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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Feb 12. 2024

선무당이 장구 탓을 한다기보다

아마추어의 즐거움 영역은 조금 다르다



얼마전 나를 거쳐간 카메라 바디와 렌즈들을 기억해서 세어 보았다. 바디는 총 6대, 렌즈는 30종이 넘는다. 아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정말 좋고 매력적인 장비들이 있었지만, 그 중 나에게 잊지못할 희열을 주었던 바디 하나, 렌즈 하나를 꼽아보았다. (과거형으로 썼으니 지금은 내 손에 없는 장비다)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첫 카메라는 중고로 구매했던 캐논 300D였다. 디지털 SLR 유행에 불을 붙인, 보급형의 합리적 가격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바디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보급형이다 보니 내구성이나 성능과 같은 부분들은 어느 정도 감안을 해야 했다.


인터넷 동호회 활동을 하다보면, 사진이라는 예술에 순수한(?) 마음으로 집중하기가 힘들다. 누군가의 잘 나온 사진이 포스팅되었을 때,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작품의 디테일이 아니라 그 사진 파일의 메타정보이다. 어떤 카메라로, 어떤 렌즈로 찍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마치 나에게 그 장비가 주어진다면 동일한 사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나같은 아마추어들은 사진 자체보다 장비 구성에로 관심이 옮겨가게 된다.


1년이 지나니 사진 동호회 게시물에는 '새로 출시된 모델을 질렀다', '드디어 보급기에서 중급기로 갈아탔다' 는 구매 인증 게시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카메라로 촬영해서 업로드한 사진들은 무언가 달라 보였다. (사실 다를 이유는 전혀 없다)


점점 구식 장비가 되어가는 나의 300D의 색상은 매우 독특하게도 실버였다. (블랙도 판매했지만 실버 모델이 훨씬 많았다) 카메라 바디가 블랙 이외에 다른 색으로 출시되는 경우가 지금까지도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300D는 출사지에서 '튀는' 색상을 가진 바디였고, "나 300D 써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장비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신제품이나 급이 높은 카메라를 쓰는 것 같고 나만 이 구형 제품을 쓴다는 열등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내가 사진생활 3년 반만에 꿈에 그리던 바디를 손에 쥐게 되었다. 바로 캐논의 플래그쉽인 1D Mark II 였다. 카메라 제조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신제품을 쏟아내던 분위기 속에 한 철이 지난 중고가 하락의 틈을 노려 (그래도 비쌌다) 과감히 질렀던 것이다. 마치 쓰레기장 같았던 판매자의 BMW 차 안에서 제품 테스트를 하고 현금을 건넸던 수요일 저녁이 아직 기억난다.


캐논 1D Mark II (출처 : 캐논코리아 홈페이지)


1D Mark II는 캐논의 최상위 고급 라인 제품답게 엄청난 성능을 자랑했다. 보급기와 비교가 되지 않는 초점 잡는 시간,  악천후에도 너끈히 견딜 수 있는 내구성, 연사를 눌렀을 때 마치 기계를 돌린 것 같은 빠른 속도.... 크기나 무게 역시 중후한 포스를 보여주며 보급형, 중급형 바디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기자나 프로 사진가에게 적합한 카메라가 나같은 평민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카메라의 별칭은 모델명인 1D Mark II와 어감이 비슷한 '원두막' 이었다. 그날 밤 침대에서 이 바디를 품에 꼭 안고 잤다. 정말 행복했다. 사진 친구들은 내가 원두막을 구매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구경을 하러 왔다. 그리고 이런 플래그십을 갖게 되니, 출사에 나가는 나의 마음도 180도 바뀌게 되었다.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고 "아이고 무거워 죽겠네." 라는, 우는 소리를 빙자한 '자랑'을 수시로 내뱉었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 차르르르륵 하는 정갈한(?) 소리의 연사를 갈겼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멋진 바디였다. 이 때 나는 소위 말하는 '셀프 거울샷'을 정말 많이 찍었다. 이런 명품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 모습도 덩달아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2008, 수원


1D Mark II는 실제로 정말 좋은 바디였다. 앞서 설명했듯 1.2kg이 넘는 무게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언제 어디서건, 마치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기듯 신속한 촬영이 가능했던 것이 큰 장점이었다. 1초당 8.5연사 기능도 순간을 놓치지 않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2008, 북촌 한옥마을

 



그리고 럭셔리(Luxury) 렌즈를 처음으로 갖게 되었을 때의 행복도 잊을 수가 없다. 커다랗고 기다란, 빨간 띠를 두른 백색의 망원 줌렌즈는 전문가들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다. (사진 사이트에서는 사람들이 렌즈마다 별칭을 붙였는데 이런 류의 렌즈는 '백통'이라 불렸다) 어느날 대학교 후배가 내게 이 렌즈를 잠시 맡겼다. 기한은 특정하지 않을테니 사용해보라는 것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이 렌즈를 마운트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첫 결과물을 보고는 머릿속이 혼미해질 정도의 황홀함을 느꼈다. 이래서 백통 백통 하는구나 싶었다. 가질 수는 없지만 기회 있을 때 열심히 사용해보자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3개월 정도 지난 후 그 후배가 내게 다시 연락을 했다. 시세보다 많이 가격을 낮춰드릴테니 사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렌즈의 진가를 알아버린 나는 주저하지 않고 기존의 렌즈 2개를 팔아 이 백통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캐논 EF 70-200mm F2.8L



이 렌즈도 1.3kg의 무게를 자랑한다. 1D Mark II에 마운트했을 때 손에 들려지는 무게는 2.5kg이다. 군대에서 쓰던 K2 소총(3.2kg)보다는 가볍지만 상당한 무게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배낭 속에 여러 다른 장비들도 함께 넣어다녔기에 근교 출사를 다녀와도 온 몸이 녹초가 되곤 했다. 그래도 젊었다. 총 4~5kg 되는 장비들을 짊어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던 시기였다. 힘들었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지금은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이다.


아무튼 이 백통 (백통에도 종류가 있었고, 내가 사용했던 것은 정확히 '엄마 백통'이라 불리웠다) 쓰면 쓸수록 놀라웠다. 그야말로 전천후였다. 인물이면 인물, 풍경이면 풍경, 행사면 행사... 빼놓을 것 없이 훌륭했다. 200mm까지 가능한 망원 화각은 표준 렌즈로 담기 어려운 먼 곳까지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다. 그래서 이 렌즈를 갖고 있을 때는 정말 찍을 것들이 많았다.


2009, 올림픽공원



2008, 서울대공원


1D Mark II에 70-200mm를 마운트하면, 당시 용어로 '뽀대' 측면에서는 어마무시한 급에 속했다. 막강한 바디와 렌즈의 서포트를 받는다 생각하니 출사때마다 든든했다. 이 두 장비는 어느덧 동호회에서도 내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기억해보면 내가 이처럼 깊이 의지하고 사진생활을 했던 장비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2008, 통영




2008, 두물머리





'선 무당이 장구 탓한다' 는 속담이 있다. 실력은 없으면서 도구를 변명거리로 삼는다는 말이다. 사진에 있어서도 이 진리는 적용된다. 사실 좋은 사진들을 건지는 데는 그렇게 요란한 장비들이 필요하지 않다. 보도 기자, 야생 촬영 전문가, 혹은 천체 사진가가 아닌 한, 보급형 카메라와 렌즈로도 얼마든지 수준급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동호회 게시판을 읽다 보면 사진에는 관심이 없고 장비 수집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간있다. 그런 사람들은 신제품이 나오기가 무섭게 카드를 꺼내어 지른다. 사진만 봤을 때는 '글쎄올시다' 라는 느낌이 드는데 아무튼 장비 라인업은 최상급이다. 반면, 저가의 렌즈로도 감탄사를 연발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많다. 비록 보급형이지만 해당 장비의 장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상황에 꺼내어 효용성을 극대화시키는 '고수'들이다. 이런 분들의 작품을 볼 때마다 나름 고가의 장비를 들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보급형부터 나름 플래그십까지 두루두루 써 봤던 나는 어떤 입장에 가까울까? 일단 카메라를 들었다면 사진이라는 본연의 예술성과 가치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들은 노력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지 고가의 장비로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전문가가 아닌 하급 아마추어일 뿐이다. 사진을 생계의 일환으로 삼고 있지 않으며 그저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좇아 담기 원한다. 가끔은 예술성을 표현하려 노력하기도 하지만, 종종 전문 사진가들이 평가절하하는 '엽서 사진'도 거리낌없이 즐긴다. 한때 저명한 예술 사진가의 유튜브를 오래도록 시청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분이 칭찬하는 사진이 왜 좋은지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예술적 감각이 부족해서 그래' 라며 머리를 감싸쥐고 방송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후, 그냥 아마추어에 머물러 있는게 내 정신건강에 더 좋다고 결론지었다.


어쨌든 그런 예쁜 사진들을 조금이라도 더 쉽게 담을 수 있다면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여러 장비들을 써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남들이 강추하는 고가의 장비도 구입해 보기를 추천한다. 그러다 보면 내게 있어 1D Mark II나 70-200mm처럼, 자신과 딱 맞는 장비도 발견하게 된다. 사진을 취미로 한다면 단순한 결과물 뿐 아니라 장비 그 자체가 주는 행복감도 나에게 주는 즐거움의 영역 중 하나이다. 내가 구매한 장비를 사랑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사진 찍을 맛도 날 것이고 더 좋은 결과물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내가 즐겁고 기쁜데 누가 뭐라고 한단 말인가?


2009, 올림픽공원





이후 카메라도, 렌즈들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찌보면 지금 갖고 있는 장비들은 좀 단촐한 편이다. 점점 크고 무거운 것이 부담스러워져서 단렌즈 위주로 렌즈를 구성했다. 바디도 눈물을 머금고 1D Mark II를 처분 후 보급형 풀프레임으로 바꾸었다.


장비를 사고 파는 일은 계속 되었다. (사진을 잘 찍지 않는 지금도 가끔 하나를 팔아버린 후, 써보고 싶은 렌즈를 사보곤 한다) 더 좋은 바디, 더 좋은 렌즈들을 많이 써 보았다. 백통보다 훨씬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장비도 사용해 보았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과거 카메라와 렌즈를 사용하며 겪었던 불편함들도 기술적으로 많은 개선이 되었다. 아마 우리 아이들이 좀 더 크고, 내게 조금 더 자유가 주어진다면 다시 카메라와 장비에 또다른 변화를 주지 않을까 생각하고도 있다.


하지만 설령 더 비싼 렌즈나 바디를 구입하게 된다 하더라도, 1D Mark II를, EF 70-200mm 렌즈를 품에 꼭 안고 쓰다듬을 정도로 기뻐했던 2007년의 즐거움은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 같다. 취미는 이래서 좋다. 예술성이라는 영역을 툭툭 건드려도 보지만 크게 집착하지 않아도 되고, 가끔은 사진 자체보다 어제 구입한 럭셔리 장비들이 배낭 속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 온 천하를 얻은 것 같은 든든함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사진이라는 것을 (그리고 장비도) 즐기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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