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스마일 딱지가 나에게 가지는 의미
장기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광주의 모 대학을 막 졸업하고 신입 딱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계약직 여직원이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과 사귄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녀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런데 그 억울함의 기저에 있는 생각이 나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학벌로 따져봐도, 사회적 위치로 따져봐도 내가 그 애를 만날 급은 아니지 않아?”
학벌과 직업을 기준으로 한 사람의, ‘친한 동생’의 가치를 처리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FM으로 보자면 그녀의 관점은 ’인성이 글러먹었다‘라는 평을 받아 마땅하지만, 여기에 섬뜩함을 느끼는 것도 “아직 사회에 적응하려면 멀었다-”라는 소리 듣기 딱이라는.
사람들은 바쁘다. 나쁜 게 아니라, 바쁜 거다.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다. 인간의 뇌는 병렬로 처리하기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는데, 사회 속도는 인간에게 ‘차근차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음미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고작 손에 쥔 단서 몇 가지만 가지고 한 사람의 가치를 감정하고 넘어가버린다.
나의 대학을 말할 때, ‘오늘 만나고 내일 헤어질’ 사람들의 표정에서 긍정 혹은 부정의 감탄사를 읽을 수 없었던 건, 그들의 나의 존재 가치를 학벌로 감정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시샘하지도, 비웃지도 않는 선에서 나를 처리한 것이었을 테다.
미루고 미루어 이십대의 끝자락에 섰다. 나를 더하거나 빼지 않고 투명하게 보여주었던 이 포장지도 유효기한이 다했다. 삼십대는 ‘직’과 ‘업’이, 사십대는 거주지가 나의 가치를 감정할 단서가 될 것이다. 고작 그 따위로 나를 처리할 사람들을 두고 나쁘다고 원망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바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을 그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수용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기준으로 삼는 단서만큼은 달리 해보자고 다짐해본다. 가정 환경이 아니라 옷매무새를, 학벌이 아니라 말씨를, 직업이 아니라 태도를, 재물이 아니라 분위기를 보자고. 그것을 오래 보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안목을 갖추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