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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D 미식가 Jul 25. 2023

[미술의 맛] 자유의 여신이라고 하면 안되는 이유?

들라크루와는 인물들의 모자를 통하여 그들의 신분을 표현했다.


세계의 보물 같은 미술품 38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비롯해, 밀로의 <비너스>,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등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유독 프랑스인에게 있어 상징적인 작품은 다름 아닌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 일 것이다. 지난 2012년 루브르 랑스 개관에 1호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도 <민중을 이끄는 자유>였다. 7월이면 생각나는, 프랑스 7월 혁명과 관련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가 오늘의 이야기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는 들라크루아가 1830년 절대왕정 복원을 꿈꾸던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루이 필립이 왕위에 오르면서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마련하는 프랑스 7월 혁명 당시 ‘영광의 3일’을 표현한 작품이다.


중요한 시대적 사건을 표현하는 역사화로 가로 260cm, 세로 325cm의 대형 그림이다. 큰 그림은 관객에게 그림의 주제를 더욱 장엄하고 숭고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들라크루아도 대형 화면을 통해 7월 혁명의 생생한 분위기를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림은 '피라미드' 구성의 형태이다. 한 손에는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장총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유’를 의인화한 프리지아 모자를 쓴 중앙의 여성이 중심인물이다. 배경의 오른쪽 '노트르담 (Notre Dame)의 탑'은 봉기가 일어나는 시대적 장소가 파리임을 나타내고 있다.

들라클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 캔버스에 유채,260x325cm,1830, 루브르

<‘민중을 이끄는 자유>를 그릴 당시, 들라크루아는 이미 프랑스 화단에서 낭만주의의 리더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혁명이 시작되면서 프랑스를 통치했던 절대 군주제는 무너지고, 사회는 완전한 변화를 맞았다. 노동자와 중산층 등의 사회 참여 요구는 확대되었고, 이런 경향은 미술에서 개인의 상상력과 감정을 중요시하는 새로운 낭만주의를 탄생시켰다.


'자유의 여신’이 아니라 ‘자유’(Liberty)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중심인물은 화면의 중앙에 있는 건강한 여성이다. 일반적으로 ‘자유의 여신’으로 의역하지만, 그녀는 여신이 아니라, 프랑스의 ‘자유’를 상징하는 의인화된 인물 ‘마리안느’다.

삼색기를 든 마리안느

마리안느는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 공화정의 국가적  의인물이다. 프랑스의 시청과 법원 같은 정부 청사나 주요 광장, 그리고 동전이나 우표로 발행될 정도로 프랑스 정부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마리안느’는 당시 여성들의 가장 흔한 이름인 ‘마리’와 ‘안느’를 결합하여 만든 이름이라는 설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그녀는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의 상징이며, 이런 이유로 들라크루아는 ‘마리안느’를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림의 중앙에 배치했다.

누워있는 인물의 옷의 색깔과 삼색기의 색깔이 일체감을 보여줌(좌)                    프랑스를 위하 자유 포스터의 마리안느(우)

바로 위의 왼쪽 그림에서 바닥에 누웠다 일어서려는 남성은 사선으로 삼색기를 든 여성과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데, 남성이 입고 있는 옷의 색상이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와 묘한 대응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혁명의 성공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누워있는 남성의 옷에서 시작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으로 이동시키는 효과를 통해 작가는 밑으로부터 일어나는 혁명의 열기를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른편 이미지는 1940년에 발표된 “프랑스를 위한 자유" 포스터에 있는 마리안느다. 삼색기와 함께 마리안느는 붉은 모자를 쓰고 있다. ‘프리지아’로 불리는 이 모자는 일명 ‘자유 모자’라고도 한다. 후기 공화정 로마시대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상징이었으며, 프랑스혁명 당시 왕정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표식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들라크루아는 빨간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민중을 이끄는 마리안느를 그림의 중심에 두었다. 바로 그녀가 쓴 모자가 삼색기와 더불어 자유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빨간 ‘프리지아’는 파리의 노동자와 중산층의 혁명적 열정과 연대를 표시하는 것으로, 당시 죄수들에게는 빨간 색깔의 모자 착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마리안느는 흔히 삼색기로 불리는 프랑스 국기와 나란히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프랑스혁명 당시에 흰색, 빨간색, 파란색 표지를 모자에 붙이고 자유, 평등, 박애를 외쳤는데, 이 표식이 프랑스 국기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어 자유(Liberté)나 프랑스 공화국을 la France, la République로 여성관사로 표기하는 것도 ‘마리안느’와 관련된 것이라 하겠다.


작가는 모자를 통해 신분을 표현했다

마리안느의 ‘프리지아’ 모자가 자유를 상징하듯이, 들라크루아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자를 통하여 그들의 신분을 표현했다.

그림에서 중심에 있는 여성 마리안느의  왼쪽에 두 명의 남성이 등장한다. 먼저 높은 모자를 쓰고 양복을 입고,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장총을 든 남성이 보인다.

 작가는 이 인물을 신흥 중산층을 대표하는 부르주아로 표현하고 있다. 높은 모자를 쓴 남성이 시위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들라크루아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으나, 이는 정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도 아래 두 이미지를 비교해 보면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그림속 긴모자를 쓴 남성(좌)                                                         들라클루아의 자화상(우)

위의 왼쪽 그림을 보면 장총을 든 남성 사이로 맹렬한 눈빛의 남성이 보인다. 반면 부르주아 남성의 눈빛은 다소 놀란 듯한 눈빛으로 보인다. 신분에 따라 시위를 대하는 감정을 나타냈을 것으로 보인다.


위의 그림에서 남성은 권총을 허리에 차고, 칼을 든 채 건강한 남성의 풍모를 가지고, 머리에는 베레모처럼 생긴 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칼은 원래 프랑스 보병들이 사용하던 칼을 빼앗아 든 것으로 생각되며, 빨간색 자유주의 리본과 멜빵바지를 입은 모습은 공장 노동자의 신분임을 짐작케 한다.


양손에  권총을 들고 모자를 쓴 소년(좌)                                            학생용 팔루슈(우)

마리안느의 오른쪽에 있는 소년은 불의에 맞서고 희생을 무릅쓰는 젊음의 함성을 상징한다. 당시 프랑스 학생들은 검은색 벨벳 베레모(또는 팔루슈)를 착용하고 어깨에 걸치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고 하나도 아닌 두 개의 권총을 들고서 싸울 것을 촉구하는, 가장 극적인 모습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오른쪽의 당시 학생용 모자인 팔루슈와 그림 속 소년의 모자를 보면 소년이 학생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년이 학생이 아닌 어린 노동자라는 주장도 있다.

쓰러진 왕실군의 시신옆으로 화려한 찰모가 보인다.

그림의 하단에는 쓰러진 군인 복장을 한 남성의 머리 옆에는 왕실군을 상징하는 화려한 철모가 놓여있다.

무너진 왕권을 상징하고 있다.


이처럼 ‘민중을 이끄는 자유’에서 등장인물의 모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동시에 이질적 계층의 사람들이 신분을 초월해서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들라크루아는 부르주와와 노동자, 어린 학생과 여성까지 모두 일체가 되어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모습을 역사화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림의 구도가 ‘마리안느’의 머리를 중심으로 피라미드 구도로 되어 있는 것도 등장인물들이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바리케이드와 노트르담

들라크루아는 7월 혁명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림을 통해 그들의 용감함을 찬양하고 있다.,

오른편 바리케이드 나무에 선명하게 표시된 1830

위의 그림 오른쪽에 막대기 모양의 바리케이드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1830년이라는 붉은 글씨가 보인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이끌고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는 왕궁으로 향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바리케이드’는 중요한 상징이다. 바로 권위주의와 왕실의 표식이며, 민중에 대한 억압의 도구이자 구체제로 설정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들라크루아는 원래 이 그림의 제목을 ‘바리케이드 장면’이라고 명명했다. 그럴 정도로 바리케이드는 이 그림에서 중요한 장치이다.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사인과 연도를 표기하며 무너진 구체제를 증명하고 있다.


그림을 그릴 당시 그가 형제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근대적인 주제, 바리케이드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비록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나는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것이다"라고 썼다.

구체제의 붕괴를 간절히 바란 뜻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열정적인 마음을 담아 3개월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왼쪽 상단의 끝 노트르담 성당에 희미하게 보이는 삼색기

또 하나의 상징은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시위로 인해 도시를 뿌연 안개가 자욱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불확실한 승리에 대한 복선적 성격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지만, 노트르담 대성당에 보일 듯 말 듯 펄럭이는 삼색기는 민중들의 승리를 확인하는 상징이다.


왜냐하면 노트르담 대성당은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을 집전했던 장소로, 이곳에서의 삼색기 등장은 자유를 향한 7월 혁명의 승리를 의미하며, 공식적인 공표의 대표성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사를 쓴 곰브리치는 들라크루아에 대해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배출된 위대한 혁명가로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지닌 복잡한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들라크루아는 당시 미술의 질서인 신고전주의의 정확한 묘사와 선을 거부했다. 반대로 색과 상상력을 지향하며 새로운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성취하려 했다. 바로 낭만주의로의 지향이다.


들라크루아가 기존의 왕정을 타파하고 7월 혁명 당시 자유의 승리를 찬양하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를 그렸듯이, 그는 미술에서도 기존의 관습과 체제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색과 상상력으로 새로운 미술세계인 낭만주의를 발전시킨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는 것은, 지금의 프랑스 국가 정체성을 나타내는 자유의 함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혁명가의 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 아래 그림은 '웃음'으로 유명한 중국의 위민준이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에 영감 받아 그린 그림이다.

Yue Minjun, Freedom Leading the People, 1995-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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