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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자 사전 Nov 25. 2021

편수로 빚은 타임머신을 타고

20210410

  숨이 살짝 죽은 숙주를 건져 올리는 외할머니는 벌써 스무 번은 족히 들었을법한, 나이를 열 살이나 속이고 선을 봤다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흉을 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목구비는 참 훤칠했다는 얘길 이번에도 덧붙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돼지고기가 아닌 꿩으로 소를 만들었으며 더 크고 네모반듯하게 빚었다는 말 역시 같았다. 오늘처럼 날씨 좋으면 장구 들고 뒷산에 소풍을 나갔다는 외할머니는 편수 다 먹고 임진각에 갈 수 있을지 슬며시 아버지에게 물어본다. 때마다 가는 임진각이지만 그때마다 못 가는 개성 땅을 바라보는 아흔의 외할머니 눈빛과 표정은 영락없이 치맛자락 끌어 잡고 소풍 가던 댕기머리 소녀였다.


  닮은 구석이 없어 외할머니와 자매라고 누구 하나 생각하지 않는 이모할머니는 개가한 어머니가 낳은 터울 있는 동복동생이라지만 달라도 너무 달랐다. 차가우니 장갑을 끼고 하라는 성하에도 굳은살 알알이 박인 손으로 냉장고에서 꺼낸 돼지고기와 김장 김치를 잘게 썰고 있다. 새아버지를 닮아 이국적인 눈매를 가진, 춤과 노래를 무척 좋아했던 흥 많던 아이는 피난통에 수양딸로 곱게 키워준다는 말에 대구로 보내졌다고 한 겨울 손등이 터지도록 물일 길고 빨래를 해야만 했다. 키 크고 이목구비가 훤칠한, 처음 보는 형부라는 이가 양아버지 멱살을 틀어쥔 후 자신의 손을 잡고 마포로 데려왔던 그 날을 생각하는지 이쯤은 하나도 차갑지 않다고 고집을 부린다.


  외할머니가 밀가루에 물을 붓자 아버지는 두터운 손으로 무뚝뚝하게 반죽을 치대기 시작한다. 열여섯에 홀로 서울에 올라와 그 두 배 가까운 시간을 이리저리 떠돌며 혼자 살면서도 가리는 것 없이 뭐든 잘 먹어 버틴 아버지지만 드센 양념을 자랑하는 경상도 입맛이 남아서인지 편수는 늘 심심한 음식이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대주던 커다란 탱크로리 차량을 운전하며 주유원으로 일하던 어머니에게 밥 한 끼 하자던 그 용기로 아직도 편수를 먹고 있다는 그는, 본인의 입맛과는 별개로 아주 능숙하게 반죽을 치대고 홍두깨로 편수 피를 척척 밀어낸다. 끈끈한 이 반죽처럼 한 곳에 정착하고자 했던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생의 마지막까지 그의 직업은 운전이었다.


  밀가루를 도마에 흩뿌리며 홍두깨를 굴리는 이모는 어릴 적부터 들었던 얼굴에 대한 칭찬처럼 동그랗고 예쁜 편수피를 빚어낸다. 그리고 그 칭찬들이 아쉬움 섞인 탄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어릴 적 잘못 맞은 주사로 왼쪽 다리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 통에 월남해 창천동에 터를 잡아 가게를 일굴 정도로 전 씨 집안사람들은 독한 기가 있었고, 그 기를 처음으로 이어받은 이모는 끝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큰 회사에 다니는 이모부를 만나 결혼을 했으며 아들 둘을 건강하게 낳았다. 이모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편수 역시 단단하고 네모반듯하다.


  가늘지만 단단한 팔과 어깨로 돼지고기와 물기를 뺀 두부, 김치와 숙주에 양념을 더해 소를 뒤섞고 있는 어머니 역시 두 번째로 그 기를 이어받았다. 쌍둥이처럼 닮은 언니를 업어서 학교에 데려갈 만큼 강인한 체력과 의지를 갖고 있던 그녀는, 가게를 돕고 살림을 책임졌으며 동시에 자신을 옥죄는 그곳을 벗어나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더랬다. 다리가 불편한 언니와 집안을 이을 남동생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던 날, 교복을 찢으면 흘렸던 눈물은 편수 속과 반죽의 찰기를 위해 스며들어갔다.


  국간장과 식초, 넉넉한 물과 약간의 후추로 장을 만들고 편수 빚는 걸 거들기 위해 막 자리를 잡은 외삼촌은 편수가 끓을 때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피 끝부분을 야무지게 손끝으로 눌렀지만 열에 한 개는 꼭 냄비에 소를 퍼뜨리기 일쑤였다. 집안의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며 감리신학대학교를 갔을 때도, 독재 시절 바위에 달걀을 던지면 달걀만 깨진다는 주위의 만류에 그럴수록 바위에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며 깃발을 들었다가 감옥에 끌려갔을 때도, 그의 손끝은 언제나 완성을 향했지만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투명해진 편수를 건져 놓자 방금 전까지 뜨거운 역경을 이겨냈음을 증명하듯 김을 펄펄 뱉어낸다. 육수를 따로 내지 않고 고명도 없이 오로지 간장과 먹는 이 심심한 음식을 빨간 댕기를 단 외할머니는 버선과 꼭 닮은 편수 귀퉁이를 숟가락으로 누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모할머니는 김치를 찢으며, 더벅머리 아버지는 장을 한 움큼 떠서 편수 위로 뿌린다. 같은 교복을 입은 쌍둥이처럼 닮은 자매는 연신 호호 입김을 불고, 벌써 두 개째 편수를 집어 든 외삼촌의 머리에는 단단히 동여 맨 머리띠가 이마를 가리고 있다. 각자의 시절로 되돌아간 그들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그들만의 시간으로 소를 채운 편수를 빚어 함께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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