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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theremingd Aug 15. 2024

최악

40일 유럽여행, D+9

잘 때 춥다며 주신 보온 물주머니가

미지근하게 식었다.

물주머니를 끌어안고 잤지만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햇빛을 잘 못 보니 여행의 의욕이 사라진다.

오전 7시에 조식을 먹는다.

오늘은 일정이 아닌 할 일을 해야 한다.

생존을 위해 두꺼운 바지를 사야 하고

밀린 빨래를 해야 한다.

나는 청소 및 식사 준비를 위한 필수 외출시간에

잠시 숙소로 돌아와 빨래를 가지고 나가도 되는지

사장님께 양해를 구한다.

사장님께서 노프라블럼이라고 하신다.

나는 큰 테스코와 세인즈베리 마트에서 산

비닐 쇼핑백에 빨래들을 욱여넣는다.

큰 쇼핑백 두 개에 옷이 꽉 찬다.

나갈 준비를 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대부분의 옷을 이미 한두 번씩

입었기 때문에 빨아야 한다.

빨래를 계속 미룬 터라 입을 옷이 동났다.

어쩔 수 없이 추운 날씨에 얇은 치마를 입는다.

숙소에서 나와 옷 가게가 많은 프린스 스트리트로

향한다.

버스정류장에서 오돌오돌 떨며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를 타고 프린스 스트리트에 내려

옷가게에 들어간다.

생존을 위해 "바지"에 혈안 되어있다.

물가가 비싸니 최대한 가성비 좋은 가게로 들어간다.

Primark, H&M 두 군데, ZARA, Bershka, Mango

등.

얼어 죽게 생겼는데 돈이 아까워 이곳저곳 들른다.

보통 그냥저냥 입을 수 있는 바지를 보면

£15정도이다.

15라는 숫자에

'그럼 15,000원보다 조금 더 비싸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숫자에 속으면 안 된다.

이놈은 $달러도 €유로도 아닌 £파운드다!

얼른 환율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15 = 약 ₩ 26,000

옷을 입어본 것이 무색하게 빠르게 단념한다.

'밥이나 먹자...'

나는 감정적 식욕으로 나의 마음을 달랜다.


파이브 가이즈가 있다.

런던에서 뭘 먹어도 정말 맛있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맛집을 찾아보지도 않고

파이브 가이즈로 향한다.

나의 사랑, 밀크셰이크와 감자튀김, 햄버거를 시킨다.

스몰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많이 준다.

2층으로 올라와 에든버러에서의 첫 외식을 한다.

에든버러 첫 외식이 파이브가이즈라니...

허탈한 웃음과 함께 식사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필승 조합

"비스코프&피넛버터 밀크셰이크"와 감자튀김은

배신하지 않는다.

오후 1시 반,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빨래를 하러

숙소로 향한다.

간신히 추위와 허기에서 조금 벗어났는데,

죽으라는 법이 있나 보다.

물웅덩이를 실수로 밟아 신고 있던 운동화 두 짝이

아주 푹 젖었다.

덕분에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오후 2시, 숙소 앞

숙소에 들어가 빨래가 든 쇼핑백 두 개를 한 손에 들고

남은 한 손으론 우산을 들고 버스를 타러 나간다.

버스에서 내려 빨래방을 찾는다.

빨래방은 카페도 겸해 운영된다고 구글은 알려주었다.

간판을 잘 찾지 못해 눈앞에 빨래방을 두고 찾는다.

가끔 갑작스레 엄습하는 쓸데없는 불안감이

눈을 가린다.

한참 헤매다 빨래방을 찾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북실한 컬리 헤어를 한 마른 남자 주인과

유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중국인 손님들,

이웃 할아버지와 덥수룩한 털을 가진 꼬질미 넘치는

강아지 두 마리.

곧 같은 종으로 보이는 강아지 세 마리와 함께

아주머니 두 명과 어린 소녀가 들어온다.

카페가 꽉 차있었다.

탄산음료 캔 하나를 주문한다.

그리고 빨래도 맡긴다.

빨래와 건조 둘 다 해주는 코스로 선택했고

나는 기다리면 된다고 주인이 말한다.

주인이 말하는데 스코틀랜드 발음을

잘 못 알아들었지만 이미 사람들을 비집고

의자에 앉았으므로 일단 기다려보기로 한다.

내가 앉은 자리 옆에 낡은 가죽 소파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할아버지 한 분과 강아지두 마리가

안락하게 자리 잡고 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강아지 사진들을 통해

자부심 있는 이 지역 출신 개라는 것을 직감한다.

의자에 앉자마자 개 냄새가 진동한다.

냄새에 예민해서 더 그 냄새가 있는 공간에서

숨 쉬는 것이 힘들다.

자리를 옮기려고 해도 "익스큐즈미"라고 연발하며

비좁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

강아지를 등지는 것으로 타협한다.

주인은 세탁이 45분 정도에 끝날 것이라 일러준다.

나는 휴대폰으로 알람을 맞춘다.

알람이 울리고 나는 주인에게 가서 빨래가

다 되었는지 묻는다.

주인은 아주 여유 있게 지하에 있는 빨래방으로 가서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한다.

주인이 세탁이 다 되었다며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빨래를 옮겨 놓았다.

활짝 열린 건조기 속에 적나라한 속옷들을 보니

조금 민망하다.

주인은 얼마나 건조할지 물었고

나는 옷이 아주 바삭해질 정도의 시간을 요구한다.

주인은 건조기에 삐져나온 속옷을 속으로 집어넣으며

건조 시간을 설정한다.

또, 기다린다.

기다림의 끝이 온다.


건조가 되었고 무료로 준 아주 큰 비닐봉지에 옷을

차곡차곡 담는다.

옷을 개는데 신었던 양말이 이미

예쁘게 개어져 있었다.

신었던 양말을 개어놓고 펴지 않고 세탁한 것이다.

냄새 체크 결과, 양호 판정.

두 손 가득 뽀송하고 따뜻한 빨래를 들고

숙소로 향한다.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 사람들이 많다.

아마 퇴근 시간인 것 같다.

버스 맨 뒷자리 마주 보는 자리에 앉는다.

무릎이 닿을만한 의자 간격이다.

내 앞좌석에 탄 아주머니들의 신발을 구경한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간다.

산인지 언덕인지 모르겠는 홀리루드가 눈에 들어온다.

차갑고 축축하기만 했던 날씨가

점점 개어 하늘은 붉은 노을로 물들고 있다.

아직도 따뜻한 빨래처럼 말이다.


오후 5시 반, 숙소 앞


2024.03.15.FRI


여행을 가기 전, 유튜브에서 본 한 강아지가 있었는데

품종이 화이트 테리어였다.

그 후로 나는 화이트 테리어를 정말 좋아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스코틀랜드 출신 개를

인터넷에 검색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개,

화이트 테리어(West Highland White Terrier)"


강아지도 꾸미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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