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를 마시고 티를 마시고 티를 마신다
내 경험상 영국인 집에 가서 “우쥬 라잌 썸 티” 말이 나오기까지는 평균 5분 정도가 걸린다.
여기서 '티‘란 페퍼민트도 아니고, 케모마일도 아니고, 둥굴레차는 더더욱 아니다.
영국에서 티라고 하면 100에 99.9는 홍차에 우유(혹은 식물성 우유)를 탄 음료를 뜻한다.
한국에서 데자와로 대표되는 밀크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국의 티와 한국의 밀크티는 같다고만 말하기엔 너어어어어무 다르다.
한국에서 먹는 김치가 해외에서 먹는 김치와 다른 것처럼.
우선 한국의 밀크티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달다.
부대찌개로 밥을 먹고 입가심하기엔 괜찮은 당도일 수는 있으나, 차로 마시기엔 과한 수준이다.
그리고 한국의 밀크티는 홍차 맛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우유의 비중이 높다.
차를 마신다는 느낌보다 홍차맛 우유를 마신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영국에선 보통 270ml 티 한 잔에 우유 10-20ml를 타는 게 표준이다.
붉은 홍차가 구운 아몬드색으로 둔갑하기에 딱 좋은 비율이다.
영국에선 티의 쌔기에 따라 말도 달라진다.
앞서 말한 표준 비율로 마시면 '클래식',
우유를 많이 타면 '밀키',
좀 쓰게 마시면 Builder's Tea(인부티)라고 부른다.
몸 쓰는 일 하시는 분들이 티를 쓰게 마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티에 막 맛 들였을 때 밀크티라고 불렀다가 아내에게 혼쭐이 났다.
밀크티가 아니라 그냥 티라고.
우유를 탔는데 왜 밀크티가 아니냐고 반박했다.
아내 왈, 그럼 넌 라떼를 밀크커피라 부르냐, 그냥 커피라고 하지.
납득됐다.
앞으로는 그냥 티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영국에선 우유를 타든 안 타든, 설탕을 넣든 안 넣든 티는 티다.
우유를 탔다고 밀크티가 되지도, 설탕을 넣었다고 슈가티가 되진 않는다.
영국에서 티를 주문할 때 우유를 넣고 싶으면 tea with milk,
설탕을 넣고 싶으면 tea with sugar라고 하면 된다.
부디 milktea라고 하지 마시길.
엄청 공신력 있어 보이진 않는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영국인은 하루 평균 7-10잔의 티를 마신다고 한다.
아내에게 이게 사실이냐고 물어보니 얼추 맞을 거라고 했다.
7-10잔.
어마어마한 숫자다.
하루 24시간 중 16시간을 깨어있다고 치면 두 시간에 한 잔을 마시는 꼴이다.
거의 머그잔을 끼고 산다고 봐야 한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끼고 사는 거 맞다.
아내 가족들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어딨나 싶으면 항상 주방에서 머그잔에 티스푼을 휘적거리고 있다.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이런 식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잠 깨기 용으로 한 잔,
잠 깨고 맛 음미 용으로 한 잔,
하루일과 개시 용으로 한 잔,
점심 전후로 한 잔씩,
오후 일과 중에 한 잔,
누가 한 잔 타 줘서 한 잔,
내가 누구 한 잔 타 주고 싶어서 같이 한 잔,
저녁 전후로 한 잔씩.
한 번은 헬스푸드 가게에서 김치를 사는데 계산대 직원이 내게 물었다.
한국에선 정말 아침에도 김치를 먹냐고.
그렇다고 했다.
아침뿐만 아니라 점심 저녁에도 먹고, 간식과 안주로도 먹는다고.
오오오오 하며 놀라워했다.
좀 더 찰지게 설명하게 싶어서 한마디 덧붙였다.
영국인들 티 마시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그러자 깊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반색했다.
와우. 그 정도냐고.
그 정도라고.
영국의 티문화 속으로 한발 더 들어가자면 비스킷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피쉬에는 칩,
뱅어에는 매쉬 (뱅어=소세지, 매쉬=으깬 감자),
티에는 비스킷이 정석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티에는 비스킷을 찍어 먹는 게 정석이다.
이걸 전문용어로 '덩킹(dunking)'이라고 한다.
비스킷이라고 해서 슈퍼에서 파는 아무 비스킷이나 사들고 가면 비스킷으로 뒤통수 한 대 얻어맞기 딱 좋다.
비스킷 구매 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비스킷을 티에 찍었을 때 비스킷이 으스러지지 않고 형체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며,
초콜릿 비스킷일 경우 초콜릿이 티 안으로 녹아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의 묵직한 농도여야 한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엄선된 제품만이 머그잔 옆에 가지런히 놓일 특혜를 누리게 된다.
실제로 영국에서 슈퍼에 가면 덩킹에 특화된 비스킷 제품을 여럿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영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비스킷 브랜드는 단연코 맥비티(McVities)이다.
그중에서도 다이제스티브(Digestives)와 홉놉(Hobnobs)이 양대산맥을 이루는데,
둘의 주된 차이점은 다이제스티브는 밀가루 베이스이고, 홉놉은 귀리 베이스라는 점이다.
다이제스티브는 입자가 곱고 부드러운 반면 입 안에서 살짝 떡지는 경향이 있고,
홉놉은 거칠고 부스러기가 많이 생기는 대신 맛이 더 고급지고 담백하다.
현지 여론을 살펴본 결과 다이제스티브와 홉놉 간의 경쟁은 한국의 부먹 찍먹 파 싸움 못지않게 치열했다.
다이제스티브를 먹을 거면 프랑스로 이민 가서 먹어라,는 골수홉놉파.
내가 티를 마시는 건지 비스킷이 티를 마시는 건지 모르겠다,는 홉놉의 과도한 흡수력을 지탄하는 정통다이제스티브파.
이 논쟁을 최대한 공정하게 제3국인 시선으로 읽었을 때, 오리지날 맛은 홉놉이, 초콜릿 비스킷은 다이제스티브가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 와서 느낀 건데, 영국이야말로 소확행의 발원지가 아닌가 싶다.
영국 날씨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구리다.
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나라에 이런 날씨라니, 역시 신은 공평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소확행을 챙겨가며 꿋꿋이 살아간다.
그 소확행의 중심에 바로 티와 비스킷이 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에 비스킷을 덩킹함으로써 잠깐일지언정 행복하고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