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영화보다 호러 소설이 훨씬 더 오싹할 때가 있다. 전쟁 영화보다 전쟁 소설이 더 긴장감 넘치는 경우가 있다. 소설의 묘사와 이야기를 읽어나가다보면 내 머릿속에는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현장감이 만들어진다. 소설 속에는 글자 외에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작가의 묘사와 흐름에 따라 우리 머릿속에 자신만의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거기서 감동하고, 슬퍼하며, 두려워하고, 깔깔 웃는다. 일단 어떤 스토리가 나에게 수용되면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 머릿속에서 또다른 형상들이 생성되는 것이다.
소설을 이야기했지만 영화에서도 이런 기법들이 쓰인다. 화려한 영상미를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는 시대에 굳이 흑백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가 있다. 단조로운 색감 속에 분명한 스토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고, 관람객들은 자신만의 색채감을 '연상'이라는 작용을 통해 입혀간다. 그렇기에 한 번 빠져들기만 하면 흑백영화라고 해서 보기에 결코 불편하지 않다. 그래서 예술 작품들은 종종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연상의 영역을 던져주려 애쓴다. 유명한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열린 결말'이라는 것도 이런 것들 중 하나이다.
사진에도 이런 요소들이 있다. 어떤 사진은 피사체나 모델의 솜털 하나까지 선명하다. 담겨진 형상 앞에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그런데 아래 사진을 보자. 찰나 예술의 정수를 보여준 유명한 브레송의 작품이다. 이 사진을 보며 열 명의 사람들은 각자만의 열 가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물 웅덩이를 뛰는 남자, 울타리 뒤에 서 있는 남자, 수면에 비친 반영...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주관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들이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담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는 이들의 해석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생 라자르 역 뒤에서」
좀 민망하기는 하지만 내가 찍은 사진도 소개해 본다. 아래는 임진각에서 출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경의선 열차를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이다. 의도하고 찍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게 사진을 가르쳐주신 분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이 사진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평을 해 주셨다. 빠듯한 출발 시간에 맞춰 뛰어 탑승하는 두 여성이 보인다. 그리고 왼쪽 플랫폼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사람의 실루엣이 있다. 이런 장면들이 사진을 보는 이의 머릿속에 이야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2008, 임진각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열려진' 것보다 '가려진' 것들이다. 선명하게 보여지는 것들 가운데, 절묘하게 감추어진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상상의 줄기를 뻗고 잎을 피우게 만든다. 나는 사진생활을 하며 이런 것들을 주로 실루엣 처리를 통해 표현했다.
2022, 부산
실루엣 촬영기법은 어렵지 않다. 일반적인 자동카메라는 초점(선명히 맞추어야 하는 포인트)을 맞춤과 동시에 그 부위에 측광(빛의 정도를 측정)을 함께 한다. 그렇기에 노을이 지는 해변에서 애인을 찍어주면 애인은 밝고 선명한데, 함께 아름답게 펼쳐져야 할 석양의 배경이 하얗게 없어져버린다. 초점과 측광이 모두 사람에게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진기의 측광 버튼을 석양이 지는 배경에 맞춰 일단 눌러준다. 그렇게 되면 이후 초점을 사람에게 맞춰도 빛의 측정은 배경을 기준으로 맞춰지게 된다. 측광 기준으로는 사람의 모습을 밝게 보여줄 수 없다. 새카만 그림자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선명도는 사람에, 빛의 측정은 배경에 맞춰지게 되면 실루엣 사진이 만들어진다.
2009, 응암동
모든 현실을 다 보여주면 리얼리즘이 되고, 모든 것을 감춰버리면 초현실주의가 된다. 실루엣 사진은 선명한 현장을 드러내며 이것이 현실과 왜곡되지 않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마스킹(Masking)된 영역을 함께 던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한다. 이것이 실루엣 사진의 매력이다.
2009, 파주
2015, 다대포
사진 초보시절 실루엣 사진 기법을 배우고 싶은 생각에 동이 트는 새벽, 노을이 떨어지는 저녁 시간에 맞춰 출사지를 찾아가곤 했다. 지금도 이 두 짧은 시간은 사진가들에게 황금시간대이다. 빛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익숙해지니 이제 이것을 어떻게 사진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모델을 세워놓고 찍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지나가는 자연스러운 순간도 매우 좋은 촬영 포인트라 생각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초상권에 걸릴 일도 없다.
2010, 두물머리
수면에 비친 모습을 촬영한 반영 사진으로도 동일한 표현을 할 수 있다. 반영은 현실을 살짝 뒤튼다. 그래서 현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정원이나 공원 같은 곳에서 유독 호수나 연못에 집중하는데, 거기서 담을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2010, 파주
그리고 정말 현실과 근접한 모습이 수면에 담겼다 느꼈을 때, 나는 사진을 뒤집어본다. 그 때는 또 다른 이야기가 드러나기도 한다.
2008, 임진각
사후 보정도 많은 도움이 된다. 일산호수공원으로 출사를 갔던 날 연못은 지저분했다. 표면에는 부유물들이 기분나쁘게 떠다녔다. 물풀들이 수면 아래로 뻗은 모습이 인상적이라 일단은 담아왔는데 이래저래 집에서 만지고 뒤집으니 꽤 감성스런 결과물이 나왔던 것 같다.
2009, 일산
반드시 실루엣이나 반영 사진만이 답은 아니다. 사진가의 의도에 따라 순광에서 촬영한 결과물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진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람들의 뒷모습, 혹은 신체나 사물의 일부를 부각시키거나 프레이밍하는 것도 그런 방법 중의 하나다.
이렇게 여러 사진들을 올렸지만 잘 찍었기 때문에 소개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나마 악평을 듣지 않은 사진 위주로 추리기는 했다) 내가 이런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에게 사진이란 늘 어려운 것이어서 '이렇게 찍어야지'라고 의도했던 날은 늘 쪽박을 찼다. 그러나 그런 실패들은 결국 조금씩 나만의 자산으로 되돌아왔다. 실루엣 촬영, 반영 촬영 등등 열심히 연습하고 또 연습하니, 어느날 무심히 스냅으로 석양이나 호수를 담게 되고 나름 만족스런 결과물을 얻게 되었다. 한 가지에 오롯이 열심을 내기 힘든 내 성향에, 이토록 몰두했던 분야가 있었다는 것이 돌아보면 신기하다.
아무튼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무언가 표현을 해 보고 싶다면 당신도 여러 방법으로 연습을 해 보기를 권해본다. 표현이라는 것,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참 즐거운 것이다. 그리고 사진은 일상의 것들을 통해 이러한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찍을 수록 어렵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