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수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가 경기로 여러 번 구급차 타고 응급실을 가고,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지만 하루나 이틀 만에 퇴원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매일 학교 갔다가 치료실을 다니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10살 때부터 시작된 4번의 정형외과 수술로 깨달았다. 수술 이후 진짜 재활의 쓴 맛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길고 긴 재활의 여정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우리 아이처럼 편마비(뇌 손상으로 한쪽 손과 발의 운동 신경이 떨어지는 증상)는 다리 수술 후에 예후가 좋은 경우가 있다며 물리치료실 치료사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아이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나도 복직하는 바람에 친정 엄마가 치료실을 데리고 다니다 보니 신경 쓰지 못했는데, 8살 됐을 때 직접 전화를 주셨다. 수술해 보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워낙 다양한 장애아들을 치료하시면서 우리 아이를 각별하게 챙겨주셔서 믿고 의지하는 분 중에 한 분이라 두 말 않고 다니던 병원 재활의학과에 찾아갔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니고 있는 재활의학과 선생님께 수술 얘기를 꺼냈다. 아이를 살펴보더니 우선 보톡스를 맞아보자고 하셨다. 4개월에 한 번씩 양쪽 다리에 보톡스를 맞았던 것 같다. 4개월쯤 되면 약기운이 떨어지면서 다시 다리와 발목에 강직이 생기며 까치발로 걷고 다리도 뻣뻣해진다. 4개월에 한 번씩 맞으면 3번만 맞아도 1년이 지난다. 그 사이 아이는 9살이 되었다. 물리 치료사 선생님이 왜 수술 안 받냐고 물으시길래 재활의학과 선생님이 자꾸 보톡스만 맞으라고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다른 병원을 가보면 어떠냐고 하셨다.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 병원 재활의학과에 예약을 잡았다.
다니던 병원에서 소견서를 받아 다른 대학 병원 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학병원 의사는 소견서가 필요하다고 말한 지점부터 기분 나빠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이라는 자부심이 있는데, 소견서 들고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다. 난 참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둘러대기라도 할 텐데 그때는 곧이곧대로 다 말했다.
지금은 더하지만, 그때도 대학 병원은 처음 예약하면 기본 두세 달은 기다려야 한다. 다니던 병원 진료 기록이며 검사 자료 다 가져오라고 하길래 태어났을 때부터 마지막 재활의학과 진료본 것까지 모조리 떼서 가져갔다. 서류를 하나로 묶어줬는데 두께가 5cm는 족히 넘었다. 새로 간 대학병원 의사는 가져간 자료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가져가라고 하면서 처음부터 검사를 다시 했다!!!! 정말 너무 어이없고 화가 났다. 병원을 진저리 나게 많이 다니면서 병원의 생리를 많이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른 것 투성이었다.
엑스레이부터 피검사까지 다 새로 했고, 의사는 처음 진료 보러 왔으니 좀 지켜보자고 했다. 대략 3개월에 한 번씩 진료 보러 가는 길은 지옥이었다. 복잡한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러 운전해서 가는 길은 너무 고되고 힘들었다. 그래도 정형외과에 연계해 주길 기다리며 진료 보는 날짜에 맞춰 꼬박꼬박 갔다. 또 그렇게 1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울장애인 복지관에서 무료로 인지, 신체, 사회성 등 전체적인 검사를 해준다는 얘기를 듣고 겨울 방학 때 방문했다. 아마 이 검사도 가까운 날짜에 예약이 안돼서 한참을 기다렸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검사를 다 하고 마지막으로 복지관에 상주해 있는 재활의학과 선생님을 만났다. 걸음걸이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인 몸 상태를 체크하시더니 의사 선생님이 수술 얘기를 꺼내셨다. 대학 병원 두 곳이나 다니면서 수술받으려고 했지만 자꾸 기다려보자는 말씀만 한다는 얘기를 했더니, 분당 서울대 병원과 삼성서울병원 정형외과 선생님을 한 분씩 추천해 주셨다. 우리나라에서 정형외과로 수술 잘하시는 1,2위 의사 선생님이라고 하시면서.......
난 딱 그때, 그 선생님을 만난 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는다. 내가 대학병원 두 곳을 전전하며 수술에 대해 간절하던 바로 그 타이밍에,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분을 만나게 하셨다.
1위라고 했던 분을 찾았더니 바로 얼마 전에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떠나셨다고 했다. 외국을 나가셨다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결국 최고의 선생님은 만날 수 없었다.
2위라고 하신 분을 찾기 위해 삼성서울병원에 전화를 했다. 선생님은 병원에 근무 중이셨고, 3개월 뒤로 예약했다. 할렐루야!!!
난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정형외과 진료를 보고 알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처음 다니던 병원에서 정형외과로 연계가 안되었을 때, 두 번째 대학병원에서 재활의학과가 아닌 정형외과로 예약했어야 했다. 그걸 모르고 주야장천 재활의학과만 다니면서 정형외과로 연계해 달라고 했던 나 자신이 얼마나 미련했는지 알게 되었다.
삼성서울병원 정형외과 심종섭 선생님을 만나던 날!
그때는 아이가 찔뚝찔뚝을 넘어 뒤뚱뒤뚱에 가깝게 걸었지만 제법 잘 걸어 다녔고, 수영도 4년 째 해오고 있어 아직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을 나도 모르게 내심 기대했다.
하. 지. 만. 엑스레이 결과를 본 선생님은 왼쪽 고관절이 20%만 남아있고 거의 빠져서 완전히 빠지기 전에 수술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완전히 탈골되면 통증이 심할 거라는 말씀도 하셨다. 병원 두 곳을 전전하다 2년이 흘렀고, 10살이 된 상태였다. 수술하고 나면, 두세 달은 누워있어야 한다고 하셔서 겨울방학을 앞두고 수술하기로 했다. 아이는 자기 생일인 12월 4일, 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했다.
수술하기로 결정하면,
바로 수술 상담 간호사와 상담한다.
수술 상담 간호사는 정확히 어디 부위에 어떤 수술을 하는지, 수술 시간은 대략 얼마나 걸리는지, 입원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 수술 전반에 관해 대부분 자세하게 대답해 준다.
그리고, 수술 날짜를 잡는다.
수술 하루 전 입원해야 한다며 입원 시간도 대충 알려준다.(하지만, '병원에 전화 오면 입원하라'고 말한다.)
수술 전 검사 날짜도 잡는다.
수술 전 검사는 보통 수술 한 달 전쯤으로 잡는다. 피검사와 엑스레이, 심전도 검사를 한다. 우리 아이는 다른 대학병원에서 뇌전증으로 경기약을 먹고 있어서 처방전 들고 소아과 진료도 항상 따로 봤다.
수술 전 검사에서 아무 이상이 없으면 병원에서 아무 연락이 없고, 입원날짜에 입원하면 된다.
우리 아이는 4번을 수술했으니 수술 전 검사도 4번 한 셈이다.
한 번은 수술 전 검사에서 간 수치가 너무 높다며 다시 와서 재검하라고 했다. 수술 전에 추적 검사를 위해 추가로 두세 번 더 병원을 가다 보니 수술 한 달 전부터 꽤 바빴다.
첫 수술은 거의 탈골된 왼쪽 다리 고관절을 제자리에 다시 끼워 넣는 수술이었다. 전신 마취하고, 수술은 7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난 학기 중인 데다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기에 남편이 휴가 내서 입원 기간 내내 간호했다.
생각보다 큰 수술이었다.
오전 10시쯤 시작한 수술이 저녁 6시가 넘도록 안 끝나서 잘못된 건 아닌지 엄청 불안했다. 수술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9시간이 지났을 때 회복실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렇게 첫 수술을 마쳤다.
9시간에 걸친 수술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가 마취에서 깨기가 무섭게 폐에 산소공급을 해야 한다면서 색색깔 플라스틱 공 3개가 들어 있는 호스달린 장난감(?)을 입으로 불라고 했다. 기운 없는 아이는 부는 흉내만 냈다. 간호사는 공이 모두 위로 붕 떠오를 때까지 세게 불라고 했다. 자꾸 불어야 열이 나지 않는다면서 큰 숙제처럼 수시로 와서 체크했다. 자꾸 불다 보니 겨우 1 cm정도 뜨던 공이 조금씩 더 떠오르다가 하루 이틀 지날수록 꼭대기까지 올렸다. 잠깐 면회를 갈 때면, 안쓰러움은 접어두고 혹시라도 열날까 봐 아이에게 독촉하기 바빴다. 그래도 그 시간들을 아이가 의젓하게 잘 견뎠다. 마취가 풀리면서 통증이 어마어마할 거라고 했는데도 무통주사 외에 더 추가로 요구하지도 않고 밤을 보냈다.
3일 정도 불기를 하더니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행히 열은 나지 않았다.
허리부터 발끝까지 통깁스를 하니 통풍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나마 겨울이라 수월한 거라고 했다. 병원 지하 의료기 판매하는 곳에서 미니 선풍기(탁상용)를 사서 엉덩이 쪽에 24시간 틀어줬다. 욕창 나기 쉽기 때문에 밤에 잘 때도 틀고 잤다. 아무리 통깁스를 해도 추운 겨울에 선풍기를 계속 쐬다 보니 아이는 춥다고 하니까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통깁스한 내내 선풍기를 쐬어 주어야 해서 퇴원 후에도 집에서도 계속 선풍기를 틀고 살았다.
아이는 양쪽 다리를 45도 정도 벌리고, 무릎도 살짝 구부러진 상태로 통깁스를 해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오롯이 누워 있어야만 했다. 사실 수술하기 전에도, 수술하러 입원했을 때도 대소변을 받아내야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수술 끝나고 나서 기저귀 사 오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을 나에게 전하는 남편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급한 대로 지하 1층 의료기 판매하는 곳에서 사서 썼다. 통깁스를 풀기 전까지 6주 동안 10살짜리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그나마 병원에서는 침대에 누워있고 힘들면 간호사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지만, 집에서는 나와 남편이 출근하면 친정 엄마 혼자 그 일을 감당해야 했다. 다행히 남자애라 소변은 소변통에 받으면 되니까 수월한데 하루 한번 대변 보는 일이 큰 일이었다. 당시에 활동 보조 선생님을 고용했기 때문에 하루 한번 오셔서 잠시 있다가 가셨는데 그 시간에 대변을 보면 다행이었다.
'6주만 버티면 되겠지, 6주 후에 통깁스만 풀면 화장실도 혼자 다니고, 재활하면 금방 잘 걷겠지'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건 완전 착각이었다.
재활의 쓴맛은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