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성공이라 쓰고 출세라 읽는다
인생의 핵심가치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핵심가치로 삼는 것이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삶의 목적의식이 뚜렷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목표를 세우는 것에만 바쁘다. 정작 목적을 찾는 것에는 인색한 것이다. 내 인생에서 어떤 것을 해보겠다거나, 무엇을 이루어보겠다는 욕망은 누구나 갖는다.
그렇지만 주어진 인생을 꾸려가면서 '무슨 의미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이 사유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목표나 목적에 대한 의식이 없이 오늘 하루하루 오로지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주어진 일상 속에서 맡겨진 일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나 시간을 쏟아붓는다. 거기에서 안녕과 행복을 찾아낸다.
물론 매일매일을 낭비하지 않고 보람되게 보내겠다는 사람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다. 그것을 오히려 감사하면서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욕심과 욕망에서 자유스러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그것을 목표라고 규정짓기는 어렵다.
온갖 사욕에서 벗어나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긍정적이며 낙천적이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보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등 뒤로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물질을 탐내고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온전한 생명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오히려 그러한 인격체에게는 자기에게 합당한 최선의 기회가 다가오게 되어 있다. 그 기회란 남의 평가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과 여건에 가장 부합되는 인생의 선물이 된다. 그것은 그에게는 더없이 큰 축복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의식 과잉' 심리
그렇다면 성공은 목적을 갖는 삶의 방식이며, 출세는 목표를 쫓아가는 삶의 행태라 할 수 있다. 목적은 절대적이어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자기만의 흡족감이며 행복감이다. 반면에 출세는 상대적이어서 끊임없이 상대와 견주고 비교해서 우위에 서야만 충족된다. 목표로 세운 고지에 다다라야만 만족감과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성공과 출세를 가름하는 것은 바로 '자의식 과잉' 심리다. 자의식 과잉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를 때 나타나는 열등감, 강박감, 분열감 같은 현상이다. 성공을 꿈꾸는 사람은 이 자의식 과잉에서 자유스럽다. 하지만 출세를 노리는 사람은 자의식 과잉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게 주어진 값진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핵심가치를 성찰해보아야 한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수시로 점검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핵심가치는 내 인생학의 개론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각론에 가서는 나의 태도와 결정과 행동의 지침을 제공하게 된다.
이렇게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분명히 알게 될 때 그에 부합하게 충만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면 더없이 큰 내면의 성취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면 좌충우돌하는 삶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면 수많은 내적 갈등과 긴장감, 그리고 그릇된 습관과 소모적인 행동으로 뒷걸음치는 인생길로 들어설 수 있다.
출세 따라 강남 간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모두가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성공의 가치관이 바탕이 되는 문화체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출세하는 것보다 성공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출세와 성공의 단어조차도 다시 정립해야 한다. 왜 출세해야 성공을 했다고 하는가.
수직적인 보스십이나 헤드십을 구사하는 게 출세가 아니다. 수평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성공이 중심가치다. 많은 사회 리더들이 입으로는 리더십을 말한다. 하지만 입으로 리더십을 자주 내세우는 사람치고 진정한 리더십을 실천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말로는 리더십이지만 행동은 보스십이다.
여전히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를 거듭하는 데도 고질적인 출세주의가 판을 친다. 사람들은 그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고 주위야 어찌 됐던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에만 급급하다. 물질이 모든 것을 구분하고 판별하는 속된 기준이 되어 있다. 이러다 보니 초등학생의 미래 꿈이 임대사업자가 되는 거란다. 또 아파트의 크기나 자가용의 종류로 어린 아이들까지도 편가르기를 하는 서글픈 세태다.
지금은 출세를 향한 쏠림현상이 도를 넘고 있다. 모두가 다 일류 대학만 가려고 하고, 최고의 직장을 잡으려고 한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힘들고 힘든 최고만을 바라본다. 그 최고가 되어야 갑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을이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부와 명예라는 출세를 위해 맹목적으로 출세 따라 강남으로 줄달음치고 있다.
한국사회의 레밍효과
바로 출세 욕망에 빠진 한국사회의 '레밍효과'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레밍은 들쥐의 일종인데 몸길이가 3.5cm에 불과한 작고 귀여운 동물이다. 주로 핀란드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산악지대에 서식한다. 새로운 먹거리를 찾다가 해안 절벽에 도달하면 선두그룹의 대장은 용감하게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단다.
그 뒤를 따르는 레밍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대장 레밍을 따라 그냥 바다로 뛰어내려 단체로 물에 빠져 버리고만다. 자기의 주관도 없이 군중심리에 편승한 맹목적의 집단행동이다.
비슷한 의미로 이것을 '스템피드 현상'이라고도 한다. 한 마리의 가축이 놀라 우왕좌왕하면 주변의 가축 모두가 놀라 우르르 내달리게 된다. 이처럼 남들이 하니까 영문도 모르고 따라 하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네 모습이 그렇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거리낌 없이 오직 출세만을 위해 달려간다. 오로지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다. 이기는 자만이 승자독식의 영광을 누린다는 것을 체득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승자들만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치켜세워진다는 것을 어릴적부터 가르쳐 왔다.
내가 진정할 수 있는 것, 내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 것, 내가 진정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이룰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다.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쥐떼처럼 좌우 돌아볼 여유도 없이 줄달음치는 것에만 익숙해 있다. 그러다 보니 축복이 넘쳐야 할 인생길을 출세 하나를 위해 힘겨웁게 뛰어가고 있다. 바로 곁에 두고 누려야할 안녕감well-being이나 행복감은 언제나 저 멀찌감치에 버려두고서 바라다만 본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어느 외국 웹 사이트에서 재미있는 비교를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해온 역사를 1년으로 상정해서 거기에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시간을 대비해 놓았다. 1년을 초로 계산하면 31,536,000초가 나온다. 그러고는 사람이 요즘처럼 장수시대가 돼 100세를 살아간다고 치면 단 3초에 불과하다.
어떻게 보면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삶은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다가 퇴장하는 시시한 배우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며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요, 쉬 지나가 버리는 하루와 같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짧은 인생의 여정에서 오로지 출세의 고지만을 오르기 위해 헉헉댄다.
모든 것을 내버리고 힘겨워하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린다. 그러면서 시기와 투쟁과 갈등으로 한 평생을 보내며 세월이 흐른 뒤 뉘우치며 한탄한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권세나 부귀영화가 영원할 것 같지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을 수없이 접하면서도 말이다.
롱펠로우의 '인생 예찬'
그래서 중국의 한 현인은 인간의 삶을 뒷 발음이 비슷한 음절의 같은 운이 들어가는 압운押韻 기법을 써서 세 마디로 요약했다. 곧 'hurry'서두름, 'worry'걱정, 'bury'묻힘이다. 정말 인생의 과정을 의미있게 정리했다.
이런 가운데 모두가 출세라는 정상의 정복을 노리지만 그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다. 왜 사람들은 엄홍길 대장같이 특수훈련을 받은 등반가여야만 오를 수 있는 희말라야 고봉 14좌만을 바라다볼까.
에베레스트 8,848m 그 높은 봉우리에 태극기를 꽂는 것만을 출세라고 여기는 것일까? 왜 누구나 정복할 수 없는 그 높다란 목표의 출세라는 얼개에서 벗어나지는 못할까? 좀 더 여유를 갖고 세상을 본다면 또 다른 깨달음이 있고 새로운 희망도 있을 텐데···.
"···가끔은 흔들려 보며 때로는
모든 것들을 놓아본다.
그러한 과정 뒤에는
소중한 깨달음이 온다.
그것은 다시 희망을 품는
시간들일 텐데.
다시 시작하는 시간들 안에는
새로운 비상이 있네···."
- 롱펠로우의 《인생 예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