무런 계획도 없는 듯.. 사유지든 공유지든 삼림지역을 목초지로 개발하면서 수해 방지림 설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걸 문외한인 내가 봐도 알만하다. 아무리 폭우가 쏟아졌다 하더라도 대간길에서 불과 1km도 안 되는 계류 시발점 동네가 홍수 피해를 맛볼 정도이니 이 땅의 하늘땅이 물에 잠기도록 난개발을 묵인하는 행정관료들에게 묻고 싶다. 정녕 모르는 바보들인지 모른 체 하는 세금 도둑인지..
1963년 겨울이 시작될 즈음 이 땅의 역사는 커다란 획을 그어가고 있었다. K노인의 눈에 비치는 이 땅의 정치적 변혁은 엉뚱하게도 지도자의 뜻과는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소위 민주주의의 거대한 국민적 저항을 맛본 1960년 4.19 혁명 이후로 대중 민주주의의 교묘한 흐름을 타고 대통령으로서의 박정희는 지도력에 있어 그 정책에 한정되고, 아이러니하게도 반대 정적들의 공격을 받은 공산당 가입전력이 그로 하여금 더욱더 세찬 반공주의의 우물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으니 오늘날 좌파들은 그를 인간적인 면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정치가에게 필요한 사상적 한계와 목표는 어느 정도의 일관성이 필요한 것인가..
대통령 취임식을 사흘 앞두고 그의 돌아가신 형님의 절친한 친구이며, 고향 선배로서 남한의 최고 실권자를 찾아온 북의 밀사를 간첩죄로 사형을 집행한 날 밤, K노인은 해방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박대통령과 만나 쓸쓸한 기분의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몇몇 공화당 창당 준비에 애쓴 대구사범출신의 동료들과 함께.. 그것이 결국 당내 정치세력들의 시샘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 밖이었다.
인간적인 고뇌를 털어버리려는 고통 속에서 참석자들은 함께 정치마당의 사슬들을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젊은 시절 식민지 학생시절의 한탄들이 뒤섞이며 술기운에 쏟아져 나오는 발언들은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었다. 과연 민족은 무엇이며 이 땅의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보장해 줄 세력은 누구일까.. 강한 군사력의 북한은 스스로의 결정으로 다시금 남침을 강행할 수 있을 것이며, 미국은 언제까지 이 땅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진정한 우방으로 남을 것인가..
1964년 이른 봄, K노인은 공화당 사무국 간부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며 각종 정치 현안들을 챙기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픈 기억을 딛고 잘 자란 큰 딸은 간호대학에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작은 아들놈은 영리하게도 공부를 잘하여 일류 중학에 입학하겠다며 제법 큰 소리를 치며 퇴근길의 늦은 귀가에도 웃음을 선사하는 복덩이로 안겨왔다. 단지 나날이 쇠약해 가며 약으로 지탱하고 있는 아내의 건강이 유일한 걱정거리로 느껴졌다.
이제 40을 훌쩍 넘어 어느새 정치판에서 선배 대접을 받을 만큼 지나 온 굴곡들이 아픔을 잊게 하고 어느 면에서는 인생의 흐름이 마지막 편안한 강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무관심의 껍질에서 깨어나고, 유림 선생의 철학을 이어받아 진정한 이 땅의 자유를 위해 변혁의 마당으로 나아갈 자신감을 가지는 일이었다. 그동안의 작은 바램들도 세월이 가져다준 보람으로 그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한껏 이용하며 충분히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리고 꽃피는 봄을 맞이하면 아내와 함께 새로 마련한 세검정 옆 새집으로 이사를 준비하며, 그동안 아내가 힘들게 유지하던 가게도 문을 닫았다.
9월 24일_일_14:00
능경봉에서 20여분의 급한 내림 길을 밟아 샘터가 있는 임도에 내려선다. 오른쪽 제왕봉-오봉산 오름길로 이어지는 임도에는 잘 정비된 샘터가 길 양편으로 마련되어 있고 대관령에서 산책 걸음으로 나온 관광객이 드나든다. 임도 왼쪽으로 난 능선을 넘어서니 대관령 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거대한 위용으로 서쪽을 향해 솟아 있다. 어려운 공사 여건 속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으리라..
넓은 대관령 구도로 광장에 3개의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바람개비 날개를 멈춘 채 서있고 쓸쓸하지 않은 건축물을 거느리며 에너지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으나 정작 찾는 객은 드물다. 관광지로 개발을 위한 몸부림이 엿보이는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부디 이 땅의 중심 등허리에 어울리는 개발로 이어지고 불필요한 난개발로 발아래 동네가 수해 보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일어나지 말아야지..
다음 주 새벽을 밟아 오를 선자령 들머리를 살핀 후 피곤한 걸음을 버스에 앉혀 보지만 하산주를 구경만 한 탓인지 눈은 말똥하고 잠이 오질 않는다. 가을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다.
2006.9.25 배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