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시 피울 꽃을 기다리며
책과 함께 한 인생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마음이 슬플 때도, 풀기 어려운 의문에 사로잡힐 때도, 저는 책을 보았습니다. 인간관계도 모두 책을 매개로 이어왔구요. 책을 읽는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다른 방법을 모르기도 했고 그만큼 책을 사랑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서점인으로 살고 있는 요즘 저는 독서를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서점에 취직을 하고나서도 아름다운 책을 보면 정신을 잃을 만큼 좋았거든요. 직원할인을 받을 수 있어서 한권씩 사놓은 책도 꽤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책을 보고 있으면 약간은 복잡한 감정이 올라오더군요. 책을 다루는 것이 일이 되고나니 아침에 출근해 서점문 앞에 쌓인 책꾸러미에 시선이 가면, 그날 처리해야 할 일의 양을 가늠하게 되고 그 기분이 썩 단순하지만은 않았어요.
그리고 급기야 최근 들어 책을 더이상 사지 않고 읽는 일도 드물어졌어요. 서점인으로 3년차에 접어들고나서 시작된 것 같아요. 싫어진 건 분명, 아니예요. 저에게 책이 주는 존재감을 대신할 만한 대상은 없거든요.
요즘 이른 아침 독서를 하는 대신, 부엌에 나가 창을 열고 라디오를 틀어둔 채,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씻고 다듬어 한두 가지 요리를 하기도 하고 몸이 피곤할 만큼 오래 산책을 즐기기도 합니다. 막상 손에서 책을 놓아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아요.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구요. 아무튼 손에서 책을 놓고도 잘 지내는 것을 보니 새삼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동생이 오래전에 제게 묻더군요. 도대체 언니집 서재에 저렇게 쌓인 책들이, 언니에게 무엇을 주었느냐?라고. 현실적인 동생이 할 법한 말이었죠. 그 말을 들었던 당시에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요사이 들어 저는 혼자 있는 시간에 곰곰 생각하게 되거든요.
도대체 책이 내게 무엇을 주었지? 책이 내게 무엇이었을까? ...
무엇이든 절대적인 대상은 없고 어떤 것에 집착할수록 실제로는 그 대상에서 멀어지는 것이 인생의 진실이고 아이러니이기도 하더군요 책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구요. 책속에서 길을 찾아보기도 했었고 다소 상처를 치유받기도 했지만 모든 것들은 그 시절에 만난 인연이었을 뿐, 시간을 이길 힘은 세상 어떤 것도 갖지 못하구요. 지식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것도 나비 따라 가는 것만큼 허망하기만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느긋하게 일어나 책을 펴는 대신 어머니께 물려받은 부엌칼로 깨끗이 씻은 오이를 살강살강 썰어 오이무침 만들고 서리태 넣어 몰랑하게 밥을 지었죠. 그리고 밥이 끓기를 기다려 상을 차려 감사하게 먹었어요. 어쩌면 책을 읽는 것보다 밥을 하고 음식을 단정히 먹고 깨끗하게 빨래한 옷을 개고...이런 자잘한 일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어찌 찾아오는걸까요?
독서를 하지 않는 이 시간이 길게 가지는 않을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다른 곳에 눈을 돌렸다가도 다시 책으로 돌아오곤 했거든요. 가장 편안한 대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잠시 떠나보는 짧은 여행과도 비슷하다고 할까요.
지금 집중하고 있는 서점일과 몸을 거두기 위해 하는 자잘한 일들도, 제게는 어쩌면 책을 읽는 일의 연장선에 있을 수도 있겠다고 어렴풋하게 여겨집니다.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쩌면 독서를 더욱 깊어지게 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시선을 멀리 두다보면 가까운 것들의 실상이 더 잘 보이기도 하니까요.
하루하루 해가 짧아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서점문을 닫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도중에 창밖으로 보이는 요즘 풍경이, 계절이 깊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나무들도 머지않아 잎을 모두 떨구고 긴, 휴식에 들어갈테지요. 저도 잠시, 쉼을 즐기고 싶네요. 다시 피울 꽃을 준비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