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녀와."
타 지역으로 발령이 나서 출퇴근 시간이 왕복 3시간 남짓 걸리는 남편은 오늘도 이른 새벽 출근길에 나선다.
남편과 인사를 나누고 나면 본격적인 나의 모닝 레이스가 시작된다.
아직도 꿈나라인 첫째를 깨워야 하고, 숙제에 진심인 둘째는 아빠랑 같이 눈을 떠서 벌써 오늘 봐야 하는 영어 동영상을 틀고 이불속에 있다. 알아서 숙제를 해주는 건 아주 땡큐 한 일이지만, 숙제하는 아이의 짜증을 받아줘야 하는 일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우리 두 아이는 성향만큼 입맛도 아주 다르다. 아침식사 메뉴 역시 통일하기 어려운 숙제이다. 한놈은 밥을 달라, 한놈은 빵을 달라. 계란은 프라이로 달라고 했다가 스크램블로 달라고 했다가 매번 요구사항은 바뀐다. 오늘 역시 일찍 일어난 둘째에게는 식판에 밥과 달걀프라이를 담고, 친정엄마가 해주신 시금치나물과 숙주나물 조금, 그리고 김치를 썰어 담아준다. 둘째 밥상이 완성되면 첫째를 또 깨우러 가야 한다. 절대로 한 번에 일어나는 법이 없다. 몇 번을 흔들어 깨우다 결국 큰소리를 내야 겨우 일어나는 첫째이다. 첫째는 아침밥을 잘 안 먹으려고 한다. 바나나, 사과 같은 과일을 주기도 하고 빵과 우유를 건네주기도 한다. 어쨌든 두 녀석 다 아침기상을 완료하였고, 아이들 가방에 넣어줄 물병과 수저통을 준비하였다.
그럼 이제 나를 위한 레이스 시작!!
요즘 자기 전 미리 머리를 감고 있다. 아침에 머리까지 감으려니 모자란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선택한 일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이가 드니 머리카락에 기름기가 덜 도는 거 같다. 젊었을 때는 저녁에 머리를 감고 자도 아침이면 다시 감아야 했는데 이제는 밤에 감으면 다음날 하루 정도는 거뜬히 견딜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양치질과 세수만으로 간단한 준비가 시작된다. 기초 화장품을 바르고, 색조 화장에 들어간다. 어설픈 실력이지만, 빠르고 간단하게 쓱싹쓱싹 얼굴에 찍어 바르고 나면 그래도 생얼보다는 한결 나은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 화장을 마치면 다시 거실로 나가 아이들이 제 할 일을 하고 있는지, 밥을 먹고 있는지 한번 더 체크를 한다. 큰 아이는 다행히 이제 5학년이라고 깨우기만 하면, 밥 먹고 난 뒤 씻고 양치질하고 옷 갈아입고 머리빗는 것까지 알아서 척척 한다. 반면 둘째는 옷도 꺼내줘야 하고, 매번 양말 신는 게 힘들다고 투정이라 옆에서 도와줘야 한다. 후딱 도와주고 나면 다시 안방 화장대로 돌아온다. 출근 준비의 꽃이라 불리는 '에어랩'을 켤 시간이다. 지금껏 다이소에서 산 헤어컬링용 스펀지를 돌돌 말고 아침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복귀를 하고 보니 다이슨 에어랩을 안 쓰는 여직원이 없는 듯했다. 벼르고 벼르다 결국 나 역시 12개월 무이자로 홈쇼핑에서 에어랩을 질렀고, 그 에어랩은 출근 준비의 꽃이 되었다. 머리를 예쁘게 말고 나면 왠지 더 나 자신이 나아 보이는 것 같아서이다. 준비된 커리어 우면의 모습이랄까? 참 웃기지만, 바쁜 출근 준비 레이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나도 준비가 되었고, 아이들도 준비가 되었고 그럼 이제 집 밖 레이스를 시작해야 한다.
하필 오늘은 비가 오는 아침이다. 봄비인데도 빗줄기가 제법 세다. 게다가 오늘은 차량요일제로 차를 끌고 갈 수 없는 날이라, 걸어서 등교를 도와줘야 한다. 원래는 둘째만 데리고 나가고 첫째는 친구들과 함께 등교를 하였는데, 새 학년이 되고 친구들과 반이 나뉘어서인지, 요즘은 첫째도 나와의 등굣길에 합류를 하고 있다. 둘이 걸어가며 티격태격하는 게 피곤하기는 하지만, 이것도 한순간이다 싶은 어린 시절 추억이라 여기니 매 순간이 소중하다. 그렇게 두 아이와 등굣길을 기분 좋게 걸어가는 중이었다. 평소보다 수월한 아침 같아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둘째는 쉴 새 없이 떠들다가, 갑자기 나에게 물어본다.
"엄마, 드론 준비물은?"
잠시 5초간의 정적이 흐른다. 오늘은 방과후 수업으로 드론 수업이 있는 날인데 드론 준비물 가방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물론 아이가 직접 챙기는 것이 옳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언제나 준비물 챙기는 건 내 몫으로 되어 있는 현실이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드론수업 준비물이 없으니, 행복한 등굣길이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나는 아이에게 엄마가 집에 가서 준비물 챙겨 올 테니 먼저 학교에 가 있으라고 말했다. 불안한 눈빛으로 아이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뒤로한 나는 전력질주하여 집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오늘따라 비까지 오는 아침이니, 등교하는 아이들 우산 사이사이를 뚫고 지나가려니 여간 힘든 여정이 아니다. 길도 좁고, 숨도 차고 짜증이 막 나려고 한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다. 아이 준비물도 가져다줘야 하고, 나도 빨리 출근을 해야 한다. 집에 도착해서 드론 준비물 가방을 후다닥 챙기고, 다시 학교로 달려간다. 아니 달려가지 못하고 동동 걸음만 걸을 뿐이다. 좀 전에 아이와 헤어진 길을 우리 아파트 아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이었고, 그 길을 지나면 나오는 학교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 아이들이 합류하는 길이라 더욱더 복잡하다. 우산과 우산 사이를 뚫고 지나가기 힘든 길이다. 오늘 아침은 그냥 100m 달리기가 아니고 흡사 장애물 달리기이다. 나 지금 장애물 달리기 중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는데, 둘째에게서 전화가 온다. 학교에 항상 일찍 가야 하는 둘째는 교실에 늦게 들어갈까 봐 노심초사한 채로 학교 운동장 옆 스탠드에서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다 와간다고 말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해 본다. 학교 울타리가 보이기 시작하니, 울타리 안 스탠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사실 아직 등굣길에 아이들이 많은 시간인만큼, 지각할 염려는 전혀 없는 시간대였다. 그러나 걱정 한가득 안고 있을 아이를 알기에 발걸음에 더 속도를 붙여본다. 드디어 아이와 상봉!! 무사히 드론 준비물 가방을 넘겨주고 서로 포옹으로 아침인사를 마무리한다. 시크한 누나는 벌써 제 반으로 들어가고 없다.
아이와 헤어지고 학교 담장 옆을 걸으며 긴 호흡을 내뱉어 본다. 이제야 한숨을 돌린다. 봄비가 내리는 날 부리나케 뛰어다녔더니 땀이 나는 기분이다. 그런데 아직 나의 100m 장애물 달리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지하철역까지 빠른 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승객이 꽉 들어찬 지하철 칸으로 내 몸을 쑤셔 넣어야 한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이미 신발 안 양말 끝은 젖어있다. 축축한 양말처럼 내 마음도 축축한 채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