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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진우 Jun 05. 2021

안 철학적이고 싶은 철학 에세이 - 관계

관계

  혼자 있으면 함께이고 싶고, 함께 있으면 혼자이고 싶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사람은 모순적이다. 자유롭고 싶으면서도 어딘가와 관계하고 싶어 한다. 나를 이해해주고 나와 잘 통하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또 관계하지만 그 누군가도 나를 완벽히 이해할 순 없다는 것을 느끼며 때때로 자신에게로 돌아가 외로움을 씹는다. 우리가 평생 반복하는 시소놀이이다.

  그런고로 인간의 본질을 묻는다면 나는 이성도 감성도 아닌 외로움을 꼽겠다. 그것이 물리적인 외로움이든 정서적인 외로움이든 혹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등등의 어떤 종류의 외로움이든 말이다. 외로움이야말로 사람을 움직이고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것이다.

  ‘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든다. ‘나’라고는 하지만 생각보다 타인에 의해, 관계에 의해 규정된 것이 많고 또 그래서 그런지 일관성보다는 모순성이 두드러진다. 한 단계 나아가 ‘나’의 존재가치라고는 하지만 생각보다 그것은 ‘나 자신’보다는 ‘관계 속에서의 나’에 훨씬 좌지우지되는 것만 같다.

  나는 자아를 확립하고 또 집단과 사회 속에서 하나의 객체로서 존재감을 떨치고 싶지만, 막상 관계 안에서 처음 생각했던 ‘진정한 나’는 변질된다. 사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변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는 정도이다. 당장 우리 자신만 하더라도 타인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파악할 순 없지 않은가. 그건 당사자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그렇다고 변질을 원천 차단해버릴 순 없다. 그것은 죽음이나 히키코모리가 되는 길과 유사하기 때문이다(설령 히키코모리가 되어도 사회에서 ‘히키코모리’라고 규정해버린다!!).

  꽤 예전부터는 개인주의라는 미명하에 이러한 관계에서 오는 규정을 탈피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네가 좋다면(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야.”와 같은 캐치프레이즈들이 광고와 글과 영상에 가득하다. 물론 좋은 말들이다. 다만 너무 여기저기서 다 그렇게 떠든다는 점만 뺀다면.

  우리는 우리가 존재적으로 관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또 그것에서 오는 규정, 시선과도 적절히 타협할 줄 알아야 한다. 정말 꼰대 같은 말이지만, 그것이 설령 때때로 불합리하다고 느껴질 때도 말이다.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방해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다). 단지 모든 것은 ‘적당한 게’ 좋다는 뜻이다.

  요즘엔 개인주의의 시대라고도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무슨무슨 주의’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불합리에 맞서기 위해 나왔지만 우습게도 그들 스스로가 또 다른 불합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무슨무슨 혐오'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들이 정말로 과연 불합리를 없애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게 맞을까 하는 의문도 있다. 그들은 오히려 단지 자신들의 외로움을 해소해줄 어떤 강력한 가치관을 가진 집단이 필요했던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사회는 확실히 외롭다. 물론 지난 세대들의 지나친 관심과 소위 ‘정’으로 포장되는 오지랖에는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또 나를 기존의 규정에 맞춰 압박하거나 맘대로 하려고 하는 것에는 열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앞서 말한 캐치프레이즈들을 들고 온 광고들을 보다보면 걱정이 앞선다. 오지랖을 정이라고 포장하듯 개인의 파편화와 외로움을 개인주의와 ‘나 다운 것’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말이다. 왜냐하면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규정과 시선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면서도 또 다른 규정에 자신을 옭아매고 또 MBTI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얘기가 두서없이 길어졌지만 이것이 에세이의 묘미 아닐까. 아무튼 오늘날 사회가 심화시키고 있는 외로움과 또 그것의 원인이자 결과인 개인주의의 흐름은 조금 걱정이다. 우리 자신 또한 스스로를 완벽히 알 수 없기에 관계에서 오는 왜곡과 변질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고 또 한편으론 그 모든 것이 어쩌면 ‘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때로는 그것에 상처받기도 하겠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건 시소놀이이다. 계속 왔다 갔다 해야지 한쪽으로 주저앉아버리면 엉덩이가 깨진다. 그러니 죽음이 오기 전까진 시소놀이를 끝내지 말자. 그리고 또 억지로 가운데 균형을 맞추려고도 하지 말자. 관계에 대해 잘 생각해보자!(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라서 구호 외치는 걸로 끝냄. 그리고 다음 주제로 죽음 다룰 거라 끝에 일부러 죽음 얘기 넣은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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