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도저히 이 비를 뚫고 불편한 교통편을 무릅쓰고 올 거라고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박하게 약속을 취소한다 해도 수긍이 가는 그런 상황이라 나는 재차 카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나에게 온 제이미 선생님의 메시지는 베니스몰에 도착했는데 화장실이 급하니 들렸다 오겠다는 것이다. 고맙기도 놀랍기도 했다.
사실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혹시나 서로 얼굴을 까먹고 결국은 못 만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는데 먼저 나를 알아본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눈에 초점을 맞추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하는 제이미 선생님의 얼굴이었다. 우린 어색한 서양식 허그로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이미 훌쩍 커버린 대니의 얼굴을 보더니, 많이 컸다며 신기해했다. 그러고는 커다란 쇼핑백을 나에게 건넸다. 필리핀 전통 오트밀 과자와 puto가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이 비를 가르고 찾아와 준 것만으로 감동인데 선물까지 준비해 준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아무것도 손에 들고 오지 않았던 내가 조금 부끄러웠고, 미안한 마음에 당연히 대접할 점심이었지만 더욱 생색을 내어 맛있는 점심을 사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필리핀 로컬 음식을 먹어보려 해산물 요리가 유명한 fish co라는 음식점으로 향했다. 우리는 필리핀 대표 음식인 '시니강(sinigang)'을 주문했다. 각종 채소와 고기를 함께 끓여 만든 물기가 자작한 스프다. 보기에는 평범한데 국물 맛이 시큼해 깜짝놀랐다. 그 신맛은 타마린드라는 열매 때문이란다. 간혹 타마린드 대신에 라임이나 레몬을 쓰기고 한다. 조리법, 생김새, 맛 모두 우리의 김치째개와 비슷하다. 김치에 돼지고기를 넣고 푹 끓이기만 하면 맛있는 김치찌개가 완성되듯이, 시니강도 각종 채소와 고기(혹은 생선)을 넣고 끓이다가 신 맛이 나는 타미린드를 추가해서 완성한다. 채소와 고기에서 우려낸 육수는 인공조리료 없이 감칠맛과 깊은 맛을 내게 되는데 거기에 신 맛을 추가하면 맑은 김치찌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김치째개에 익숙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시니강을 좋아한단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오묘한 시니강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대니는 한 입 맛을 보고는 얼굴을 확 찌푸렸다.
대니와 같은 나이는 새로운 음식에 적응하기 애매한 나이다. 어느 책에선가 태어나서 10년 동안 먹은 음식이 평생을 결정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10살 언저리까지 접했던 음식을 주로 평생 먹는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그런데 20살 언저리가 되어서는 그 왕성한 호기심과 도전 정신 덕분에 또 새로운 음식을 접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또 입맛이라는 것이 변하고 하는 것 같다. 그렇게 10살 언저리인 대니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것을 싫어해서 그 이 후 두번 다시 시니강을 먹질 못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 주구장창 집밥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 고충을 겪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동안에도 나는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친구를 만났다고 느껴서 그런지 나는 조금 흥분했다. 또 아줌마의 뻔뻔스러움과 주변에서 누가 내 영어를 듣겠냐 싶은 마음도 함께여서 더욱 자신있게 되도 않는 영어를 쏟아낸 것 같다. 제이미 선생님은 수년간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며 쌓아온, '엉터리 영어 잘 알아 듣기' 스킬로 내 이야기를 나름 잘 이해하고 계셨다. 대화를 이어가려면 공통 화제가 있어야 하는데, 나름 한국 정서를 잘 이해하는 선생님과 '대니'라는 공통 분모 덕분에 우리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한참을 십대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제이미 선생님도 곧 아이를 갖을 계획이라 그런지 나름 이야기가 잘 통했다. 대니는 아직은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많이 서툴고 어른과의 대화에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옆에서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그래도 내가 간혹 대니에 대한 불만을 제이미 선생님께 털어놓을라 치면 자신의 이야기인 줄 알고 우리를 서로 번갈아 쳐다보았는데 한편, 대니가 영어를 알아듣고 있다는 모습에 나는 대견스러웠다. 그러다 갑자기 대니가 음식을 다 먹었는지 옆에서 우물쭈물했다. 그러더니 본인은 밥을 다 먹었는데 혹시 헬스장을 가면 안되다고 물었다. 앞 뒤 가리지 않는 10대의 배려심 없음에 우리 둘 다 모두 황당해 했고 어쩌겠냐 싶어서 나는 그냥 보내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을 맺어준 한국의 십대는 쿨하게 퇴장했다.
어색할 것만 같았던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금방 친해졌다. 주문한 음식도 배부르게 잘 먹고 더 이상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질 즈음 나는 슬쩍 오후 일정이 있는지, 이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예정인지 물었다. 솔직히 나는 심심한 주말에 혼자 뭘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그러자 제이미 선생님은 오후에 별다른 일정이 없단다. 그러면서 본인도 보니파시오가 처음이라 했다. 나는 짐짓 일주일간 머물렀던 보니파시오를 안내해 주겠다고 제안했고 제이미 선생님도 흔쾌히 같이 둘러보자 했다. 역시 참 마음이 넓으신 선생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