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유럽여행, D+10
아침도 건너뛰고 쥐 죽은 듯이 잤다.
어제저녁 8시에 침대에 누워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는
사치를 부리다 10시쯤 잠에 들었다.
일어나 보니 조식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이다.
오늘 날씨를 확인한다.
날씨 앱을 보니 먹구름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화면은
맑게 개었다.
에든버러 마지막 날에 드디어
쨍한 해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부랴부랴 나갈 채비를 한다.
애증의 카메라들을 챙긴다.
오늘은 내 카메라들이 빛을 바라길 기대해 본다.
올드타운으로 나가는 길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스산한 중세 시대에 온 것 같은, 늘 축축하게 젖어있던
건물과 집들은 뽀송하게 말라있다.
Abbeyhill을 지나 The Scottish Parliament 앞에서
Holyrood Park를 바라본다.
하늘에 떠있는 해를 보며 눈을 찡그린다.
햇빛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들지만 해가 있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쭈욱 뻗은 큰길을 걸으며 에든버러 성으로 향한다.
지리에 젬병인 나로선 이런 큰길로만 가면 되는
쉬운 길이 고맙다.
모두가 한마음인 듯 적고 소중한 화창한 날씨를 즐기러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현지인과 여행객이 섞여 있는 거리 속을 지나간다.
길거리에 백파이프 연주 소리가 들린다.
"킬트"를 입은 연주자가 연주 실력을 뽐낸다.
비올 때 들었던 연주 소리는 조금 구슬프게 들렸는데
오늘은 어느 때보다 힘차다.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을 입은 어린 소녀는
그의 옆에 가서 수줍게 사진을 찍는다.
이 거리를 지나며 두 명의 유명한 동상을 본다.
애덤 스미스와 흄.
경제 수업에서 배운
"보이지 않는 손"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
철학 수업에서 얼핏 들은
데이비드 흄.
모두 이곳,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그들의 명성이 무색하게
애덤 스미스 머리에는 라바콘이,
데이비드 흄의 이마엔 정체 모를 스티커가 붙어 있다.
며칠 전에 본 애덤 스미스 동상에서는
다른 곳에 라바콘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장난을 치는 모양이다.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으로 고통받는(?) 동상들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웃으며 넘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르막을 걷다 에든버러 성에 도착한다.
날씨가 좋으니 성도 더 아름다워 보인다.
관광지답게 사람들이 성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어제저녁에 예약한 에든버러 성 입장권을 보여주며
에든버러 성에 입장한다.
성 안에 관광객들이 가득하다.
단체로 수학여행을 온 듯한 스페인어를 쓰는 10대들,
프랑스에서 온 듯한 단란한 가족,
혼자 여행을 온 듯한 여행객 등.
원래 살던 곳, 사용하는 언어, 나이, 성별, 인종, 문화
등에 상관없이 여기선 그냥 "여행객"일뿐이다.
낮은 계단을 올라가면 성곽에 있는 대포가 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올라간다.
줄이 꽤 길다.
나는 오디오 가이드를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서 관광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었기에 일단 그 줄에 선다.
아무것도 모르겠을 땐 남들을 따라 하는 게 국룰이다.
사람들이 성곽 대포 앞으로 보이는 경치를 보며
사진을 찍는다.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가 포토 스폿에 서면
핸드폰이든 카메라든 사진을 찍고 내려온다.
그리고 그다음 사람이, 그다음다음 사람이,
그다음다음다음 사람이 이 과정을 반복한다.
나라고 예외는 없다.
나도 그들처럼 사진을 찍고 내려온다.
경치를 관람하는 여유 따위는 없다.
뒷사람이 밀려있기 때문이다.
에든버러 성에 있는 Royal Palace도 구경한다.
구경을 마치고 벤치에 앉는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에든버러 여행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여행카페에 들어가 에든버러를 검색한다.
마침 글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사진 동행을 구하는 게시글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 연락한다.
K는 지금 칼튼 힐에 있다고 한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점심 약속을 잡는다.
에든버러에서 외식이라곤 파이브 가이즈가 전부였던
나는 K가 추천하는 최애 라멘 식당에서 만나기로 한다.
에든버러 성에서 오후 1시마다 대포를 쏘는데
한번 구경하고 싶어 K에게 양해를 구한다.
K는 주변을 산책하고 있겠다며 성에서 나올 때
연락을 달라고 흔쾌히 말한다.
일분일초 아껴아껴 쓰는 서울의 시간에 살다가
너그러이 상대방을 이해해 주는 여유를 느낀다.
진정 여행을 즐기는 것은 상대방의 상황에 따라
나의 마음이 좌지우지되지 않는,
배려하는 마음을 갖는,
손익을 따지지 않는,
너그러워지는,
여유로운 것임을 깨닫는다.
오직 행복한 지금을 누리는 여행,
100% Guarantee 성공이다.
"One O'clock Gun"이라는
대포가 발사되는 장소로 향한다.
이미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 있었고
나는 사람이 모여있는 곳 뒤에 자리 잡는다.
사람들이 많아서 대포가 발사되는 것을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오후 1시, 대포가 발사된다.
운이 좋게 대포가 발사되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다들 대포 하나 발사되는 걸 보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옹기종기 모여서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아이 같다.
라멘집에 도착한다.
하얀색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K를 만난다.
라멘을 먹으면서 에든버러를 애정 하는
K에 대해 알아간다.
K와 라멘을 먹고 런던에서 만난 U에게 소개받은
퍼지(Fudge) 집에 들어간다.
K가 점원에게 말한다.
'시식해 볼 수 있을까요?'
넉살 좋은 K 덕분에 여러 맛을 맛볼 수 있었다.
다양한 맛들 중에서 동시에 감탄한
"Dark Chocolate & Sea Salt" 퍼지를
의심의 여지 없이 고른다.
그리고 카페에 들려 아이스 카페라떼를 산다.
빨대가 스코틀랜드 국기를 연상케한다.
이후 한 계단에 앉아 퍼지와 커피를 먹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단 몇 마디로 K는 여행 마니아라는 것을 알게된다.
K는 여러 나라를 다녔다.
그중에서 런던을 정말 좋아한다고 한다.
에든버러에서 런던으로 갈 예정인데
런던으로 가는 것을 설렌다.
여행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자신의 삶을
책임감 있게 열심히 살았고
지금은 유럽 여행을 온전히 즐기고 있다는
건강한 자신감 있는 K의 말을 듣는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고, 멋지게 만드는
용감한 모습에서 나도 좀 더 과감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
자연스레 나의 이야기도 나온다.
K는 나에게 에든버러에 온 이유를 묻는다.
네이버에 대충 쳐서 나온 영국 여행지가
에든버러였고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고 있는
사진 한 장을 보고 결정했다는 건 비밀로 한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평소에 글을 쓰는 나만의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 하나를 쓰는데 거의 한 달 정도 걸려요.
하나의 주제가 생각나면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책이든 영상이든 정보를 수집해서
저의 생각을 정리해요.
대충 계산해 봤는데 보통 한 달은 걸리더라고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그리고 글을 잘 쓰고 싶고 더 많이 쓰고 싶은데
마음만큼 잘 안돼서 조금 막막해요."
주절주절 처음 보는 사람에게 푸념한다.
여행이 좋은 건 체면 차리지 않고
속마음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K가 말한다.
"근데 한 달 동안 한 주제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한 글로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한 달 동안 생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깐요."
하나에 꽂히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나의 성격 때문에
힘들 때도 많았다.
K의 두 마디는 사탕발림이 아닌 그저 사실에 근거한
담백한 말이었다.
나는 '아니 근데'라는 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낯선 런던을 거쳐 온 비만 오던 에든버러에 온
나는 이미 지쳐있었다.
지금 하는 이 여행에 확신 없어하는 나의 말들에
K는 왜 이렇게 40대가 하는 말처럼 이야기하느냐고,
아직 20대이지 않냐고 이야기한다.
20대 짬바(?)가 차있던 나는
"인생의 20대 중반"에서 "20대"를 지워버리곤 한다.
K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나의 삶을 책임져야겠다고 다짐한다.
처음 본 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준
K에게 정말 고맙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대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준다.
에든버러를 빠삭하게 알고 있는 K를 믿고 따른다.
멋진 사진을 건지고 K와 헤어진다.
K가 꼭 가보라고 한 칼튼 힐로 향한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칼튼 힐에 올라가 에든버러 경치를 구경한다.
저 끝에 바다도 보인다.
'저기 바다 한번 가볼걸...'이라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숙소로 향한다.
언덕에서 내려가는데 한 길이 보인다.
Hume Walk, 1775년 흄이 시의회에
칼튼 힐에 산책로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흄 산책로를 걷는다.
자연스레
'흄은 이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순간, 에든버러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
전혀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행은 내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진다.
내일 새벽에 에든버러 공항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오늘이 에든버러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더 늦어지기 전에 시내로 가서
기념품 숍에 들어간다.
처음엔 선물용 스카치위스키를 사려고 했으나
정말 가격이 사악했기 때문에 고민하다 포기한다.
그리고 에든버러의 아름다움을 담지 못한 구린 엽서와
겨우 찾은 에든버러 국기 뱃지를 사고 숙소로 간다.
숙소에 도착한 나는 저녁을 먹고 짐을 싼다.
얼른 짐을 싸고 근처 가게에서 스카치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자 했지만 짐 싸기에 진을 빼서
아쉽지만 포기한다.
U가 초코퍼지와 스카치위스키 조합을
정말 추천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에든버러 딘 빌리지, 내셔널 갤러리,
홀리루드 궁전, 그리고 근교 등.
다음 에든버러 여행에서는 꼭 해보리라!
내일 새벽 5시 에든버러행 우버를 예약한다.
오늘 체크인 한 룸메이트에게
내일 새벽에 나가야 해서
조금 시끄러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최대한 조용히, 빨리 나가겠다고 하며 양해를 구한다.
드디어 내일 영국을 벗어나 프랑스 파리로 향한다.
영국을 떠난다니 마음이 “섭섭”보다는
“시원~”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렇다고 파리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은 실망하는 것보다 나쁘다고
하지만 더 이상 낙심하기 싫어서다.
그럼에도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이제 영국을 떠난다.
치어스, 에든버러!
2024.03.16.S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