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을 전후로, 가장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 대학 공부였다. 고등학교 시절보다 더 어려운 내용을 배워야 하고, 배우는 양도 많기에 좋은 성적을 내려면 고교생이던 때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대학 공부에 직접 부딪혀 보기 전까지는 굉장히 상충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마음속 어느 한쪽에서는 입시를 준비하느라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즐거운 캠퍼스라이프로 보상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대학 수업을 따라가려면 여태까지 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당위의식이 있었다.
대학 생활에 대해 거의 모르는 채로 첫 학기를 맞이한 시점에, 내적 대립에서 전자가 후자에 가볍게 승리를 거두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 보니 동아리 활동이든 대외 활동이든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았고, 서울 살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주위에 펼쳐지는 광경이 모두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한때 마음 한 켠에 있었던, 하루 10시간을 공부했던 고교 시절보다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관계와 새로운 일상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추억의 그림자에 가려져 시험기간에만 모습을 빼꼼 내밀곤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세상살이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보다 빠르게 깨닫게 되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수준이 높아 항상 따라가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하고 싶은 일들을 좇아 하루와 한 달을 잘게 쪼개다 보니 어느 영역에서도 생각만큼 역량이 늘지를 않게 된 것이었다. 교환학생까지 염두에 두고 한동안 토플을 준비했지만 외고와 국제고를 나온 동기들만큼 영어를 잘할 수는 없었고, 밴드 동아리에 들어가 멤버들 중에서 연습 시간을 제일 많이 썼지만 경험 많은 선배들과 동등한 실력을 쌓을 수가 없었다.
더욱 이쪽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든 것은, 더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으면서도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동기들 중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연합 학회에 가입해 토론 대회에서 수상을 한 친구도 있었고, 주중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에는 봉사활동에 나가는 친구도 있었다. 경쟁적으로 바쁜 일상을 소화하면서도 매사에 나름대로 결과물을 내고 있는 대단한 얼굴들에게 경외감까지 들었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경외의 이면에는 거의 항상 열패감이 따라붙었다.
대단한 친구들과 대조적인 삶을 보내는 시간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들과의 차이가 너무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외활동부터 해외 유학 경험까지 화려한 포트폴리오를 이미 구성해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그들과, 자기소개서의 공란을 채우는 것조차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졌던 자신의 모습이 대조될 때 느낀 감정은 차라리 비참함에 가까웠다. 물론 서로 다른 인생의 궤도에 올라탄 이상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했지만, 주위 사람들이 터득한 '노력하는 기술'을 혼자만 익히지 못했다는 심정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실제로 이것저것 손을 대보기도 했다. 하지만 넘어서기 힘든 벽에 부딪혔다고 느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방법을 찾기보다 벽을 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교환 유학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악보에서 도저히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부분에 맞닥뜨렸을 때, 그리고 진로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모두 택한 방식이 비슷했다. 원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벽을 뛰어넘을 방법을 찾기보다, 벽 옆으로 돌아가면 얻을 수 있는 편한 답을 취했던 것이다.
4학년이 되어 학교에 복학을 했을 때는 그것이 문제의 전부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쉽사리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세부터 다잡으려고 의식을 했다. 마지막 서울 생활이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지인들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만나고, 이런저런 조언을 구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기타 연습이든 전공 공부든, 노력해도 자력으로 뛰어넘기 버겁다는 느낌이 들면 선배나 친구들의 일정 중 협소한 빈 공간에 어떻게든 파고들어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했다.
노력의 방향성을 잡아줄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좋은 사람들 덕분에 1년뿐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물음으로서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질문에 소극적이었던 과거의 자신은, 그저 목표를 정해놓고 꾸준히 시간만 투자하면 언젠가 목적지에 도달해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올해에 이르러 방향성이 잘못된 노력은 자칫 시간 낭비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생겼다. 이것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과거의 자신에게 전달하고 싶어질 만큼 통렬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노력의 방식을 바꾸려는 과정에서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전보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연락을 자주 하게 된 것까진 좋았지만, 연락 상대의 답이 오는지 계속 확인하는 습관으로 인해 집중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답장을 빨리 해주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지만, 거의 누구도 지키지 않는 소위 '칼답'을 이쪽에서만 지키기 위해 주기적으로 핸드폰을 보게 된 것은 인생에서 집중력이 최저점까지 떨어지게 되는 원인이 됐다.
집중력의 감소는 연쇄 효과를 불러왔다. 무언가를 하다 핸드폰을 자주 보니 그만큼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리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해졌다. 그리고 집중도가 낮은 시간대가 다시 고스란히 핸드폰을 보는 시간으로 치환되어, 유튜브 영상을 보기 위해 자투리 시간을 당겨 쓰는 문제가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시간의 낭비가 돈의 낭비보다도 치명적이라는 말을 친구에게 곧잘 하곤 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용 시간을 잠식하고 있었던 것의 리스트는 다른 사람들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연락 창구인 카카오톡, 흥미 본위의 컨텐츠를 제공하는 유튜브, 트렌드에 둔감한 이에게 최신 음악을 들려주는 뮤직 플레이어 앱은 누구나 이용하고 있을 법한 것들이다. 그들이 시간의 레드 라인을 넘어오자, 대적할 방법을 강구하다가 지극히 근본적인 사실을 되새겼다.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인터넷에 연결해야 쓸 수 있는 앱이다
시험 기간에 돌입해서도 집중력 저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0월과 12월엔 공부에 필요한 자료를 전부 한글이나 파워포인트 파일 형태로 저장해 인터넷을 쓸 필요가 없게 만드는 셀프 극약 처방을 내렸다. 핸드폰 데이터나 와이파이를 꺼버리면 수업 내용과 관련해서 오는 공지도 바로 받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집중력 회복을 위해 리스크를 감수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연말에는 핸드폰을 서너 시간 쓰지 않고도 계속 공부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고, 잃어버렸던 노력의 질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많은 수업들을 듣고, 때로 이것을 왜 배우고 있는 건지 혹은 이것을 배워서 어디에 쓸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의문을 자주 품었던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캠퍼스를 돌아다녔던 4년간의 시간은 모든 것이 덜 여물어 있었던 자신을 숙성시키는 과정이었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 좀 더 겸허해져야 했고, 도전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했으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자신만의 답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입생 시절부터 주위에 특출 난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모인 광경에 익숙해져 무감각해진 나머지, 뛰어난 이들을 동경하기만 할 뿐 어떻게 하면 그들처럼 될 수 있을지에 관해 고민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들, 손에 잡히는 것들에 시간을 투자하다 보면 그럴듯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실패를 일찍 경험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 늦지 않게 알게 되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처럼 치열한 매일을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땐 어른들이 방향을 설계해줬기 때문에 노력의 방향을 생각할 필요 없이 노력의 양만 의식하면 되었다. 대학부터는 노력의 방향을 정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하며, 일을 하면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즐길 수 있는 것도 많아지는 만큼 집중력에 비례하는 노력의 질도 의식해야 한다. 방향과 양, 질의 3요소를 끊임없이 최적화하는 것도 상당히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일이다. 이것을 자력으로 다 해내기엔 24시간이 모자라다. 그래서 우린 주위 사람들이 필요하다.
적성검사에서 공간지각능력이 하위 10%로 판정되었을 때 외에는, 살면서 인지능력에 결함이 있다고 느낀 적이 특별히 없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의 지능을 가졌음에도 이런 교과서적인 교훈을 체득하기 위해서 20대의 절반을 소모해야 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러한 사실에 불쾌함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더 바람직하지 않은 곳으로 갈 수도 있었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현실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단 하나만이라도 좋으니 그들의 좋은 점을 본받자.
가장 최근에 만든 개인적인 신조다. 예전에 비해서는 나아졌지만, 아직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될 문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캠퍼스에서의 4년을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이들로부터 유무형적인 도움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 더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조언의 형태로 전달했던 인연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지금의 마음을 잘 간직하여 언젠가 다른 이들에게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2023년 새해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