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내가 지역 맘카페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음식점이나 카페를 알려주며 주말에 가보자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 보면 발디딜 틈도 없다. 인산인해의 분위기에 대기번호까지 받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즈넉하고 여유있다는 소문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맘카페에 소문이 퍼지는 순간 추천받은 그 장소는 이제 쉽게 찾기힘든 곳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먹어보면 맛도 별로다)
소수만 알던 출사지도 유명세를 얻게되면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언제든 고요함을 누리며 아름다운 풍경을 담을 수 있던 그곳이, 이제는 새벽에 일찍 가서 삼각대를 미리 세워둬야만 하는 빡빡한 장소로 바뀐다. 가족 나들이나 휴양지로 좋다는 소문까지 나게 되면 이제 무수한 인파를 피해 구도를 잡아야 한다. 소위 말하는 '낭만'이 사라지는 것이다.
두물머리를 처음 가보았을 때 그 고즈넉함에 반했던 기억이 있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앉아 끊임없이 흐르는 강줄기를 쳐다보노라면 하루 온종일을 그렇게 앉아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막 운전을 배웠던 시기였고, 서울에서 4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기에 두물머리는 이후부터 나의 단골 방문지가 되었다.
두물머리의 하이라이트는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떠 있는 황포돛배다. 물안개를 보려면 일교차가 큰 날을 골라 찾아야 하고, 그런 날을 골라 간다 하더라도 실제로 물안개를 볼 수 있을지는 복불복이다. 나는 출사운이 좋기도 나쁘기도 했는데 두물머리에서는 유독 물안개 피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새벽에 세 번을 찾았는데 모두 실패였다.
2010, 두물머리
그래도 이곳은 바쁜 일상에 소모된 내게 고요한 쉼을 주는 곳이었다. 언제 찾아도 그러했다. 큰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주변에 별로 볼 것도 없었지만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다 셔터를 눌러보고, 또 입구 주차장으로 이어진 길을 걷다가 셔터를 눌러보곤 했다. 바로 인근에는 연꽃으로 유명한 세미원이 있다. 굳이 그곳을 찾지 않더라도 이 주변에 연꽃들이 무척 많기 때문에 이 또한 즐길 거리다. 요즘은 더 유명해졌지만, 연잎 핫도그는 예전부터 명물이었다. 새벽에는 새벽대로, 오후에는 오후대로, 해질녘은 또 그 아름다운 석양과 함께 소박한 아름다움을 열어주던 두물머리를 나는 무척 사랑했다.
2019, 두물머리
이곳은 친구들과 마음이 갑자기 내킬 때, 아내와 연애할 때, 홀로 마음이 답답할 때 큰 고민 없이 찾아올 수 있어 좋았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아직 미혼이던 2010년 설연휴였다. 주말이 겹쳐 연휴가 너무 짧았던 탓에 부모님께 별도로 내려가겠다고 양해를 구했는데, 막상 설 당일이 되니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설날 특별히 할 것 없는 친구들이 모여보자고 연락이 왔다. 삼청동 카페에서 2시간 수다를 떨다가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갔는데, 여전히 할 일이 없는 남은 4명은 드라이브나 해보자고 결론을 냈다. 운전대를 잡은 내 머릿속에 떠오른 곳은 바로 두물머리였다. 몹시 추웠고 해도 떨어지던 시간이었지만 그런 것들은 개의치 않고 무작정 시동을 걸었다. 요즘은 명절 당일이라도 서울 시내는 여전히 복잡하지만, 그때만 해도 설날에는 강변북로든 올림픽대로든 막히는 곳이 없었다.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양수리를 찾았다.
2010, 두물머리
한겨울의 추위에 두물머리는 평소에 보기 힘든 이색적인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얼어있는 강물과 군데군데 모여든 청둥오리들, 저녁이 되며 아스라이 변해가는 하늘색.... 우리는 낮은 탄성을 뱉으며 그곳에 머물렀다. 차가운 강바람은 오히려 감성을 자극하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우리들의 대화를 아름답게 해 주었다.
2010, 두물머리
2010, 두물머리
두물머리를 찾을 때 빠지지 않고 들리는 곳이 있다. 지금은 폐점된 봉주르 카페다. 두물머리에서 차로 10분여 달리면 나오는 이곳은 내 사회 초년생 시절만 해도 마니아들만 알던 아지트였다. 토속적인 건물 안에는 산채비빔밥과 뚝배기 수제비, 해물파전 3개의 음식을 팔았고 모두 맛이 기가 막혔다. 늦은 밤에는 이곳만을 찾기 위해 오기도 했다.
2010, 봉주르카페
늦은 밤 봉주르 카페 야외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감상하는 것은 또 다른 낭만이었다. 그곳에는 둥글게 앉아 모닥불을 피우며 '불멍'을 할 수 있는 공간들도 있었다. 고구마를 은박지에 싸서 불 속에 집어넣고 구워먹기도 했다. 단, 고구마는 이 카페에서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직접 챙겨와야 했었는데 몇몇 손님들이 무상 제공으로 오해해서 다른 손님들이 불 속에 집어넣은 고구마를 꺼내 먹다 서로 얼굴을 붉히는 장면도 심심찮게 보곤 했다.
2010, 봉주르카페
카페 건물을 나오면 팔당댐 쪽으로 이어진 기찻길이 정감을 더해주었다. 식사를 마친 후 친구, 연인과 함께 그 길을 걷는 것은 필수 코스였다. 정신없이 이야기하며 걷다 보면 돌아가는 길이 고역이기도 했다.
2010, 봉주르카페
시간이 흐르며 두물머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두물머리를 처음 알았던 때도 이미 꽤 유명세를 타고 있었지만, 이제는 주말에는 차를 가져갈 수 없을 정도로 붐비는 장소가 되었다. 두물머리 내부도 많이 개발되었다. 느티나무가 있던 곳부터 길들을 더 뚫어 깊은 곳까지 하이킹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제는 두물머리 인근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강을 배경으로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담을 수 있는 포토존도 액자 형태로 세팅되었다. 내부 카페도 여러 곳 생겼으며 길도 잘 닦여졌다. 단, 황포돛을 단 나룻배는 이제 볼 수가 없다.
2014, 두물머리
봉주르 카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 동일한 이름의 카페로 재오픈했다고 하지만 위치도, 느낌도 전혀 다른 곳일 뿐이다) 사실 이 카페는 입소문을 타며 급속도로 손님들이 많아졌다. 정감스런 건물은 증축이 되었고, 메뉴도 3배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가격도 비싸졌다. 진입로부터 주차요원들이 배치될 정도였고, 간신히 들어가도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야 했다. 고요함을 누리던 그곳은 마치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고 수많은 점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곳이 되었다. 정부의 사업 일환으로 정겹던 기차길 대신 자전거 도로가 깔렸다.
그래도 그만한 곳이 없었기에 어떻게든 양수리로 가게되면 봉주르 카페를 찾았었는데, 어느날 그곳이 영업중지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확장을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진행한 주변 불법 개발이 원인이었다. 처음에는 많은 추억들이 깃든 장소가 없어졌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앞섰지만, 폐점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곳은 이미 내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곳과는 멀어진 상태였기에 그냥 씁쓸한 마음만 삼켰다.
2014, 두물머리
개발된 두물머리는 예전 좁고 불편하던 그곳에 비해 많은 탈바꿈을 했다. 요즘은 기회가 될 때 가족들과 함께 가서 강바람을 맞으며 마음껏 걷고 온다.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용 킥보드도 트렁크에 싣는다. 한여름이나 겨울에는 두물머리 안에 있는 카페로 피신해 창 밖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기도 한다. 커다란 액자가 세워진 포토존에서 사진을 남기고 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분위기가 바뀐 이곳에 대한 큰 불만은 없다. 두물머리를 찾는 이들이 날로 많아졌기에 개발도 불가피했다고 생각한다.
2011, 두물머리
그래도 내 기억 속 두물머리의 매력은 변하지 않는다. 좁은 섬처럼 덩그라니 남은 땅 한 가운데 커다란 느티나무, 황포돛을 펼친 채 유유히 떠 있는 나룻배,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들어주는 강물의 움직임,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는 고요함.... 이런 것들이 있던 그곳이 내 마음 속에, 찍어놓은 사진 속에 있어 감사하다.
2014, 두물머리
시간이 흐를수록 숨겨진 출사지는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고 SNS로 공유된다. 그래서 사실상 '나만 알고 있는 아지트' 같은 곳은 이제 거의 없다. 용인 이동읍에 있는 매력적인 저수지는 낚시꾼들의 조용한 쉼터였는데 멋진 곳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차를 몰고 와 소위 말하는 '차박'을 하며 쓰레기를 투기하고 소음을 발생시켜 주민들이 아예 차량 진입로를 막아놓았다. 남이섬은 어떤가? 내가 대학시절만 해도 그곳은 자연의 색채가 살아있는 불편하고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겨울연가 신드롬으로 어떤 때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한국인들보다 더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요즘 남이섬 블로그 게시물들을 살펴보면 거의 테마파크 수준의 화려한 장소가 되었다. 예전의 매력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많은 관광객들의 취향을 맞춰주려는 노력을 하는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은 많이 좋아할 것 같아서 한 번 가 볼 계획은 세우고 있지만, 과연 예전만큼의 가슴뛰는 분위기를 만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긴 하다.
2010, 남이섬
이런 변화들에 대해 나는 무조건 부정적이진 않다.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되면 그만큼 불편도 늘게 되고, 다양한 연령층이 누릴 수 있는 시설들을 만들어주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소위 '나만 알고 있던' 낭만은 그러한 변화 속에 사라져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 당시에 많은 사진을 남겨놓았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도 많이 찍어둬야겠다. 어디 '장소' 뿐이겠는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의 모습들도 열심히 남겨두면 훗날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다시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두물머리에 황포돛배가 있었던 시절 물안개 피는 새벽 사진을 못 찍은 건 지금까지 쓰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