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선지자가 발견한 소망
※ 표지그림 : 「선지자 이사야」, Giovanni Battista Tiepolo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뒤이어 남유다를 침공합니다. 민족주의와 여호와 중심주의로 독립 노선을 택했던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위기를 넘기지만 유다 땅은 앗수르의 잔혹한 노략으로 황폐화됩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 속에서 유다는 힘이 없었고, 그 누구도 희망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라는 선지자는 이러한 시련 속에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지고 있고 더욱 소망할 이유가 있음을 예언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예언들을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마 성경의 선지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서의 구절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대선지서인 이 예언서에는 하나님과 유다를 가슴에 품은 선지자의 안타까움과 소망이 넘쳐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 미가 선지자와 같이 이사야도 유다의 죄악들을 고발합니다. 그는 B.C 8세기의 선지자답게 격렬한 분노와 높은 윤리의식을 가지고 그 죄악을 공격했습니다. 그는 재물을 인간이나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는 소유에 대한 탐욕을 아모스 이상으로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집을 연달아 차지하고 땅을 차례로 사들이는 자들아! 빈터 하나 남기지 않고 온 세상을 혼자 살듯이 차지하는 자들아! (이사야 5:8, 공동번역)
... 악법을 제정하는 자들아,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만드는 자들아! 너희가 영세민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내가 아끼는 백성을 천대하여 그 권리를 짓밟으며 과부들의 재산을 털고 고아들을 등쳐먹는구나. (이사야 10:1~2, 공동번역)
또한 이사야는 북왕국처럼 공의를 내팽개친채 형식만 차리는 종교예식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의로운 행동 없는 예배는 위선과 외식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너희가 나를 보러오는데 도대체 누가 너희에게 내 집 뜰을 짓밟으라고 하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야 1:11~17, 공동번역)
아울러 왕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하스 왕은 격려의 징조까지 보여주셨음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고 앗수르에 의지하여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개혁국가조차도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굽에 도움을 구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충고를 거절하고 타국의 도움으로 자신을 구하려고 생각하는 이 국가를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31:1~3)
이러한 이사야의 비판은 아모스나 호세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언약관계에 근거하여 나왔습니다. 우리는 2장에서 아모스서를 함께 살펴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얼마나 오해하고 업신여겼는지 함께 보았습니다(기억나시지요?). 이사야도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들이 상호적인 사랑의 언약을 기계적인 거래로 바꿔버렸다고 비난합니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탄식이 아래와 같이 토해집니다.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이제 내가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너희에게 알리리라. 울타리를 걷어 짐승들에게 뜯기게 하고 담을 허물어 마구 짓밟히게 하리라. (이사야 5:4~5, 공동번역)
하나님은 포도원으로 비유되는 이스라엘과 언약하셨고, 그들에게 아낌없는 자원을 부어주시며 공의와 순종이라는 최상급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하셨지만 그 포도원에는 쓸모없는 들포도가 열러버렸습니다. 이런 포도원은 주인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다시 열매맺지 못하도록 멸해버릴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완전한 절망을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을 "빛이 아닌 어둠의 날"로 묘사했지만, 이사야는 그 어둠을 넘어 "깊은 흑암에 드리운 땅에 비추이는 큰 빛"(이사야 9:2), 즉 소망을 보았습니다.
그는 유다를 지극히 사랑했던 애국자였습니다. 예루살렘 시민이었던 이사야는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과 법궤가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는 반역과 쿠데타가 반복해서 일어난 북왕국과 달리, 유다에 다윗 왕조가 지속되고 있음을 지켜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앗수르의 포위공격에서 기적으로 예루살렘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손길도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가 외친 소망은 애국적 낙관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외친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언약이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은 어처구니 없이 실패했고 타락하였습니다. 미가와 이사야가 선언한 유다 공동체의 죄악상은 조금도 과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실패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요?
이는 이사야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선지자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되 그것을 완고하기 그지없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루실 것입니다. 유다에는 여전히 미래가 있고, 그 미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이것이 이사야의 소망이었습니다.
동시에 이사야는 유다가 북이스라엘만큼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확신했습니다. 분명 남유다에 불의가 있었고 개탄스러운 점이 많았지만, 북왕국에서 보였던 우상숭배와 사회적 죄악만큼은 아니었습니다(저자는 신학적, 역사적으로도 이것이 어느 정도 확인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시종일관 악한 왕들이 통치했던 북왕국과는 달리 유다에서는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개혁에 동참했던 왕들도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 절정이었습니다.
"이 땅에는 죄악과 거짓이 넘쳐나지만, 그래도 자세히 보면 소수의 경건한 자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구나!"
여기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진정한 이스라엘을 발견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거룩한 씨'를 말입니다.
주민의 십분의 일이 그 땅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들마저 상수리나무, 참나무가 찍히듯이 쓰러지리라. 이렇듯 찍혀도 그루터기는 남을 것인데 그 그루터기가 곧 거룩한 씨다 (이사야 6:13, 공동번역)
우리가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하여 고민하며 기도할 때 "연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어떤 의도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비록 지금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 어려움은, 내가 단순히 벌을 받거나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겸손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숙하게 하시는 도구라는 의미이겠지요.
이사야도 국가의 재난을 이런 관점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유다가 장차 맞게될 시련은 분명 그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일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간은 하나님의 백성을 깨끗하게 만드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죄악과 부조리에 가려저 쉽게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이 정화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치겠다. 잿물로 씻어 내듯 너희의 허물을 씻어 내겠다. 너희의 찌꺼기를 모두 없애 버리겠다.
옛날처럼 재판관들을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참모들을 다시 세우겠다.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로운 성', '충성스런 성'이라 부를 것이다." (이사야 1:25~26, 쉬운성경)
"남은 자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이들을 통해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은 이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아모스, 호세아가 선언한대로 국가는 심판의 대상일 뿐,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될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줄기차게 국가를 개조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맞춰보려 했지만 죄악만 저지를 따름이었지요. 그렇기에 이스라엘 국가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국가가 아닌, 그 안에 진실되게 그분을 경외하는 소수, 즉 '남은 자'들이라고 이사야는 선언합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가문의 생존자는 자기들을 치기나 할 자를 다시는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느님 야훼를 진심으로 의지하리라.
남은 자가 돌아온다, 용사이신 하느님께로. 야곱의 남은 자가 돌아온다.
이스라엘아, 너의 겨레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살아 남은 자만이 돌아온다. 파멸은 이미 결정된 것, 정의가 넘치리라. (이사야 10:20~22, 공동번역)
이사야는 이 남은 자들을 다윗 계열의 메시야가 다스리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우리는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윗 왕국에 대한 향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착각이고, 오해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바라보는 이 지도자는 그런 세속국가의 왕을 뛰어넘습니다. 메시야는 스스로 교만해진 나라가 아닌, 쓴 잔을 마시고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여 그루터기만 남은 백성들에게 오실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받아 왕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는 사나운 전사가 아닌, 자그마한 아기로서 우리 앞에 오실 것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평화가 굳게 세워지고 정의와 공평이 넘칠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과 완벽히 일치할 것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겠고, 평화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다윗의 나라에서 다스릴 것이다.
그가 정의와 공평으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자기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9:6~7, 쉬운성경)
또한 그 나라는 옛 다윗 왕국의 모습이 아닌,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회복이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평화가 온 땅을 지배할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간의 깨어진 모든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그 때에 이리와 어린 양이 평화롭게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어린 황소가 함께 다니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닐 것이다.
암소와 곰이 사이좋게 풀을 뜯을 것이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다.
젖먹이가 독사의 구멍 앞에서 장난치고, 어린아이가 살모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어디에도 그들을 해치는 것이나 다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듯이, 그 땅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 찰 것이다. (이사야 11:6~9, 쉬운성경)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과 메시야 대망은 유다가 멸망한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소망을 주게 됩니다. 그들은 국가의 멸망과 포로의 삶을 겪으며 형언할 수 없는 시련과 치욕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 이사야의 메시지가 그들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토록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지만, 이것이 진짜 하나님 백성을 만들어내는 연단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좌절의 끝에 우리를 통치하실 다윗 계열의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이와같은 이사야의 사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관념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서 국가 안에 있는 '교회'로 옮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남은 자의 사상 속에서 혈통적 이스라엘과 이상적 이스라엘 사이에 구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국가'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고난받는 순결한 백성들이 그 나라를 이어받을 것입니다. 오직 참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입니다.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은 우리에게도 묵직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것은 크나큰 위로일 수도 있고 서슬퍼런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서건 '남은 자'는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복음을 위해 고통받는 자, 세상의 요구를 거절하다 쓰라린 대가를 치르는 자,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며 간곡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소망은 없을 것입니다. 설령 내가 세상적으로 망한다 해도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나를 사랑하고 계시며, 당신의 순결한 백성으로 만들어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안락과 현실의 이익 속에서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어떤 교회에 출석하건, 얼마나 오래 신앙생활을 했건 관계없이- 이 시간이 그들에게 전혀 좋은 시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난을 제대로 당해본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쉽게 요청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택함받는 지점은 엄밀히 말해 고난 속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고난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고난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본질적인 것을 구하게 하는 자리로 인도하시는 도구로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것이 고난입니다. 이는 신약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자연스러운 운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가 겪은 고난에도 참여해야 한다"(로마서 8:17)고 말합니다.
우리는 헛된 쾌락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입니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포기의 길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그분을 섬기며 진실한 그분의 백성이 되어갈 것입니다. 이사야가 노래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비극적인 시대가 온다 해도, 심지어 교회마저 세상의 압력이나 유혹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항상 남은 자, 남은 교회는 존재하여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뜻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누가복음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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