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기록 ‘루틴’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언니! 내가 원했던 게 이거잖아, 이게 포트폴리오잖아

by 김하비



'루틴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루틴이 없는 인생을 지속해 왔는데, 이유는 루틴 때문에 내 새로운 경험에 한계를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해진 루틴을 해야 하는 시간에 갑자기 다른 영감이 떠오른다면, 당연히 루틴이 아닌 영감을 쫓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루틴을 만들지 않은 데에는 나의 장점이자 단점인 '완벽주의'도 영향을 미쳤는데, 어떤 일을 고려할 때 '일상 중에 잠깐 짬을 내서 한다'든가, '가능한 만큼만 조금 한다'든가 하는 방식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한다면 제대로, 집중해서,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시간을 비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시간을 쏟은 만큼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시작 전에 생각만으로도 질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 겹 더 솔직해지자면 게으름의 탓이 가장 컸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별 고민 없이 즐겁기만 한 일을 하면서 쉬고 싶은 마음이, 뭔가를 해보고자 했던 마음을 이긴 날이 많았다.










나에게는 ‘루틴'하면 '기록'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같이 연상된다. 채무감을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는 루틴 분야가 기록인가 보다. 일기나 에세이 쓰기 같은 것, 관심 분야에 대해 기록하는 것들.


요새 퇴사 후에 여유가 생겨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내가 오래오래 소중하게 여겨왔던 것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게 생각보다 더 큰 문제라고 느껴졌는데, 단순하게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기록된 것이 없다 보니 오래된 일부터 하나씩 기억에서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으로 남아있는 공연장. 그날 분명 굉장한 감동에 눈물을 글썽였던 것 같은데, 날 울렸던 가수의 멘트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감정이 건어물처럼 바싹 마른 오늘의 내가 멀뚱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기록이 없으니 내가 한 진짜 경험까지도 추측하게 된다.


더 아차 싶었던 부분은 10년이 넘게 쌓아온 내 커리어 및 관심분야에 대한 진심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나 포트폴리오가 중요한 시대에, 이렇게나 포트폴리오를 잘 쌓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저는 이 분야를 굉~장히 오래 좋아해 왔습니다. 그 증거는?...... 누구보다도 두근대는 저의 심장입니다!!! 리쓴투마헐빝!"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퇴사 후 시간이 많아졌다는 구실로 늦게나마 주기적인 기록을 시작했다. 가장 오래 좋아했던 것들에 대한 내용부터 블로그에 하나씩 쌓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기록을 하기로 정했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그 활동이 끝난 후에는 무조건 리뷰를 쓴다'라는 방식으로 두 가지 루틴을 정했다.



제 열정이 들리시나요?




꾸준하게 기록을 하기 시작하면서 또 한 가지 느낀 점은 '내가 이것들을 정말 깊이 좋아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블로그에 무언가 기록을 하려면 내용이 필요하다. 물론 '좋았다.'같은 납작하고 짧은 감상만 기록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든 블로그도 공개된 글이기 때문에 기록 대상에 대한 설명을 어느 정도는 같이 작성할 필요가 있다.

설명을 작성하려고 하니 두 가지가 필요했는데, 하나는 '객관적인 현상에 대한 분석'이고, 두 번째는 '그 현상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이렇게 기록까지 하게 되었는지'라는 개인적 감상에 대한 코멘트였다. 현상 분석을 하려고 하니 공부가 필요했고, 코멘트를 쓰려고 하니 내가 '왜' 그게 좋은지, 혹은 싫은지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 '좋아함'에 깊이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맛있으면 '존맛'이라는 단어로, 감동적이면 '대박', '미쳤어'라는 단어로, 놀라우면 '헐'이라는 단어로 대부분의 감상을 축약시켜 왔다.

머리와 마음속에는 분명한 호불호의 이유가 있었지만, 정리된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니 모든 감정이 나 자신의 기억 속에서까지도 '헐..'과 '미쳤다'로만 남게 된듯했다.


'대박인 하루였다.'를 백일동안 쓴다고 해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데 말이다.

지금껏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대박 좋았다.'만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긴 분량이 아니더라도 ‘왜’가 있는 기록을 꾸준히 쌓아가 보려 한다.

생각과 이유가 담긴 글이라면 언젠가 분명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더욱 깊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꼭 당장 내가 하고 있는 직무와 관련이 없으면 어떻겠는가.

좋아하는 대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취향이나 적성을 발견할 수도 있고, 반대로 좋아한다고 느꼈던 것이 실은 실체가 없음을 깨달을 수도 있다.


세상을 더욱 건강하게 살아내기 위해 나를 알아야 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거기에 이만한 수단이 없는 것 같다.


역시 다들 루틴, 루틴 하는 이유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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