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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Dec 25. 2023

나눠주는 즐거움

MP-300을 추억하며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진을 촬영하면 인화된 결과물이 즉석에서 출력된다. 출력 직후에는 하얀 인화지일 뿐이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촬영했던 형상이 서서히 드러난다. 폴라로이드 사진은 셔터를 눌러 촬영한 유일한 원본이자 결과물이다. 이 독특한 매력으로 인해, 요즘도 후지나 코닥에서는 즉석 인화 카메라를 판매하고 있다.


15년 전쯤 신선한 아이템이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후지필름에서 나온 MP-300이라는 사진 인화기였다.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와 무게를 가진 이 녀석은 디지털 카메라와 연결하여 폴라로이드 인화지로 출력을 해주는 기기였다. MP-3000은 단 한 장의 원본만 출력할 수 있던 폴라로이드의 단점을 보완함과 동시에, 현장에서 물리적 인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제품이었다. 폴라로이드 인화지의 독특한 인화방식으로 별도 잉크 충전도 필요없었고, 주기적으로 배터리만 갈아주면 되는 정도였다. (물론 인화지가 아주 저렴한 편은 아니었다)


MP-300


하지만 무엇보다 MP-300이 가졌던 매력은 '감성'이었다. 디지털 사진에 묘한 옐로우와 레드 감성을 입혀 인화된 결과물은 LCD 화면이나 PC 모니터로 보는 것과는 다른 따스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보면 안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겠다.


MP-300 셀프사진 출력 결과물


그런데 조금만 생각하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15년 전에도 메모리 카드만 맡기면 인화를 해주는 업체는 많았다. 출력 사이즈도 조정이 가능했다. 요즘 휴대폰 화면 크기의 절반도 안되는 사진을 뽑기 위해 굳이 돈을 들여 단말기와 필름까지 구매할 필요가 있었을까?


핵심은 MP-300이 나를 위한 기기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 이 기기는 출사에 따라나온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MP-300이 썸을 타는 여성의 마음을 잡기 위해 (즉, '작업용')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시 사진찍는 사람들의 공공연한 이야기거리였다. 촬영한 사진을 즉석에서 인화하여 건네준 후 돌아오는 반응, 즉 "어머, 잘 나왔다. 저 주시는거에요?" 라는 말 앞에 찍사(?)의 마음은 녹는 것이다. 특히 앞서 말했듯 MP-300은 인화 과정에서 독특한 감성의 자체보정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인물사진의 영역에서는 확실한 강점을 가진다. 나도 몇 년 동안 그 기기를 들고 다니며 수백 장의 결과물을 뽑아내었지만, 정작 결과물들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MP-300은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제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오래전 단종되었고, 인화지 생산도 중단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지만 MP-300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사진의 매력을 선사해주었던 제품이었다.




사진을 취미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부담스럽다. 시커멓고 커다란 DSLR을 목에 건 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만든다. 뷰파인더에 눈을 대는 순간 사람들은 혹여나 자신이 찍힐까봐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찍는 사람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도 그렇다. 친한 사람일지라도 어쩌다 한 번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을 찍은 경우, 진짜 '찍혀서' 다음부터는 어떤 인물사진 촬영도 거부당하기 일쑤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남대문에서 새 렌즈를 사고 너무 기분이 좋아 시청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역내를 이리저리 찍어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아직 지하철 역에 스크린도어 설치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건너편 플랫폼에 서 있던 여성분이 계단으로 올라가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쪽 계단으로 내려와 "저 찍으신거죠? 당장 지워주세요"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당신을 찍은 적이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LCD를 보여줘도 어딘가 숨기고 있는게 분명하다며 경찰까지 부르겠다고 화를 내서 그분은 한동안 곤혹을 치르셨다. 카메라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사건들을 겪은 분들이 심심찮게 있을 것이다. 초상권이 이슈화된 최근에는 더더욱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기도 하다. 아무튼 유서프 카쉬와 같은 유명하고도 공인된 사진가가 아닌 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일은 그 자체로 상대에게 부담을 주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누군가에게 한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나는 사진이라는 취미 덕에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조금 안타까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 무기(?)이자 강점(?)은 인물사진이다. 안타깝다고 표현한 이유는, 내 실력(?)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이다. 나이가 들수록 인물사진 찍을 기회가 없어지기도 하고, 또 누구를 찍는다고 해서 함부로 어딘가에 올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초상권이 허용된 전문 모델을 섭외해서 촬영하는 활동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매력을 유심히 관찰하고 발견해서 그 표정을 프레임에 잡아주기를 좋아한다. (뭐라도 있는 것처럼 으시댔지만, 어쨌든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허풍이라도 떨어봐야겠다)


나는 MBTI의 "I" 성향으로, 특히 처음 만난 상대와 가까워지는데 몹시 시간이 걸린다. 상대방이 많이 배려해주고 이끌어줘야 붙임성이 간신히 생기는 답답한 스타일이다. 회사 후배들에게도 존댓말을 계속 쓴다. 말을 편하게 하시라고 후배들이 얘기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상대가 그나마 나를 많이 배려해주는 스타일이면 좀 낫지만, 나처럼 내성적인 경우에는 더더욱 어렵다.


그런 나에게 사진은 훌륭한 아이스브레이킹 도구였다. 인물사진쪽으로 오래 고민하며 연습한 결과들은 모두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빛이 났다. 부서 단체 행사때 찍은 사진들을 다음날 메일로 보내주면 업무상 접점이 없는 사람들과도 티타임을 가지며 대화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몇 분들께는 프로필 사진을 촬영해주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한동안은 계절 좋은 날들을 찾아 동아리 후배들을 데리고 캠퍼스에서 열심히 인물사진을 찍어주었다. 교회에서도 자녀들의 사진을 찍어 보내주면 부모들과 관계가 확 가까워짐을 느꼈다.


2017, 수원 어느 공방


인화를 해서 건네주면 오히려 효과가 더 좋았다. 그 재미와 기쁨이 크다 보니, 한때는 사진관에서나 주는 사진 봉투를 별도 구매해서 쟁여놓기도 했다. 주말마다 100~200장에 달하는 사진들을 줄 사람에 따라 봉투해 분류해 넣는것도 당시에는 즐거움이었다. (아직도 꽤 남아 있다)


2018, 수원


그러다보면 사진 촬영 의뢰(?)가 꽤 들어온다. 작은 행사 촬영부터 돌잔치나 결혼식 스냅, 어떤 때는 작은 음악학원을 운영하시는 분으로부터 아이들 연주회 촬영을 부탁받기도 했다. 나는 사진 의뢰에 대한 원칙을 세웠었는데, 그것은 '무보수'였다. (돌잔치에서 딱 한 번 거절 못한 적은 있다. 이거 안 받아주면 나와 관계 끝이라고 하는 바람에...) 중요한 행사일수록 보수를 받으면 나 자신이 부담스러워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돈을 받고 무언가 해주고싶지는 않았던 이유가 더 컸다.

보수를 받지 않음으로 인해 '관계'라는 측면에서 얻은 것들은 더 많았다. 이름만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건네줌으로써 현재까지도 서로 안부를 묻는 관계가 된 경우도 있다.


2011, 창원


요즘은 스마트폰이 알아서 보정을 다 해주기 때문에 결과물이 DSLR이나 미러리스 못지않게 환상적이다. 자세히 보면 화질이 전문 카메라보다 한참 못하다고 하지만, 어차피 대중들이 사진을 감상하는 창은 인스타그램에 맞춰진 스마트폰 프레임이기에 그런 말도 거의 의미가 없다. (누가 굳이 확대를 해서 피부 땀구멍을 보겠는가?) 거리 곳곳에서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찍어주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사진을 선물해주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카카오톡이나 에어드랍 같은 뛰어난 전송 기술로 이제는 누구에게나 잘 나온 사진들을 보내줄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고가의 장비와 지식을 습득한 집단의 전유물이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난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 내가 경험한, 기쁨들이 이제 누리기 힘든 것이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누구나 고화소 스마트폰을 갖고 있는 세상이지만 누구나 사진을 '잘' 찍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디지털 보정과 효과가 대체할 수 없는 사진 본연의 기술 영역이 있다. 그리고 열심히 연습한 것들은 언제고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같은 스마트폰을 쥐어줘도 구도 설정이나 빛을 다루는 실력은 결과물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셀카라는 획일적 구도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적절한 구도와 심도로 담은 사진을 선물해준다면 예나 지금이나 받는 이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지난 봄, 가족들과 함께 두물머리 나들이를 갈 때 큰 결심을 하고 장비를 챙겨갔다. 아이들 짐 챙기랴 두 아이 싸우는거 말리랴 정신이 없었다. 괜히 이 무거운걸 들고왔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 때 누군가 내 등을 쿡쿡 찔렀다. 돌아보니 어떤 할머니셨다.  


"저희들 사진 좀 찍어주시우." 라며 구형 스마트폰을 내미는 걸 보고 주변을 둘러보니 열 분 남짓의 일행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미 대열(?)을 갖추고 계셨다. 그 일행 중 한 분이 할머니께 핀잔을 주었다.


"아유, 그냥 지나가는 사람한테 부탁하면 되지 왜 거기까지 가서 젊은 사람 불편하게 만들어?"  


"아니오. 보니까 이 사람이 잘 찍게 생겼어."


틀림없이 내가 메고 있는 이 무거운 카메라와 렌즈를 보고 나를 선택하신 것이었으리라. 부담백배의 마음을 짊어지고 땀 뻘뻘 흘리며 찍었다. 행여나 눈 감으신 분들 있을까 싶은 마음에 열 컷을 넘게 찍어 건네드렸다. 뭐, 크고 시커먼 카메라는 어떤 사람에게는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신뢰를 주기도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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