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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Oct 13. 2023

배움과 비움의 단상

무심히 책장을 휘릭 넘기는데 책갈피에서 그림 하나가 튀어나온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모이더니 꿈틀꿈틀 뭉뚱그려 흐릿한 모양을 만들어 기억 저편에 어른거린다. 여러 일들을 겪으며 살다 보니 새로울 것도 없지만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긴다.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다 무시하고 하나만 잡고 싶은데 쉽지 않다. 


툭, 빗방울 하나가 얼굴에 떨어지는가 하더니 툭툭, 투두둑 흘러내린다.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면 된다고, 이렇게 저렇게 걸으면 된다고 세세히 말해주는 이 없어 이리 비틀 저리 허우적 내 생각에 갇혀 걷다 보니 특별할 것도 없는 세상이라도 지혜롭게 분별하지 못했고 담지 못했다. 복잡한 게 싫어서 노래하던 대로 노래하고 낙서하던 대로 끄적이면 된다 생각했다. 잘못된 낙서는 그냥 내버려 두고 펜을 옮겨 다시 써내려 가면 되고, 그렇게 단순하게 걸으면 되는 거라고, 내가 세상을 바르게 보면 세상도 바르게 갈 줄 알았다. 내 어리숙함이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세상을 바르게 보려 애쓰는 중이다. 


셈을 해보면 너무도 짧은 인생이련만 자신만큼은 오래 살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사는 게 인간이라던가, 어느 날은 벼르고 벼르던 마음을 꺼내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미처 해결되지 않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어리숙함을 발견하고 지우개로 쓱쓱 문질러도 보았다. 

‘아! 이 한심한!’ 

씩씩거리며 깨끗이 지워 보려 해도 빛바랜 듯 회색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어 털털한 작은 진동까지 일어난다. 투둑, 다시금 원치 않는 비가 떨어진다. 


오래전에 죽었더라면, 흐느끼며 기도하는 여인의 애절함 같은, 새로이 죽어야 할 이유를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죽는다는 것과 비운다는 것이 내려놓는다는 의미라도 계속 요구되는 마음에 담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데 쉽지 않다. 잘못 판단하고, 잘못 결정하던 희한한 흔적은 다시 오지 않을 삶의 한 귀퉁이일지 모르지만 계속 걸어야 할 길에서 나의 부끄러운 약점을 볼 수 있다면 타인을 향한 마음도 너그러이 끌어안고, 징검다리를 건널 때처럼 한 번 더 두드려보는 신중함을 소유하게 되겠지. 




엊그제 다시멸치 1.5kg 한 박스를 샀다. 살짝 볶아서 멸치가루를 만들려고 내장을 빼낸 후 햇볕에 말렸다.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지만 여기저기 나눠줄 생각을 하니 즐겁긴 한데... 상대가 좋아할까? 잘하는 짓인지 모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니 웃어야지.

코팅된 펜 속에서 탁탁 튀는 멸치의 반응에 나는 왜 그 순간에, 또 엄마가 떠오를까? 

오래전에 들었고 요즘도 간간히 생각나는 그리운 노래, 목구멍이 떨리며 설움으로 폭발한다. 언제나 비어 있던 빈 쌀독 속에서 부끄러이 웃고 있는 볕을 무뎌진 호미로 들그럭, 들그럭 긁어대던 어릴 적 가난의 소리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너울거리는 그곳에는 엄마가 함께 있어서 웃을 수 있었다고 믿고 싶다. 어릴 적 영상들이 언제까지 너울거릴지 알 수 없지만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놓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말없이 실천하시는 분이었기에, 어릴 때 말 안 듣고 속 썩인 죄송함은 가끔 엄마가 즐겨 부르시던 '목포의 눈물'을 불러 눈물 한 바가지로 쏟아내 본다.


그때는 엄마의 휘젓는 호미에 한숨과 눈물이 숨어 있었다는 걸 몰랐다. 조금만 생각이 많은 딸이었다면 엄마에게 아주 조금이마나 위로가 되었을 것을. 젊은 날에는 생각을 하고, 나이 들어서는 단순하게 사는 것이 맞는 건데, 그러고 보면 젊을 때도 나는 생각 없이 살았나 보다. 유일하게 한 장이던 젊은 모습의 엄마 사진을 분실하고 헛헛한 안타까움으로 지냈던 터라 꿈에서조차도 보여주지 않는 엄마 얼굴을 더듬어 그려 보면 어떨까. 그림 그리기에는 젬병이지만, 쌀독을 기울이며 마지막 한 톨이라도 더 담으려 애쓰시던 엄마 모습을 그려 보고프다.


훗날 내 삶 어디에 어느 길목이 어떤 그림으로 내 자식들의 추억으로 기억될까. 툭툭, 투두둑 설움이 흘러내린다. 더 이상 나에게 후회할 일은 시키지 않겠노라. 내가 걸어온 걸음에도 나의 배려가 필요해라고 혼잣말을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웃음을 즐길 수 없어 툭툭 불거지는 것들에 대한 본심을 감추고 태연한 척 걷던 일상, 남을 배려하며 살았노라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도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배려인지 정답도 알 수 없고 문화와 개인적 취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시대에 산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않고는 배려와 사귐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오해 내지는 약간의 모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같다. 개인의 따라서는 상대를 이해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삶을 더 힘들게 버텨야 할 테니까. 어쭙잖게 남을 위한다는 게 뭔지, 서로 비판이나 하지 말고 살았으면 좋으련만. 세 살 먹은 아기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데, 어느 자리에 어떠한 존재로 채워나갈 것인지를 고민할 때가 지난 나이라 할지라도 오늘 나는 그것을 고민하고 생각해 본다.


아침저녁은 쌀쌀하고 한낮에는 덥다고 느껴지던 9월 날씨가 저녁에 산책을 나갔더니 긴팔 티를 입었는데도 썰렁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문화처럼 기온도 닮아 있다고 느껴진다. 남들이 부러워하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마음고생 몸 고생 하던 지난 시간에 비하면 부족한 것을 마음으로 다독이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으니 늙는다는 것은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지그시 웃어도 될 것 같다. 내일 일을 계획하지 않는 단순함이 그저 좋았다는 것을, 단순하게 산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걸었는데, ‘아! 그게 단순함이었구나’라고 알았을 때 참 반가웠다. 짐을 하나씩 벗어 버릴 때 오는 자유함은 늙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선물 같은 것.


며칠 전 거실에 앉아 있는데 문득 ‘요즘 참 편안하네’라는 걸 알았다.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지 않아도, 짐을 다시 지지 않아도 되는 나이, 스며드는 평안을 그저 누리면 되는 삶이 반갑고 좋았다. 그런데 난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라인댄스, 우쿨렐레 그리고 영어도 다시 배우면서 뇌를 자극하는 시도를. 새로운 분야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열심히 배우고 있다. 또 잘해 내고 싶다. 글이라는 것도 허약하고 빈약한 감성으로는 채워지지 않고, 아무리 쥐어짜 봐도 밑거름이 부족한 답답함은, 보일 듯 보여줄 듯하면서도 나타나지 않아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안 되면 마는 거지 뭐’가 안 되는 나로선 아직도 늙음이 익지 않았나 보다. 글이 안 써지면 그만두면 되는데 왜 글 쓰는 일만큼은 욕심이 발동되는 걸까? 전문적인 지식도 없으면서. 글쓰기 강의라도 받아 봐야 할까 보다.


글이 모여 있는 뜰에 우두커니 서서 조심스레 담지 못한 아쉬움과 쌓이고 겹쳐진 뼈마디의 한숨을 털어내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나 하루 이틀 '멍' 때리고 싶어진다. 그렇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곳에서 한 발 한 발 걷느라 애써온 내 마음을 다독이고 맑은 숲의 소리와 스치는 바람에게 오롯이 나를 맡기고 싶다. 내가 행복해야 남편도 아이들도 좋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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