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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36회 마지막구간 종주(미시령-진부령)

06년 11월 25 - 26일

11/25     22:00   신도림 출발 

11/26     03:10   미시령(826) 출발

             03:55  샘터 

             04:40  상봉(1239)

             05:55  화암재            

             06:10   신선봉(1204)                             3.45km

             07:00   헬기장 (식사-1시간 휴식, 사진촬영)

             08:00   출발

             08:20   대간령                                     2.85km

             08:50   제1암봉

             09:25   병풍바위(1058)

             10:25   마산봉 (1052)                               3.55km

             11:15   알프스스키장

             11:50   진부령(529)                              5.75km 

                               8시간 40분               15.6km

개근.. 참 좋은 기분인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11월 25일_토_22:00 

 15개월.. 길다면 긴 시간이 벌써 내 눈앞에 다가와 오늘 진부령으로 떠나는 가슴이 설렌다. 지난해 여름이 끝나는 날.. 속초 영금정 바닷가 정자에 기대어 밀려오는 파도와 약속했었다. 이 땅의 한 많은 영혼들을 만나고, 내가 딛고 사는 내 땅을 사랑하는 맘으로 더 늙기 전에 내 두 다리의 힘으로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걸어보리라고.. 물푸레의 긍정적인 협조를 약속받고도 사실 그 결과가 어떠할지는 잘 모른 채 어쩌면 어떤 핑계로 끝을 보리라.. 그래도 후회는 없으리라.. 하면서 시작한 대간 길이다. 

 오늘 단 한 번이라도 함께 걷겠다고 입대 전부터 벼르던 작은 아들 배소위가 마지막 구간을 함께 하기 위하여 훈련 중임에도 상관의 특별 허락을 받아 하루 외박을 미시령 밤길 걷기로 대체하니, 고맙기도 하지만 늘 피곤한 얼굴로 주말 하루를 또 힘든 걸음으로 발품을 파는 것이 안쓰럽다. 그래.. 항상 적극적이고 올바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그 모습 그대로 부디 이 땅의 동량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입대하기 전 생일을 앞두고 황악산 바람재로 향하는 내게 "왠지 아버지는 개근할 것 같다.."며 격려하던 그 한 마디가 괘방령 눈길에서 뒹굴던 나를 일으켜 세웠나 보다.. 

 진부령에 내려서자마자 곧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 배소위의 짐과 해단식 준비를 위한 내 짐이 챙길 것이 많아 물푸레는 일요일 새벽에 직접 진부령으로 홀로 드라이버를 해야 한다. 36번의 대간길에 출퇴근을 개근한 물푸레가 결국 마지막 퇴근길을 챙기려고 진부령까지 와준다니 정말 고맙다. 피곤한 발길을 한잔 이슬이로 달래는 내 구간마다의 짜릿한 즐거움을 위하여 단 한 번의 빠짐도 없이 늦은 밤을 기다려 준 내 사랑하는 물푸레에게 오늘 개근상을 바친다. 앞으로 더 이어질 정맥길에서도 염치없는 부탁을.. 부디 먼저 걸으며 확인한 이 아름다운 길을 내가 반대로 기다리며 걱정하고 반겨줄 기회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신도림 출발지에 축하객의 웃음소리가 퍼지고 꽃다발과 막걸리를 선물 받으니 감회가 새롭다. 

 홍천을 거쳐 미시령 옛길로 올라서니 길섶에 쌓인 눈이 꽤 많으나 다행히 통제는 해제되어 화암사에서 어려운 우회를 시도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하늘이 늘 우리를 도운다고 믿어 왔으니 오늘도 그러하리라. 미시령 휴게소는 터널이 개통되기 이전의 분주함도 사라지고 폐가처럼 조용히 잠든 채 주차광장엔 제설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얼어붙은 눈밭을 이루며 황량하다. 다행히 악명 높은 바람마저 잠이 들어 기대 이상의 좋은 날씨에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국립공원의 입산 통제 요원마저 이 눈 속에 설마 하고 철수한 모양이다. 그래 그들은 어차피 위험구간 사고 시 면피용으로 "가다가 죽어도 난 몰라"하는 수준의 입산금지로 항상 일관하겠지..(03:00) 

상봉에서 속초의 밤을 지켜본다.. 30여 년의 인연이다.

11월 26일_일_03:10 

 휴게소 마당에서 여유롭게 준비체조를 마치고 주유소 왼쪽 높은 시멘트 언덕 철조망을 한껏 다리 벌림으로 어렵게 올라서려니 축하 산행객들을 포함하여 많은 인원이 시간을 지체한다. 들머리 초입부터 많지는 않지만 쌓인 눈과 비탈을 이루는 된 오름에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걱정했던 강풍도 사라지고 오른쪽 속초시내의 야경이 오늘 우리들의 졸업식을 축하하는 불빛을 유난히 밝힌다. 마치 밤을 새운 듯 전혀 사그라들지 않는 불빛이 내 조금은 흥분되는 걸음만큼이나 반짝거리며, 진부령을 향하는 내 가슴을 밝히며 따라 오른다. 

 수십 년 동안 속초 어느 곳에서나 보이던 미시령 북릉길... 어느 얼굴 크고 코가 큰 신사가 반듯이 누운 채 하늘을 향하던 그 능선길을 결국 이렇게 흰 눈 고이 덮고 잠자는 밤에 더듬어 오르는구나.. 자갈길을 지나고 안테나를 지나니 이제 바지자락에 올라선 걸까.. 20여분의 미끄러운 된오름으로 워밍업 하고 나니 잠시 숨을 돌리는 안부에 올라선다. 헬기장에 올라선 모양이다. 아직은 크게 미끄럽진 않으나 아무래도 고도를 높일수록 적설량이 많아지니 오늘 시간에 좇기는 일정이 1시간 정도는 차질이 생기리라.. 아이젠을 꺼내 착용한다. 

 눈길 산행에 익숙지 못한 배소위가 오늘 무사히 진부령에 닿아야 할 텐데.. 현역 복무 중인 가운데 자칫 사고라도 당하면 일이 커지는데.. 지난 1월 새해 첫날 삼도봉 새벽 눈길에서 어려운 동행을 견뎌낸 물푸레.. 지난가을 선자령 오대산에 동행한 예비역 배병장.. 끝내 한번 동행의 약속을 지키려는 배소위.. 나는 참으로 고마운 가족들의 성원 속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부디 건강한 삶으로 각자의 인생을 보람 있게 이어갈 수 있기를..  

 한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북릉 신사의 콧잔등 부근에 이르니 작은 샘물이 흰 눈 속에서 반긴다.(03:55) 오늘 미시령 옛길이 통제되면 1차로 화암사에서 선인재를 넘어 오르려던 목적지다. 차례를 기다려 물 한 모금 들이키니 가슴이 맑아진다. 서둘러 오른쪽 능선을 돌아 상봉을 향해 된오름을 이어간다. 이제 신사의 긴 이마를 지나면 마지막 잘 빗어 넘긴 머리칼에서 힘이 들게고 상봉에 다다르겠지.. 가빠지는 숨길만큼이나 발걸음도 가파르구나.. 너덜지대를 통과한다.. 지난달 말에 미시령 남릉을 올라 황철봉을 넘던 너덜을 떠올리니 소름이 다가온다. 칠흑의 밤에 긴 너덜 바위를 디뎌 오르고 내릴 때의 아찔함이란.. 눈 쌓인 너덜을 조심스레 밟으며 왼쪽능선길을 감아 오르니 작은 돌탑 예쁜 상봉에 올라 속초 시내의 화려한 불빛을 조망한다.(04:40)

신선봉의 새벽.. 서기 어린 봉우리는 늘 깨어있는데..

상봉에서 이어지는 내림길이 눈 속에서 로프도 없이 발디딤을 찾지 못한 채 긴 행렬이 지체한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망정이지.. 눈 속에 바람이라도 분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배낭에서 30m 구호용 로프를 꺼내 후미 동료에게 확보를 요청하고 한 명씩 차례로 슬랩을 미끄러진다. 이어지는 긴 크랙의 하강 암릉에서 뒤따르는 배소위는 역시 장교답게 그런대로 로프에 잘 적응해 내려온다. 그러나, 아이젠에 걸리는 암릉 크랙이 자칫 몸을 곤두박질치게 하니 매우 조심스럽다. 스틱을 접고 본격적으로 급경사 내림길에서 네 번의 미끄러운 로프 타기를 끝내고 나니 화암사가 잠이 든 천진천 신평리가 보이는 화암재에 내려선다. (05:55) 짧은 구간에 1시간이 넘게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무사히 안착했음에 안도한다. 지난봄 빗속에서 내려 밟던 대야산 암릉 하산길이 생각나고 밤티재에서의 아찔했던 암릉 건너뛰기가 떠오른다. 

 화암재는 비상시 2차 진입로로 생각했던 곳이다. 지금은 리조트들과 골프장등 많은 시설물이 들어섰지만, 30년 전 울산바위가 보이는 신평리 학사평 구릉지 일대는 젊은 영혼들의 전쟁에 대비한 넓은 연습장이었다. 추운 겨울날 진지 속에서 라면 한 그릇의 즐거움으로 종일을 공격과 수비의 오르 내림을 반복하는 훈련이란 참으로 견뎌내기 힘든 행진이었다. 젊음의 모든 행동과 몸놀림에는 보람과 의미를 간직해야 할 터인데.. 인류가 빚은 최악의 이데올로기를 등진 정치권력들이 만들어낸 전쟁의 후유증 속에서, 그렇게 조국의 땅을 지키기 위해 20대 초반의 안타까운 젊음들이 통일화란 이름의 작업화 속에서 얼어가는 발가락을 고통스레 비비고 있었다. 

 화암재에서 10여분 짧은 오름으로 신선봉 갈림길 공터에 다다라 선두조와 조우하고 잠시 숨을 돌린다. (06:10) 어둠 속의 신선봉은 한낮의 화려한 조망을 감춘 채 잠들어 있다. 이름하여 금강산 신선봉이라 했던가.. 그냥 잠시 어둠 속의 암봉을 쳐다본 후 대간령 편한 내림길을 왼쪽으로 돌아 내린다. 깊은 눈길이 잘 러셀 되어 참 편한 걸음을 이루나 보폭이 높아지며 아무래도 예상시간은 길어진다. 작년 크리스마스 전날 영취산-육십령 구간에서 논개사당에서 부터 버스 진입로가 막힌 채 무령고개를 거쳐 영취산까지 눈길을 밟아 오르던 폭설이 떠오른다. 짧은 구간 종주 후 전주에서의 파티 계획을 무산시켰던 러셀 행군.. 참 힘들고 벅찼던 육십령 샘터 내림길에서 눈 속에 드러누웠던 포근함이 떠오른다.   

대간길 마지막 바닥 식사를 끝내고..

대간령이 보이는 헬기장 공터에 다다라 밝아오는 새벽을 느끼며 신선봉을 돌아본다. 대간길의 마지막 만찬 아닌 조찬을 펼치며 회한의 웃음들을 터뜨린다.(07:00) 오가는 정상주가 감미롭다. 대간 첫날, 벽소령 휴게소에 다다라 서로 수줍게 나누던 떡 한 조각의 우정들이 오늘 이렇게 진한 동지애로 끝까지 배낭에 담겨져 먼 길을 함께 왔구나.. 많은 축하 산행객들과 긴 휴식의 1시간을 보내며 지나 온 여정들을 조금씩 쏟아 내 가며 웃음을 날린다.. 왠지 허허로움이 섞여든다. 장수 덕유의 추운 아침에 암봉 작은 기슭에 등 기댄 채 나누던 아침식사와 건네주는 커피 한 잔의 정겨움들.. 이제 무엇을 간직한 채 저 마산봉을 내려가 진부령에 닿을 것인가.. 과연 내가 밟아 온 이 길은 이 땅의 영혼들에게 평온한 안식처를 제공하며, 영원토록 내 조국의 이름으로 길이 만세할 것인가.. 

 아침식사와 긴 휴식을 마치고 신선봉을 배경으로 마지막 추억의 사진을 담는다. 자유인 8기의 이름으로 함께 도우며 험하고 먼 밤낮을 도모해 왔다. 다행히 아무런 사고 없이 천혜의 도움을 느끼며 우리들은 온갖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출행을 감행해 왔고 경이롭게도 무사히 마루금을 밟아 왔다. 태풍 속에서 태백의 종일 장대비를 견뎌 내고 우중에도 장군단 천제에게 영혼의 보살핌을 빌었다. 오늘 이리도 포근한 눈길 융단으로 우리들의 마지막 졸업을 축하해 줌이 큰 힘으로 다가온다. 언젠가 금강산 넘어 백두산에 이를 때까지 부디 이 땅의 주인으로 함께 하는 보살핌 있을진저.. 

 대간령 짧은 내림길을 20여분 밟아 내리니 서쪽 장암계곡으로 이어지는 대간령 갈림길(샛령, 큰 사이고갯길)에 다다른다.(08:20) 잠시 휴식을 취하며 후미를 기다린 후 마산봉 오름 길의 된오름을 시작한다. 대간 길 후반부 소백산 넘어 선달산 지날 때부터 시작된 동료의 고통이 박달령에서 탈출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와 마지막 대간길의 축제에 동참하고자 의지로 나선 동지를 더욱더 힘들게 하는 모양이다. 이곳 대간령에서 탈출을 고려하는 대장의 염려에 웬만하면 마지막 진부령의 감격을 위하여 함께 가 보자는 고집을 부려 본다. 부디 후미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진부령에 닿아서 지난 어려움들과 고통들을 보상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운무에 휩싸인 눈길이 포근하구나..

대간령에서 된오름으로 오른 암봉에서 시원하게 펼쳐지는 속초 바닷가와 내설악의 산마루 파도를 조망한 후 다시금 제2암봉으로 향하는 길에서 짙은 운무로 스크린을 닫아가는 자연의 조화를 맛본다. 이제 마지막 걸음에서 북녘을 조망하며 새로운 설움으로 북 받쳐 오를 내 기분을 알아챈 것일까.. 점점 짙어지는 운무가 제법 뺨을 적시도록 차갑게 젖어 온다. 사위는 어두울 지경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심술궂은 바람도, 몸을 떨게 하는 추위도 없다. 축복받은 걸음이다. 


알몸으로 사막에 홀로 선 느낌의 K노인을 작별한 지도 1년 세월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여러 경로로 그의 근황을 수소문했으나 그리 쉽질 않았다. 이제 그의 짧은 만남이 가져다준 선배로서의 이 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되새겨 보려 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오늘날 해야 될 일들을 정리하며, 그가 내게 들려준 20세기 초반의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초 속에서 뭘 전하려 했을까 깊이 생각해 본다.
그는 인간에 대한 일반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새로운 이념도 아닌 휴머니즘의 복구를 열망할 뿐이었다.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와 공산주의적 집단주의의 화해와 조화를 통해 사회적으로 비폭력적인 공존을 위한 힘겨운 발걸음을 걷고 있었다. 결코 국가라는 기계적인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을 수 있는 참된 민주주의를 원했으며, 경제적인 이윤만을 추구하는 물질 지향적 세계에서 인격적인 삶을 살아보려 했던 극히 평범한 중간자로서 매우 회색의 삶을 살았다.
이제 이 아픈 땅의 주인인 우리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하며 전쟁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꽁꽁 얼어붙은 하늘 아래의 금강산 향로봉을 마주하며, 옹이 져 가슴에 못 박힌 K노인의 전쟁에 대한 모진 상흔들을 위로할 우리의 할 일을 생각한다. 부당한 부를 나누는 사회개혁과 비폭력적인 무장해제를 동시에 이루어야 할 것이다. 평화의 수단으로 평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너덜길을 조심조심 밟아 오르며..

11월 26일_일_08:50 

 두 곳의 암봉을 지난 후 꽤 긴 너덜 오름을 거친다. 선답자의 발자욱을 조심스레 밟으며 병풍바위된 오름을 준비한다. 점점 힘이 들기 시작하며 이제 마지막 안간힘을 쏟는다. 대간 초기 남덕유의 삿갓골재 대피소에 서무룡산을 쳐다보며 고통의 무릎에 문지르던 파스 냄새가 스쳐간다. 탈출의 유혹 속에서 허정거리며 아득한 무룡산 계단길을 지쳐 오르던 고집은, 과연 어떤 힘이 있어 나를 이토록 긴 여정의 끝까지 몰고 온 것일까.. 동엽령에서 용추계곡으로의 아름다운 가을 하산길에서 정상이 어디냐고 묻던 젊은 부부의 천진한 물음에 "대간길에 정상은 없다"라고 설명할 힘도 없었다. 흐르는 계곡물에 정강이를 담그며 저물어 가는 해를 원망하기만 했었다. 

 30여분의 된 오름으로 병풍바위 정상(1058)에 올라섰으나(09:25) 운무에 휩싸인 사위를 조망할 겨를도 없이 마산봉을 향한 걸음을 위해 다시 뒤돌아 내려온다. 선두는 이미 마산봉 된오름에 붙었다는 무전이다. 배소위의 무릎에 약간 무리가 오는 모양이다. 스틱을 잘 써보지 못한 채 오름길에서 무리를 한 탓인가 아무튼 이제 오름길도 한 시간이 채 남질 않았으니 큰 걱정은 되질 않는다. 고장 난 한 개의 스틱을 배낭에 접어 넣고 한 개의 스틱으로 오르내림을 교대하며 마지막 무리가 오질 않도록 조심스레 걸어간다. 

 안개처럼 짙어진 운무 속을 천천히 걸으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길섶에 망측스레 뒤틀린 채 줄을 선 참나무 큰 줄기들이 측은하게 다가오며 민족의 왜곡된 역사를 느끼게 한다. 옹이 져 가슴에 못 박힌 K노인의 전쟁에 대한 모진 상흔들처럼 뒤틀린 가지들 마다 커다란 설움 맺힘을 한 덩어리씩 달고 있구나..

저 깊은 운무를 벗어나면 해를 머금은 바다를 만날 수 있으려나..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자유의 길이 열리기를.. 

배소위의 뒷모습이 청순하다.. 무슨 깨우침을..

 11월 26일_일_10:20 

 알프스 스키장 갈림길 정상까지 30여분 숨 가쁜 된 오름을 마지막으로 오른쪽 마산봉에 올라선다. 짙은 하늘 아래 향로봉은 자취를 감추었다. 왠지 눈물이 맺혀 괜시리 햇빛도 없는 날에 선글래스를 낀다.

 이제 가을 추수하듯 이 내림길을 밟으며 15개월의 생각들을 거두어야 한다. 부질없는 상념 속에서 지나온 가을, 겨울, 봄, 여름, 그리고 또 가을을 보내고 흰 눈 밟으며 여기에 섰다. 내가 택했던 내 자유의 길.. 이제 잠시 접어야 할 이 마지막 구간의 내림길을 바라보며 회한의 눈물이 흐른다. 내가 찾고자 했던 그 영혼의 자유는 아직도 잠들어 있는가.. 밤을 새워 만나고자 했던 슬프고도 아픈 이 땅의 원혼들에게 이제 잠시 이별을 고해야 할 것이다. 

 마산봉에서 다시 되돌아 나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20여분의 가파른 내림길을 밟은 후 알프스 스키장 위의 능선에 내려선다. 대간 표지판에 낙서를 읽다가 매직을 꺼내어 내 이름 한 자 자유인과 함께 남겨 본다. 얼마지 않아 지워질 이름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이 마루금에 머물고 싶은 것일까.. 배소위와 단 둘이 걷는 편한 내림길 능선이 한동안 계속되고 알프스 스키장 리프트가 보이는 급경사길을 다시 한번 내달으니 리조트 뒤편 리프트에 다다른다.(11:00) 대간길 복구를 위한 기념식을 했다는 소식에 기대를 했으나, 역시 기념식이 화려하면 뒤끝은 흐지부지하기 마련이겠지.. 애초에 행정적인 커다란 뒷받침 속에서 대간 마루금을 깎아 만든 스키장 뜀뛰기 슬로프는  부도의 소문 속에 개장도 못한 채 긴 잡초에 묻힌 자연설만 안타깝다. 

 리조트 내부도로를 건너고 논길을 돌아 군부대 정문을 지난다. 현역인 배소위는 뭔가 기분이 묘한 모양이다. 아직은 피로한 기색을 보이진 않지만 이제 진부령에 닿으면 만신이 피로하리라.. 잘 버티며 약속을 지켜 낸 그 착한 젊음에 감사한다. 부디 늘 건강하고 이 땅의 이웃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더 큰 역량을 키워나가길.. 온 세상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집 지어 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모든 봉사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힘닿는 한 도와주리라..  

마산봉-대간길 마지막 봉우리, 차라리 보이지 않음이 속 편한 금강산을 향하며..

 흘리 마을의 펜션들을 지나며 지난 걸음을 되돌리는 발길이 포장도로를 터벅거리니 별로 기분이 나질 않는다. 그동안 숱한 마을 길도 지나고 지리산 아래 가재마을의 마루금 지방도도 걸어 보았지만 오늘은 왠지 좀 더 숲길을 걷고 싶다. 긴 시간을 밟아 진부령 표지석이 보이는 곰상 앞에서 닻을 내린다.(11:50)

 물푸레가 새벽을 몰아 온 애마도 보인다. 다음 구간의 향로봉 들머리엔 군부대 정문 표지가 서있다. 부디 잘 가꾸고 지키고 있으라.. 내 훗날 금강산 가는 길엔 꼭 그곳을 들머리로 삼아야 할지니.. 

 쇠붙이로 갈라진 허리의 표지석인 향로봉 전적비 뒤에서 잠시 숨은 채 멈추지 않는 회한의 눈물 한번 더 쏟고 나니 대원들의 기쁜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얼싸안는 손길마다 말문을 잇지 못하는 감격을 맛본다. 서서히 하늘이 어두워지며 곧 진눈깨비라도 내릴 듯.. 졸업의 아쉬움을 슬퍼하는 하늘이 잔뜩 얼굴을 찌푸리는 구나.. 속리산 문장대를 지나 천왕봉까지의 심술궂은 안개와 비재 내림길의 발목 부상이 떠 오른다. 아직도 부은 채 끝을 보는 모진 상흔의 신발을 갈아 신으며 한 동안 허전해할 내 등산화에 입맞춤하고 싶다. 참 먼 길에 너도 고생했구나.. 

 궂은 날씨와 귀대 시간에 좇기는 배소위를 생각하여 산제를 서두른다. 봉황산 아래 비재에서 속리산 입산제를 지낸 후 태백산의 우중 산신제.. 덕항산 아래 댓재에서의 추모산제.. 우리는 이 땅을 지키는 영령들에게 늘 그렇게 감사하며 순응의 길을 밟아 왔다. 오늘 이 감사의 제에서는 왜 이리도 슬픈 것일까..

 가야 할 길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반 동강이의 대간길이 결국 기쁜 축제의 시간만은 될 수가 없구나.. 


 "人類가 戰爭을 종식시키지 않으면, 戰爭이 人類를 종식시킬 것이다." -케네디- 

진부령에 다 달아 결국 울컥하니..


11월 26일_일_13:00 

 진부령을 떠나는 길에 보슬비가 내린다. 

陳富嶺留別詩  
              -澤堂 李 植- 

西行正値北風時 
雪嶺參정鳥道危 
自是人情傷습別
君來饑我錢畓詩


함께 해준 친구야.. 고맙고 고생했다..

                                        

 2006.11.27 배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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