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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지현 Jan 03. 2024

도마뱀, 27, 끝

생을 보내며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매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주름의 깊이처럼 내가 새로이 알게 된 것이 있다.


  나는 도마뱀이 아니다.





  내가 탈피하며 지워냈다 여긴 모든 상처들은 모두 여전히 나였다. 내가 버렸다 생각한 껍데기들은 여전히 온통 나를 뒤덮고 있었다. 흔적을 지워내려 삼켜버린 껍질들은 말할 것도 없이 나였다. 덜겅 잘려 보냈다 여긴 꼬리마저도, 사실 원래부터 내가 가진 적이 없던 것이었다. 나는 그냥 인간이다. 나는 정말로 도마뱀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인간이었다.

  어느 순간 탈피하지 않는 나의 살갗을 쓸며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상처가 있어야만 탈피하는 것은 진정한 탈피가 아니다. 깨닫고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종종 오래도록 어린 시절에 잠 못 들고 명치가 아기주먹만큼 시큰대고 아픈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 일들은 왜 나를 웃고 울게 하는지. 그것은 내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탈피한 적이 없는, 온전히 상처들을 흉으로 간직한, 다른 애정으로 그것을 덮어 보이지 않게 만들어두었을 뿐인, 아주 평범한 인간.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목이며 허리가 굽고 펴진 노인이었다.


  아주 다행이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도마뱀이 아니라는 사실을 젊은 시절에 알았더라면, 어쩌면 나는 과거의 상처를 되짚으며 이미 지난 고통을 되짓이기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딱지가 생기는 족족 긁고 잡아 뜯어 아물지 못하게 헤집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상처가 여전히 내 표피 양쪽을 갈라놓고 있다는 생각에 모든 순간을 좌절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의 나는 어떠한 상처도 내게 남아있을 수 없다 여기는 편이 좋다. 그때의 내가 잘 극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편이 지금의 내게는 더 즐거운 일이니까.





  자, 이제 나는 늙고 지친, 때로는 내가 아닌 내가 되는 한 마리 늙은 인간이다. 부모가 한 명인 적도 있었고 두 명인 적도 있었으며, 그랬다가 도로 한 명이 된 적도 있었고 그마저도 설탕을 손에 쥔 채 물에 손을 담갔다 뺀 양 잃었던 적도 있었다. 손에 남은 끈적함이 나를 위로하기도 했었으니 나의 삶은 자세히 살펴보면 도무지 혼자였던 적이 없었고, 외로울 틈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늘 외로웠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나는 한 사람과 결합하여 두 사람을 낳았고 두 사람이 두 사람을 불러 네 사람을 이루었으며 네 사람은 또 여덟 사람이 되어 빈 적 없는 빈자리를 채워 들었다. 얼굴들을 떠올리며 나는 미소 지었다.





  나이가 들면 도무지 좋은 일이 없을 줄로 알았는데, 딱히 좋은 일이 없어도 나는 늘 즐겁게 되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나를 지키는 듯 나는 두려움이 없고, 내일 당장 죽어도 딱히 남길 말이 없을 만큼 나는 미련이 없다.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아도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맞이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손에 쥔 것과 이미 지나쳐온 것을 구분하는 것도 아주 즐거운 일이다.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기쁨이 이미 삶을 가득 따른 잔에 덧씌워져 넘치는 것까지도 즐거움이 아닐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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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는 말했다. 내가 저보다 먼저 떠났으면 좋겠다고.


  남겨지는 것은 물론 무섭고 두려운 일이라 먼저 떠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는 하지만, 남겨질 나를 보면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했다. 그때까지도 아내는 여전히 내가 설거지를 하고 난 개수대를 매번 다시 행주로 훔쳐내고는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좋았던 것 같다. 설거지하는 내 뒤를 지키고 선 아내가, 타박하지 않는 듯 매번 타박을 하는 아내가 왠지 푸근했다.





  아내에게서는 종종 우리 어머니 냄새가 났다. 뜨끈하고 축축하고 부드럽고 뭉근한 체취, 가끔 그 위로 덧씌워지는 파와 마늘 냄새, 가끔은 큼큼하고 매콤한 냄새가 났다. 나도 아내가 먼저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차피 아내가 없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 아내가 먼저 떠나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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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가 떠나고도 나는 7년이나 홀로 살았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구순을 목전에 두고 떠나셨고, 아버지는 그보다 일곱 살이 많은데 같은 해에 가셨으니 나도 명줄이 짧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이들이 함께 지낼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나는 내가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어느 날 갑자기 홀로 떠나게 된다면, 외롭고 외로울 것이나 그마저도 나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머지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버지가 왜 어머니와 함께 사셨던 그곳을 홀로 지키셨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어머니가 나를 낳고 길러내고 아버지와 함께 삶을 보낸 그 집을 나는 홀로 종종 떠올렸다. 혓바닥이 달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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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피하던 때가 그립다. 내 몸이 흠 없고 깨끗하다고 말하던 그때가 그립다. 심장을 찌르는 고통조차 꼬리를 떼어내고 나면 문제 없다 여기던 그때가 자꾸만 사무치게 그립다. 인간이 되어 살아가는 삶은 자꾸만 자꾸만 나를 세상으로 끌어내린다. 나는 혼자서 태어나 혼자서 자라고 혼자서 죽어간다. 이 고통은 나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나의 몫으로 아무리 누가 나를 안고 울어주어도 달래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그랬더랬지, 너는 혼자서 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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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인 것은 종종 내게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 자유함, 시원함, 얼음 덩어리를 삼킨 듯 명치께가 뻥 뚫린 황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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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도마뱀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나는 도마뱀이니 언젠가 죽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다가오고 있을 뿐이며 두려움으로는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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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의 가치를 쓸모로 재단할 수는 없으니 나는 그런대로 어떤, 자격을 갖추었다. 어떤 자격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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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의지한 대로 일어서고 말할 수 없게 된 지 얼마큼이 지난 지 알 수 없다. 죽음이 나의 곁에 섰음을 깨닫는다. 외로운 삶이었으나 기묘하게 따스했음도 깨닫는다.


  어디선가 아내의 향이 난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아내의 손이 차다. 아내의 손은 대체로 늘 차가웠다. 연애하며 처음 손잡았던 그 초겨울 밤도, 결혼식날 장인어른을 끌어안은 후 아내의 손을 넘겨받았던 날도,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던 날도 아내의 손은 차가웠다. 괜찮았다. 나도 늘 손이 차가웠다.


  차가운 손도 꼭 붙들고 있으면 따스해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차가운 손은 온기를 나누고 제법 뜨끈해진다. 외로움이 그득 부대끼는 내 삶이 따스했던 것도 그 때문일까....... 부옇게 보이는 아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순 몸이 가벼워진다. 나는 죽는다. 의외로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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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한 마리 도마뱀이었던 한 인간의 회고록이다. 차가웠던 것도 뜨거웠던 것도 말랑했던 것도 단단했던 것도 모두 나였다. 사람에 상처받아도 사람을 믿을 수 있었고, 사랑에 고통받아도 다시 사랑할 수 있었다. 살아가는 동안 이루지 못했던 일이 이루었던 일보다 분명 많을 텐데, 왠지 이루지 못한 것이 없는 것마냥 후회 없이 발길을 뗀다. 변덕이 심한 나라 한 걸음 떼자마자 뒤를 돌아볼지도 모르지만, ......괜찮다. 그조차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두 걸음과 세 걸음까지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테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떠난다. 가볍고, 가볍고, 가벼운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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