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이야기 1. 나 보고 다 배상하라고?
나는 밀라노가 너무 좋다. 3년 전 남편의 해외 파견으로 살게 된 이탈리아. 밀라노로 오기 전부터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서 내가 4년을 살게 된다니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비록 오자마자 코로나로 1년은 날려 먹었지만, 그 나름대로 참 좋았다. 코로나 시기라 해외 관광객이 없어서 항상 북적거리는 밀라노의 두오모 마저 한산했다. 해외여행은 불가능했던 시절이라 이탈리아 국내여행을 구석구석했다.
유럽 관광객만 이탈리아 여행이 가능했던 시절이라 사람에 치이지 않고 여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관광업이 큰 수익이었던 자영업자들은 힘들었을지 몰라도 호텔은 저렴했고, 어딜 가든 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코로나 정책이 완화되고 유럽의 많은 나라를 여행했지만, 첫 해만큼 재밌던 적이 없다. 아니, 이탈리아만큼 완벽한 나라는 없었다.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역사면 역사, 그야말로 너란 나라는 완벽 그 자체.
남편의 귀임일정이 다가올수록 시한부 인생을 사는 듯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
"이곳도 이제 마지막이겠지..."
" 이곳을 이제 몇 번이나 더 올 수 있을까...?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봄이야.."
남편도 나도 애정 가득해서 하루하루가 정말이지 아쉽고 아깝다.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곧 귀임하실 분들이 한 목소리로 말씀하신 게 있다. "갈 때 되면 정이 뚝뚝 떨어져요. 이 나라"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4년 차가 되니 정말이지 이해가 되려고 한다. 주변만 봐도 그러하다.
외출한 사이 도둑이 들어서 귀중품이 다 털린 집. 여행 다녀오니 이 번에 새로 산 큰 티브이가 없어진 집.
차를 타려고 보니 핸들이 사라진 집. 내 차가 이상해서 보니 바퀴대신 큰 바위가 끼워져 있었다는 집.
지하철에서 지갑을 도둑맞아 복잡한 행정처리를 해야 했던 집. 그 외에도 자잘한 소매치기를 당한 집이 정말 많다. 우리는 아직까지 이런 일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딱, 한 가지 부동산 대리인만 빼면 말이다!
이 부동산 대리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가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어찌나 악독하게 굴던지 외국인 호구로 사느라 정말이지 치가 떨릴 정도다. 우리 집주인은 밀라노에서도 유명한 큰 기업의 대표인데
건물이 하도 많아서 부동산에 일임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4년 동안 집주인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보고 전부다 대리인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 대리인이 정말이지 세입자에 대한 배려가 1도 없다. 계약서에도 세부사항을 어찌나 꼼꼼히 적어놨는지 무슨 일이 생기면 전부다 우리가 배상해야 되는 구조다. 집 계약할 때 계약서를 꼼꼼히 봐야 했는데 까막눈인 외국인이 뭘 볼 줄 알았겠나... 여하튼 아주 불리한 구조다!
며칠 전에 또 사건이 터졌다. 여느 날과 같이 아이들 등교를 시키고 있는데 남편이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 듄한테 전화가 왔는데 밑에 층 약국 천장에 누수가 생겼다고 당장 올라가서 봐야겠다고 하는데 지금 집에 있어?" "누수? 밑에 층까지 셌대? 아니 나 지금 집에 없으니까 30분 뒤에 오라고 해"
지난 주말 항상 말썽이던 싱크대가 또 막혔다. 뚫어뻥으로 뚫어도 보고, 심하면 업체도 부르며 버텨(?) 왔다.
집 안은 인테리어 공사를 해서 깨끗할지라도 건물 자체는 50년도 더 된 건물이라 배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자주 막히곤 했다. 근데, 이번에는 뚫어뻥으로 해결되지 않아서 업체에 연락을 했는데 주말이라 연락이 되지 않았다.설상가상으로 식기세척기까지 물이 범람했다. 아마 하나의 배관이라 그런가 보다. 하.. 근데 이것 때문에 밑에 층까지 누수가 됐나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건물 관리인에게 전화가 왔다.
" 너 지금 어디야? 집주인이 지금 나보고 너네 집에 들어가서 상태를 보래"
"뭐? 나 지금 집에 없는데? 곧 간다니까 절대 문 열고 들어가지 마"
" 밑에 층 약국 천장이 누수라 전기를 지금 못쓰고 있대."
"알았으니까 절대로 우리 집에 들어가지 마"
순간 이것들이 정신이 나갔나? 싶으면서 단전에서부터 욕이 올라왔다.
'무단침입 아니야?? 진짜 들어왔기만 해 봐 신고할 거야!!!!'
우여곡절 끝에 집에 들어와서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방문해도 좋다고 했다. 잠시 후 업자 두 명이 와서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동영상도 찍어갔다.자기들이 해결할 수는 없고 더 큰 업체가 와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어렵고 내일 그 업체가 방문할 거라고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부동산 업체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는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
이 건은 너희가 살면서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밑에 층 누수에 관한 피해도 너희가 100% 배상해야 한다.
이상 일이 다 처리되면 너희에게 청구하겠다.
뭐라고? 이게 무슨 경우야? 오밤중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급하게 이탈리아에 사는 사람들의 오픈 챗방에 이런 경우는 세입자가 배상해야 하냐며 문의했고 돌아오는 답변은 대부분 집주인이 배상했다는 이야기다. 자세한 건 계약서에 쓰여 있을 테니,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다음 날, 남편이 계약서를 다시 검토했더니 이런 젠장, 정확하게 상하수도 관련 항목이 있어고 우리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은 전적으로 우리가 배상해야 된다고 적혀있었다! 아니 진짜 이 정도로 치밀하게 계약서에 적혀있는 집은 우리 집 밖에 없었다. 지인들에게 계약서를 물어보니 큰 건은 집주인이 배상하고, 생활하면서 자잘한 건 세입자가 처리한다고 쓰여 있다고 했다. 망할 자식 또 욕이 한 바가지 나왔다. 정말이지 부동산 대리인이 제대로 된 외국인 호구를 잡았구나 싶었다. 다행히 아는 지인의 남편이 변호사라 사건을 상세하게 전달하고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내 동의 없이 동영상을 찍은 건 불법이다.
무슨 동영상인지 꼭 전달해 달라고 요청하고 만약 주지 않는다면 법원 절차를 받으면 그동안 우리가 사비로 처리했던 싱크대 관련 비용을 다 청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두 번째, 동영상을 받았다면 혹시나 우리의 과실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봐라
어떤 근거로 부동산 업자가 우리의 과실로 생각했는지 꼼꼼히 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하지만 동영상에는 우리의 과실을 알 수 있는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싱크대부터 식기세척기까지 한번 훑은 게 다였다.
세 번째, 이탈리아 사람들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아마도 부동산 업자는 외국인 호구를 제대로 이용해보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과실을 입증할 수 있는 동영상을 가지고 있으니 일 복잡하게 하지 말고 너네가 배상해!! 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겁을 먹고 호구짓을 당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지지 않지. 돈을 떠나서 부동산 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되지 않게 어디서 협박질인 거지?? 너무 화가 나고 내가 사랑하는 이탈리아가 나에게 드디어 정을 떼려는구나 싶었다.
다음날 다른 업체가 펌프차를 가지고 왔다. 진짜 이 정도가 오는 거면 이건 건물 자체 책임이 아닌 건가?
작업은 10분 만에 끝이 났다. 나는 작업하시는 분에게 동의를 구하고 증거 사진을 찍었고, 남편의 회사 직원을 통해서 막힌 원인을 업체에게 물어보았다.
역시나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다!!! 원인은 비누와 기름이 뭉쳐져서 그런 건데 비누를 안 쓸 수 없으니 우리의 잘못이 아닐 뿐더러 밀라노의 많은 건물에 아주 흔한 경우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기분 소식을 부동산 놈에게 정식메일로 항의했다. 너희가 부른 업체 말로는 우리의 과실이 아니라 건물 자체의 문제이다. 건물의 문제는 네가 관리하는 거니 네가 잘못한 일이다. 고로, 우리가 배상할 의무가 없다. 이렇게 이메일을 보내고 회신을 기다렸으나 그놈으로부터 회신이 오지 않았다. 아마도, 집주인에게 이 사건을 보고 한 거겠지. 우리에게 비용을 청구해서 집주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그놈의 계획을 무산이 되었다. 후, 외국인 호구로 사는 법은 쉽지 않다. 아직 이놈과의 해결해야 할 일이 많지만 지지 않고 싸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