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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Jan 22. 2024

촬영 여건도 새옹지마

좋은 날씨가 꼭 멋진 사진을 만들어주는 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를 갖고 있어도, 아무리 사진 실력이 좋아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적어도 사진의 영역에 있어 내가 믿고 있는 말이다. 아마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봄꽃을 찍으러 나갔는데 하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면 의도한 것들을 담기가 어렵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기에 적절한 빛이 내려주지 않으면 인공 조명과 같은 도구들을 활용한다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여로모로 사진은 카메라를 든 사람에게 겸손을 요구한다.


사진 소모임을 이끌고 있을 때 정기 출사 전날은 제대로 잠이 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와야 할텐데', '갑자기 불참한다는 문자가 안 왔으면 좋겠는데'와 같은 근심과 함께, '제발 날씨가 좋아야 할텐데'라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날이 어떻든 모인 사람들은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 자체를 즐거워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출사를 기획한 사람으로서는 부담이 있었나 보다.


사진 찍기 좋은 조건은 그저 햇볕만 쨍쨍 내리쬐는 날씨가 아니다. 빛이 너무 강해도 사진 촬영이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는 차라리 살짝 흐린 날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만 황사나 미세먼지도 계절을 가리지 않고 심술을 부린다. 장마나 한파가 찾아온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좋아 보이지 않는 기상 상황에도 좋은 사진은 만들어낼 수 있다. 그 특별한 묘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일 감성의 이끌림에 따라 틈새 프레임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선물처럼 내게 주어졌다.




강한 한파가 몰아치던 겨울날, 몇몇 선후배들과 태안을 찾은 적이 있었다. 기름유출 사고로 자연과 어민들이 입은 상처가 서서히 치료되고 있던 즈음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추운 날씨 때문인지 만리포 해수욕장은 적막하리만큼 한산했다. 차량에서 모두 내려 발자국 하나 찍여있지 않은 매끄러운 해변으로 걸어나갔다. 칼날과 같은 겨울 바람 때문에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이 너무나 좋아 나는 그 짧은 순간에 100컷에 달하는 셔터를 눌러댔다.


2010, 만리포


다함께 단체사진도 남겼지만, 얼굴이 노출되지 않은 독사진으로만 사진을 올려본다. 당시 감성사진에 푹 빠져 있던 시기라 후보정시 의도적으로 비네팅을 과하게 넣긴 했다.


2010, 만리포


차로 돌아온 우리들의 얼굴은 코 끝이 새빨개진 채로 아래턱이 떨리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런 사진들을 남길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 언젠가 다시 만리포를 찾아오리라 다짐했다.


2010, 만리포



2010, 만리포





2년 후, 나는 결혼을 했고 주말을 맞아 아내와 당일치기로 그 아름다웠던 만리포 해수욕장을 가보기로 했다. 많이 막히는 토요일이었지만 이전에 보았던 깨끗하고 아름다운 그곳의 모습을 함께 볼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심지어 날도 너무나 좋은 봄이었다.


2012, 태안


그러나 막상 도착한 만리포 해수욕장은 2년전 사진으로 담았던 풍경과 전혀 달랐다. 입구부터 관광객들로 바글바글했고 가게마다 울리는 트로트 노래들이 공중을 메웠다. 무엇보다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던 바다의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세먼지도, 황사도 없었건만, 해변 가득 채워진 안개가 바다 전체를 덮고 있었다.


2012, 태안


다름아닌 해무(海霧)였다. 나중에야 찾아보고 안 사실이지만 포근한 날씨가 되면 유독 해무가 잦은 곳이 이 지역이었다. 여기가 뭐가 좋냐고 묻는 아내에게 나는 아무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2년 전의 매력이 모두 사라진 만리포는 볼 것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하필 오늘!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래도 아무 것도 담지 않고 떠날 수는 없어서 무심하게 안개 속에 파묻혀 해변을 걷는 사람들을 찍어 보았다.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실망하는 아내를 달랠 수 있는 대안이 생각났다.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조금만 더 내려가면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이 있다. 거기도 예전에 가본 적이 있어 급히 다시 시동을 걸었다.


해무가 없는 곳을 찾아 내려가는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내려가는 길 풍경에도 해무가 조금씩 끼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해무는 우리가 움직이는 방향과 같이 이동하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했지만 차는 그다지 쌩쌩 달릴 상황이 아니었고 바람을 탄 안개는 우리를 앞질러 내려갔다.


결국 도착한 꽃지 해수욕장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해무에 갇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해물 칼국수 한 그릇씩 먹고 올라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사진 파일을 열어보고는 꽤나 놀랐다. 쓰라린 마음으로 무심히 찍었던, 해무가 가득한 만리포와 안면도의 사진들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감성으로 가득했다. 아내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해무 덕분에 내 사진은 횡재를 했다. 별볼일 없는 내 포트폴리오에 빠지지 않는 작품(?)이 바로 이날 찍은 것들이다.


2012, 만리포



2012, 만리포


안개 속 뻘을 걷던 사람들의 모습 중 어떤 컷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어떤 컷은 동행과 따스함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해무 틈새로 낙조가 희미하게 보이는 꽃지 해수욕장의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2012, 꽃지 해수욕장




"오늘은 망했네"라고 느낀 날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 회색빛 하늘에 비가 쏟아붓는 날은 오히려 운치 있는 풍경이 시선에 들어오기도 한다. 빗물이 떨어지는 물웅덩이도 좋은 피사체가 될 수 있다. 내가 아는 고수 한 분은 추운 겨울날 가장 왕성한 촬영을 한다고 말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쓸쓸한 풍경에 담을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반면 완벽한 기상조건이 갖춰진 날에 찍은 사진들이 훨씬 밋밋할 수 있다. 예쁘지만 특색 없는 결과물들로 메모리 카드를 가득 채울 수 있다. 무박 2일의 일정으로 전남 광양 매화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그날은 기온과 빛이 환상적이었다. 4시간 동안 정말 행복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정작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매화마을 광고 사진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나 여기 다녀왔소'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사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내 실력이 더 큰 원인이겠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독특해서 조건이 풍성할 때는 감성이 둔해지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틈새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여러 명소를 찾아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피사체가 내 동네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장소나 기상조건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포기하기에는 숨겨진 보물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사진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이는 내 생활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해가 뜨고 비가 오는 것처럼, 인생의 좋은 일과 우울한 상황은 늘 반복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은 여전히 있다. 그것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이 내 삶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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