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9월부터 야간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나의 지적호기심을 채우고,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의 전문성을 좀 더 기르기 위해 한번 야간대학원을 도전해보기로 했고, 일단 한 학기를 다니기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기부와 관련된 전공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1주차 수업이라 별 내용은 없었고 OT 및 자기소개 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학원 수업이 원래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듣는 이 수업은 학생이 소수였다. 10명 내외였다.
교수님께서는 각자 자기소개를 하게 하신 뒤, 자기가 기부하고 있다면 어느 분야 및 단체에 후원하고 있는지 물어보셨다. 한명씩 돌아가며 다양한 기부처 이야기가 나왔다. 은둔·고립 청년 지원 단체, 국제개발구호 단체 등등...
난 적잖게 당황했다.
"저는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 지원센터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의 성정체성, 성적지향성에 비관적인 편도 아니고 과하게 자랑스러워하는 편도 아니다. 그냥 건조하게 나는 이런 사람이다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다. 다만,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논쟁적이거나 특이한 부분들을 꺼내고 싶지는 않는 편이다. 지인, 친구 관계라면 그냥 당당히 커밍아웃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교수-학생 관계, 나와 같은 산업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딱히 굳이 내 소수자성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수업에서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있었다면 "당신 눈 앞에 있는 사람도 성소수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아시는 거죠?"라고 면전에 박아버릴텐데,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뭉뚱그려서 말했다.
교수님 : "자네는 어디에 기부하고 있는가?"
나 : "인권 단체에 기부하고 있어요"
교수님 : "인권 단체 어디? 000센터?"
나 : (뭐야 왜 꼬치꼬치 캐물어) "... 인권재단 사람이요" (틀린 말은 아니다.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는 인권재단 사람 후원 시스템을 쓴다.)
교수님 : "흠..." (모르는 눈치, 혹은 기부 분야 30년 일했지만 몰라서 당황한 눈치?)
OT, 자기소개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밤 10시 30분, 덜컹거리는 서울 지하철 속에서 문득 울컥했다.
'언제까지 숨기고 살아야 하는 걸까'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저 소수자일 뿐인데'
'그냥 당당히 성소수자 단체에 기부한다고 말할 껄 그랬나? 말했으면 교수님 분명 당신 성소수자냐고 물어봤을 듯'
'진짜 살기 힘들다'
'에휴...'
생각이 많아졌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