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세'는 단거리요 '성공'은 마라톤 경주다
치열한 적자생존 경쟁논리
무슨 세상이 이따위야.
왜 나쁜 놈들만 잘살면서 큰소리치고 선량하면 바보 취급이냐?
세상이 제대로 미친 거라면?
기꺼이 따라 주마.
진실이 거짓 되는 현실이 정말 억울해서 출세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들 위에 올라서서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픈 마음에 하루하루 이를 악물었다.
강천수 작가가 현대판타지 장편소설로『억울해서 출세했다』를 12권으로 완결했었다. 출판사는 이 책을 위와 같이 소개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세태를 꿰뚫는 촌철살인의 서평인 것 같아 인용해 본다.
곁들여, '촌철살인'이라는 말은 고대 중국 남송南宋에 나대경羅大經이라는 학자가 집으로 찾아온 손님들과 한께 나눈 담소를 기록한 수필집 『한림옥로』鶴林玉露라는 문헌에 나온다. '아주 작은 하나가 사물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비유였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짤막한 경구로 감동시키거나, 어떤 일의 핵심을 찌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서평에서 시사하듯 출세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그 출세는 강자와 약자라는 수직적 사회 구도를 전제로 한다. 그 속에 물질과 권세에 따라 질서가 형성되는 사회 분위기를 떠올린다. 한마디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논리가 지배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기성세대들은 기억할 것이다. 일찍이 1960년대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영화가 있었다. 또 지금처럼 노래방도 없던 시절 주막에서 젓가락 장단에 목청 돋워 부르던 <회전의자>라는 노래가 인기를 끌었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사람 없어 비워둔 의자는 없더라......" 이 가사는 "아~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라는 대목으로 끝을 맺는다. 이 노래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세태에 더 잘 들어 맞는것 같다.
관직의 회전의자는 비워질 새도 없이 정치적인 논공행상의 낙하산 인사로 채워진다. 전문성과 업무능력과는 상관이 없다. 그야말로 억울하면 출세를 해야 한다. 성공의 접근법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출세를 좇는 사람들이 독식하는 회전의자의 주인공은 이미 특정 인사들에게 점지되어 있다.
사회적 불공정이 사회 깊숙히 뿌리박혀 있는 대표적인 적폐다. 수많은 사회 리더들이 공정을 외치지만 체질화된 출세 폐습은 여전하다. 그러니 지금도 민생의 지탄거리가 되고 문학작품의 주제가 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나라는 전후 산업화로 급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물질과 권력이면 모든 것이 무소불위였다. 그 시대상이 출세라는 단어 속에 응집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 과거의 적폐가 3만 달러의 국민소득을 이루고, 글로벌 사회에서 세계 10위권의 선진화(?) 국가로 등극한 이 시점에도 여전히 횡행한다. 한번 굳어버린 출세주의라는 사회적 습관은 고쳐지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 갈수록 심화되는 정파 갈등, 겉과 속이 판이한 입발림의 잔치 등...모두가 과거 시대의 작태다.
신진세대는 성공가치의 주역
지금 크로노스의 시간은 디지털 첨단 세상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은 가진 것도, 질서체계도 없었던 먼 과거에 시점에 멈춰서 있다. 이건 말할 것도 없이 구세대, 아니 기성세대들의 탓이다. 그들이 수평의 가치가 요구되는 새천년의 신세계에서도 정신적으로 아직 옛 바지 저고리를 걸치고 활보하고 있어서다. 그러니 '억울해서 출세하겠다'는 자소 섞인 말이 아직도 유행어가 되어 있다.
이제는 신진세대들이 시대를 이끌어야 한다. 디지털 첨단시대의 주역은 젊은 세대, MZ세대다. 그들이 사회 모든 영역에서 트렌드를 주도하고 앱을 개발하고 프로그램을 발전시킨다. 패션이든 방송이든 레져든 사회문화의 '현상'을 만들고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
그들은 과거 시대와 근본적으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다르다. 그들은 출세에서 벗어나 성공을 바라본다. 나는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신진세대의 가치를 존중한다. 아니 시대의 트렌드 선도자요, 우리 사회 미래의 주역으로서의 그들을 존경한다.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그에 맞추어 이제 우리 사회에서 출세라는 단어는 고어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이 사회는 참다운 선진사회와 행복국가가 될 수 있다.
인생은 성공을 향한 마라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출세와 성공의 개념이 동일시 되는 세태다. 그런 가운데 나는 평범한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출세와 성공의 가치를 구분 짓자고 줄기차게 외쳐왔다. 설사 그것이 언어의 유희라 할지라도 선진 개념의 성공가치가 정착되어야 한다.
적어도 신진세대는 성공의 가치를 옹호하고, 그에 동화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기에 아직 기성세대가 주축이 된 과거와 현재는 출세의 패턴이 유지되지만, 현재와 미래는 성공의 패러다임으로 사회가 진보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미래는 희망이 있고, 비전이 넘친다.
출세.
이것은 누구나 이루고자 하는 꿈이요 목표다. 국어사전에 보면 ‘출세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해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세라는 골인점을 향해 100m 단거리 질주하듯 온힘을 쏟아 치달린다. 인생은 42.195km의 마라톤 경주인데도 사생결단으로 전속력을 다해 달려간다.
그러면서 모두가 다 출세라는 월계관을 쓸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서로 치받으며 달리다보니 자신이 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체 자신감을 잃고 삶의 활력이 고갈되어 버린다. 그리고 골인을 향해 달리다 지치고 퍼져버리면 세상을 탓한다. 이 사회에 갈등과 대립이 난무하는 이유다.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걱정거리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다. 힘든 직장취업, 치열한 사회경쟁, 빈번한 구조조정, 불안전한 노후생활 등으로 힘들다. 그 속에서 자신들이 꿈꿔 왔던 것들을 저버릴 때가 많아진다. 그러면서도 출세를 향해 뜀박질한다. 그래야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있다.
인간의 지향가치는 '행복한 삶'
출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쟁취하는 것이기에 출세하지 못하면 박탈감과 상실감에 젖어들게 된다. 달리 말해 행복을 내면적인 가치의 성공보다 외형적인 조건의 출세에 두다보니 그렇다. 경쟁에서 뒤지면 출세하지 못해 불행하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 행복이 출세가 아닌 성공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치를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곧 '행복한 삶'으로 규정했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 사람들의 행복도가 낮다. 그것은 물질적으로는 여유로워졌는데도 정신적으로 빈곤하다 것을 반증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이 세계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행복지수가 하위에 머물러 있는 이유다.『우리는 무엇으로 행복해지나』에서 교육부장관을 지낸 문용린 박사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지나치게 물질중심적이고, 이는 한국의 낮은 행복도로 나타난다.”
긍정 심리학 분야의 세계 권위자인 미국 일리노이대 에드 디너 교수도 지적을 했다. 에드 디너 교수는 한국의 행복도가 낮은 이유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에 치중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나 개인의 심리적 안정 등 다른 가치를 희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출세에 너무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나 개인의 취미 등과 같은 곳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등한시 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출세는 조선시대의 잔존물
우리에게 출세에 대한 관념은 뿌리가 깊다. 출세란 말이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 벼슬하는 것을 의미했다. 몸을 바로 세워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 그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유교사상의 입신양명이 곧 출세였다. 조선시대 그 말이 나타내는 바가 그대로 오늘에 와서도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고착된 것이다.
'관직'의 우리말인 '벼슬'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아무나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위치다. 전근대 신분제 사회에서 관직은 사회적 신분과 부와 명예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중앙집권적 관료체계에 속했다. 그런 개념이 지금도 사람들의 인식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몇 년 전에 한 정부 고위 관료의 입에서 그런 인식의 발언이 튀어 나와 논란이 된 적도 있었다.
그 특별히 선택된 자들만이 누리는 출세를 성공이라고 한다면 출세를 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단 말일까? 그건 아니다. 이제는 보편적인 성공이 주류 가치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