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버티어나가자'라는 말을 좋아한다.
삶이란 버티어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허지웅 작가의 신작 <최소한의 이웃>이 나왔다는 알림을 보았습니다. 덕분에 전에 읽었던 그의 에세이<살고 싶다는 농담>이 떠올라 리뷰를 남기기로 했습니다.
허지웅 씨를 처음 알게 된 건 <마녀사냥> 방송에서였는데, 사실 처음엔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샤프한 인상에, 시크하게 툭툭 던지는 말이 따뜻하기보단 약간 차갑게 느껴졌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 이 분이 악성 림프종(혈액암)을 진단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시간이 좀 지나 항암치료를 하고 복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어떻게 지내다 왔을까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글로써 그를 처음 만나보게 되었던 책입니다.
목차
목차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삶이 바닥으로 주저앉을 때)
삶의 바닥에서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바닥에서 일어나기)
다시 시작한다는 것 (다시 시작하기)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천장과 바닥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천장은 머리끝에 있고 바닥은 발끝에 있다. 둘 다 살면서 당연하게 스치는 공간이다. 그러나 막상 그게 뭔지 실감하게 되는 일은 많지 않다.
바닥이 있어야 세상이 땅 밑으로 꺼지지 않고 천장이 있어야 세상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지 않을 테니 천장과 바닥은 언제나 고맙고 필요한 내 편 같았다. 천장이 내려앉고 바닥에 뒹굴기 전까지는 말이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온다. 퀭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누워 천장이 천천히 내려와 내 몸을 눌러오는 것을 느끼고 꼼짝없이 잠을 설치며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잔인한지 알게 되는 날. 바닥에 뒹굴어 뺨이 닿았을 때 광대 깊숙이 울림을 느끼며 그게 얼마나 딱딱하고 차가웠던 것인지 깨닫게 되는 날이 말이다.
-<천장과 바닥>, 37p
첫 번째 파트에서 저자는 림프종으로 인해 삶의 바닥을 보았던 본인의 경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로 다시 살기로 결정하는 마음을 먹는 과정을 솔직하게 풀어냅니다.
주저앉는 것이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담담한 그의 이야기는, '생명은 소중합니다' 따위의 듣기만 좋은 빈껍데기 위로보다 훨씬 마음에 먹먹하게 와닿습니다. 차가워 보이던 인상과 달리, 글 속에서는 의외의 따뜻한 모습이 있네요.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 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중략)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 57p
어떤 불행한 상황에 처하면 과거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게 문제였나? 저게 문제였나?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여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머릿속에 되뇌고 자신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물이 엎질러졌으면 닦아야 합니다. 누가 왜 어떻게 엎질렀는지를 탓하는 걸 먼저 할 것이 아니라요. 그런다고 해서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알면서도 늘 잘 안되는 일인데, 글을 읽으며 한 번 더 마음에 새겨봅니다.
"악성림프종 진단을 받았습니다. 혈액암의 종류라고 합니다. 부기와 무기력증이 생긴 지 좀 되었는데 미처 큰 병의 징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확진까지 이르는 요 몇 주 동안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리 약속된 일정들을 모두 책임지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촬영까지 마쳤습니다. 마음이 편해요. 지난주부터 항암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함께 버티어나가자'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삶이란 버티어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마음속에 끝까지 지키고 싶은 문장 하나씩을 담고, 함께 버티어 끝까지 살아냅시다. 이길게요. 고맙습니다."
'이길게요'의 마지막 모음이 동그랗게 말린 입술 끝에서 아직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는 벌써 침상 위에서 방금 분명히 잠들었던 것 같은 고양이마냥 펄떡거리고 있었다. 아팠다. 모르핀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어찌 됐든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에 관한 이야기 따위를 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17p
삶의 바닥에서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끝까지 버티고 싸우되 피폐하고 곤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선의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며 서로를 도울 것. (중략)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모르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스스로 구제할 방법을 찾는 사람들에게>, 163p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우고 증오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서로 도움으로써 바닥에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참 맞는 말입니다. 저 또한 혼자 잘 살기 위해 투병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으로 고통받으며 삶을 의심하게 되었을 때, 끝끝내 손을 붙잡아 준 것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쳐 바닥에 널부러진 저를 안아준 것도 결국엔 사람이었습니다.
병들고 흠집난 제 생명의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너무 많이 받았던 마음을 돌려주고, 이를 넘어 조금이나마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면 부족한 저도 제 가치를 찾겠지요.
혼자 살아남으라고 등을 떠미는 차가운 세상 속에서, 인간의 '사람인' 자는 서로에게 기댄 모양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불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낙심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관과 다르다. 오히려 삶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주도하겠다는 의지다. 이는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준다.
-<불행을 동기로 바꾼다는 것>, 257p
다시 시작하려면 먼저 현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자는 이 챕터에서 불행을 받아들이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자신은 그저 순진한 피해자로서 불행한 사람'이라는 헛된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현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행이란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삶과 함께 있는 것이니까요. 배우 박신양 씨도 비슷한 말을 했죠. '나의 힘든 시간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느낀 점
이 책엔 허지웅 씨가 어떻게 항암을 이겨냈느냐는 성공신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병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도 없고요. 그냥 그가 왜, 그리고 어떻게 살기로 마음먹었는지에 대한 고백과 다짐입니다. 병이란 그저 하나의 배경 사건이었을 뿐이지요.
저도 희귀난치성 질환을 처음 진단받았을 때, 세상에서 제가 제일 불행한 사람 같았습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나이에 덜컥 거대한 벽을 마주했으니 좌절스러웠지요. 그러나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인생의 짐 하나 지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들 묵묵히 짊어지고 걸어갈 뿐이었어요. 점차 그렇게 현재를 받아들이며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떠올리며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꼭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떤 피치못할 사건으로 인해 벼랑 끝에 내몰린 분들께 큰 위로가 될 책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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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으면 좋을 글>
https://blog.naver.com/vege_bab/22259559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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