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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지현 Sep 20. 2023

도마뱀, 12

열 겹

  연인이 생겼다. 세 살이 어린, 눈웃음이 귀여운 여자였다. 직장 동료의 소개로 충동 반, 두려움 반으로 마주한 그녀는 박장대소를 할 때를 제외하면 소리없이 웃는 모습이 제법 사랑스러웠다. 세 번째 데이트를 하던 날, 헤어진 연인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헤어진 지 꼭 일 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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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동기를 통해 전해들은 그녀의 소식은 헤어진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놀라울 것이 없었다. 푸근하고 무던한, 한 살 연상의 직장 동료라고 했다. 그녀를 아주 오랫동안 짝사랑했고, 나와 헤어지자마자 불도저같이 그녀에게 돌진해 반 년간 공을 들여 연인이 되었다고. 그리고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결혼을 준비해서 이 달에 결혼을 한다고 했다.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녀를 공주처럼 떠받들며 친구들에게 청첩장 돌리는 자리마다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고, 그녀가 예뻐 어쩔 줄 모르는 아주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낯을 가리면서도 그녀를 위해 그녀의 친구들 앞에서 밝은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녀를 살뜰히도 챙기는 것이 참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했다.


  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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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로 만난 여성과 세 번째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바래다주던 길, 그녀가 물었다. 우리 무슨 사이예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 가만히 웃었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그녀는 빤히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대로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여자가 웃으며 다음에 보자고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휴대폰으로 주변 검색을 했다. 200m 거리에 여덟시 반까지 영업을 하는 꽃집이 있었다. 시간을 보니 여덟시 이십팔 분이기에 나는 숨을 살짝 들이켰다. 지도에서 표시하는 방향으로 걸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려 의식했다. 최선을 다하고 싶지는 않으나, 내게 주어진 길이라면 거부할 의지는 없으니 나는 그저 걸었다.





  익숙치 않은 동네에서 가볍게 헤멘 탓에 내가 가게에 도착한 것은 여덟시 반을 3분 넘긴 시각이었다. 놀랍게도, 아직 등이 꺼지지 않았다. 조심스레 가게로 들어서니 분주하게 정돈을 하는 중년 여성이 보였다. 누가 보아도 영업을 종료하고 있는 품에 슬그머니 몸을 돌리려니 커다랗게 어서 오세요! 하는 외침이 들렸다.





  아이구! 잘생긴 총각이 이 밤에 꽃 찾을 데가 여기 말구 또 어디 있다구 그냥 가려구 그래. 들어와요, 와서 보고 가요. 누구 줄려구, 여자친구 줄려구?





  요란한 목소리에 그냥 가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이 꽃은 어떤 꽃이고 저 꽃은 꽃말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줄줄줄 읊었다. 솔직히 귀에 들어오지 않아 적당히 주변을 둘려보니 구석에 포장되어 있는 두 개의 꽃다발이 보였다. 그 중 조금 더 큰 것을 가리켰다.





  저걸로 주세요.

  총각, 젊은 사람이 센스가 아주 좋네.





  아주머니의 너스레를 들으며 내 몸통의 반 만한 꽃다발을 안고 카드를 내밀었다. 어떻게 가게를 나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방금 바래다 준 그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왠지 모를 쑥스러움이 온 몸을 덮쳐왔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느낌에 주변을 급히 두리번거렸지만 애매한 저녁때의 주택가에는 다행으로 사람이 적었다. 그래도 벽 쪽에 붙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겨 걸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헤어진 연인에게 꽃 선물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일 년만에 우리의 헤어짐의 이유를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여보세요, 승연 씨? 미안한데 집 앞으로 다시 나와줄 수 있나요?





  집에 데려다 놓은 지 십 분이 족히 넘었는데도 쏜살같이 뛰어내려온 그녀는 들어갈 때와 다를 것 없는 상태였다. 가로등 빛을 받아 유난히 흰 피부에 발그레한 뺨이 고와보였다.

  꽃다발을 내밀자 그녀가 소리없이 웃으며 받아 안았다. 꽃은 그녀의 품에 안기자 훨씬 크고 예뻤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진해졌다가 저편으로 가려진다.





  우리, 내일부터는 애인으로 만날까요?





  함빡 입을 벌리고 웃는 그녀의 얼굴이 무언가에 겹쳐졌다가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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