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에 대하여
나는 성격이 꽤 급한 사람이다. 뭐든 빨리하는 걸 좋아해서 학창 시절부터 달리기도 빨랐고 회사에서도 일처리를 누구보다 빠르게 했다. 아마 남자였다면 군대 내무반에서 환복을 1등으로 하지 않았을까. 이런 나에게 호주의 슬로우 라이프는 첫날부터 적응이 되지 않았다.
48시간의 기다림
호주에 도착하기 전에 한국에서 미리 브리즈번 공항에 내리자마자 진행해야 할 일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맞춰 3시간 거리 목적지로 이동할 교통편을 예약을 해두었다.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비행기로 오전 5시 30분에 브리즈번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을 빠져나오는 데 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공항에서 브리즈번 시티로 가는 기차를 타고 이동한 후, 시티에 도착해서 간단히 식사를 하면 9시쯤 될 것이다. 9시에 문을 여는 통신사 대리점에서 유심을 사서 휴대폰을 개통하고 10시 30분에 고속버스를 타고 첫 거주 지역으로 가야 한다. 이 모든 일이 차근히 진행되길 바랐지만 이건 한국의 fast 라이프에 적응한 나의 큰 오산이었다.
우선 비행기를 내려 무사히 시티로 도착해서 식사를 했고, 9시에 통신사 대리점이 오픈을 하자마자 첫 손님으로 들어가서 유심을 구매하였다. 그러나 웬걸. 휴대폰은 바로 개통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바로 되지 않았던 적이 있으니 '30분 내로 되겠지'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30분이 지나도 변한 건 없었고, 한 시간 내로 고속버스를 타고 3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나는 빨리 문제를 처리하고 가고 싶었다. 내가 가는 곳은 아주 작은 시골지역이라 통신사 대리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매장으로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지만 매장 직원은 24시간 동안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직원은 최대 24시간 안에 휴대폰 개통이 될 것이니 그때 혹시 안되면 본인들에게 다시 오라고 했다.
'휴대폰 개통 때문에 왕복 6시간 거리를 다시 와야 한다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따질 만큼의 영어실력도 안되고 60불이 넘는 고속버스를 놓치기 싫어서 '곧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우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임시 숙소에 도착하여 다음날 아침이 되었고, 직원이 언급한 24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개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통신사에 다시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 고객센터 채팅 앱이 있어서 채팅을 했는데 상담원은 내 문제를 지금 등록해 뒀으니 4시간 정도 후에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나의 문제가 도대체 뭔데?' 그는 "I assure"라고 이야기하며 4시간 안에 될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약속한 4시간을 꼬박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었다. 또 채팅을 걸었는데 다시 내 문제를 등록해놓겠다는 말 밖에 들을 수 없었다.
이제는 '과연 되기는 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만 들었다. 내가 더 조급했던 건 휴대폰으로 할 일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임시 숙소에 살고 있었으니 당장 지낼 집도 알아봐야 하고 차도 구매를 해야 했다. 휴대폰이 되지 않으니 이틀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휴대폰이 언제 되는지 기다리는 일 밖에 없었다. 통신사 대리점에서부터 채팅 앱 직원과 상담하면서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으며 꼬박 48시간을 기다렸고, 이틀이 지난 아침이 되어서야 휴대폰 왼쪽 상단의 통신사 마크를 볼 수 있었다. 낯선 땅에 처음 와서 휴대폰이 되지 않던 48시간은 체감상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느림의 미학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놀라운 건 이 문제에 대해 너무도 태연한 그들의 태도였다. "안돼? 기다리면 곧 될 거야."라는 일관된 대답들. 이 나라에서는 오히려 휴대폰이 안된다고 재촉하는 내가 더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이후에 집을 구하고 같이 살 친구들을 만나 이 일화를 이야기하니 본인은 7일을 기다려서 휴대폰을 개통했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가 얘기하길 한 번은 집에 와이파이를 설치하러 오기로 했는데 약속한 시간이 10시에서 4시 사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온다고 말하고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또 연락을 준다. 그런데 놀라운 건 저 시간에도 맞춰오지 않았다고 한다. 48시간동안 휴대폰 개통을 기다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니.
해외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나의 친구는 이것이 '느림의 미학'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거북이같이 느껴지던 이 시스템이 이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인 것이 놀랍다. 호주인들의 슬로우 라이프는 생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데, 횡단보도를 건널 때 횡단보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차가 미리 서서 보행자가 건널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다. 나는 차가 기다리는 게 머쓱해서 뛰어서 보도를 건너기도 하는데 그렇게 뛰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리고 느리게 운전한다고 경적을 울리는 차가 없으니 운전하기도 수월하다. 그리고 마트에서 대기 줄이 아무리 길더라도 "Hi, How are you?"와 함께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줄이 길다고 불평하는 고객도 없고 계산원도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같다. 한국에서의 나는 늘 더 짧은 라인으로 찾아가곤 했는데 성격이 급한 나조차도 점점 그냥 기다리는 게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얼마나 바쁘게 살아왔는지 호주에 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깨닫게 되었다. 어느덧 나는 호주에 온 지 3년이 넘었다. 아직도 이들의 슬로우 라이프가 신기하고 가끔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친구가 말한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알듯 하다. 아마도 이곳에서 나는 천천히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