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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훈느 Oct 01. 2021

혼밥 입문자가 된다는 것, wagas

'구' 상하이 외노자의 국수처럼 훌훌 읽힐 푸드 에세이

중국 파견 발령 첫 날.

 어지간한 일엔 당황하지 않는 대범한 성격의 십년차 직장인인 내가 갓 출근한 신입사원처럼 발을 동동거리며 초조하게 회사 건물 로비에 서 있었다. 평소같으면 차려입지도 않을 단정한 투피스를 입고, 면접 볼 때나 한번정도 신었을 하이 힐을 신고, 왼손엔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간 사무용품을 한데 담은 면세점 쇼핑백을 들고, 오른 어깨엔 멀티탭이며 마우스 패드며 노트 북 외에도 이것 저것을 잔뜩 쑤셔 넣은 노트북 가방을 맨 채, 왼 어깨엔 투피스에 어울릴 반짝이는 자그마한 미니 백을 걸치고 힘겹게 오른손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쏟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으로.

내 손에 들려있던 커피는 manner 커피의 뜨거운 아메리카노 s 사이즈. 커피 외에 간단한 빵도 살 수 있으며 저렴한 값에 맛이 괜찮아 같은 건물의 스타벅스보다 이곳을 애용했다

 9월의 상하이는 한국의 늦여름보다 더 더웠고, 출근 시간에 맞춰 사원증을 전달주러 로비로 나오겠다는 현지 인사팀 직원은 당연하게도 로비에 없었으며 - 나중이 되어서야 그녀가 생각하는 정규 출근 시간은 9시 반이며 내가 생각하는 출근시간과 45분 이상의 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하필이며 내가 근무할 사무실은 상하이 중심지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화려하고 커다란 건물에 있기에 각양 각색의 사원증을 목에 맨 직장인들이 파도 같이 밀려와 나를 힐끔 힐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나처럼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정장으로 차려 입은 직원은 이 건물에 거의 없고, 내가 상당히 튀는 차림으로 로비 한가운데 짐을 잔뜩 들고 서 있구나 하는걸 깨닫는데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어찌 저찌 인사팀 직원을 만나고, 노동계약서 한 뭉치에 페이지마다 사인을 하고, 사원증을 전달 받고, 자리를 배정받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함께 일할 부서 리더들과, 나보다 한참 먼저부터 현지에 와 일하던 한국인 주재원들에게 자리마다 돌아가며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와 어설프며 달뜬 자기 소개를 수십번 하고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 전원을 켜니 무선 인터넷이 먹통이다. 옆자리에 앉아 투도우빙인지(土豆饼, 감자와 채소를 넣어 기름에 튀긴 동글납작한 빵) 총요우빙(葱油饼,잘게 썬 파와 밀가루 반죽을 동글 납작하게 만든 뒤 기름에 지져낸 빵) 인지를 먹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14층의 IT 팀에 가보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답한다. 

 IT부서에 들러 인터넷 연결과 기본 보안 프로그램을 깔고 자리에 돌아오니 벌써 점심 시간이었다. 본사의 팀장님에게 저는 잘 도착했다는 인사 메일이나 메신저 한줄도 아직 쓰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과 작은 파우치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서거나, 1층에서 받아 올라온 배달 음식을 들고 삼삼오오 공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점심식사를 아직 어떻게 할지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나 하나인것 같았다.    

 새로 온 동료를 위한 환영회, 인사 차 리더나 선임급 동료들과 함께 하는 점심식사가 계획되어 있을거라 기대 했던 내가 조금은 부끄럽고 머쓱해져 카드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얼른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회사 안에 식당이 있어 점심값이나 점심 메뉴 걱정을 할 일이 없이 살던 나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 동네에서 혼자 한끼를 해결할 만만한 곳은 당연하게도 금방 떠오르지 않았고, 외모부터 외국인임을 뿜뿜하는 사람들이 천지에 널린 상하이인데도 내가 오늘 여기서 처음 일을 시작한 이방인임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고개를 똑바로 들고 구두굽 소리를 또각또각 내어 걸으며 허기를 채울 적당한 곳을 찾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w wagas. 간단한 음료, 식사, 디저트를 판매하는 델리로 baker&spice 와 같은 계열의 외식 체인. 

 '아 여기라면!' 시야에 주황색 w 가 써진 간판이 들어왔다.WAGAS 라는 상호의 가게였다. 통창으로 된 개방형 입구와 가게 앞에 세워둔 점심 특선 메뉴 리스트, 얼핏 보기에도 빼곡한 커피 메뉴판과 청결한 쇼케이스 속 케이크들을 보니 혼자 점심을 초라하지 않게 먹기 적당한 곳을 찾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가게 안에 이미 자리를 잡고 휴대폰을 벗 삼아 혼자 식사를 시작한, 목에 사원증을 맨 수 많은 회사원들을 보고 느낌이 왔다. '여기라면 혼자 외롭지 않게 무리에 섞여 자연스럽게 식사할 수 있어.'    

내가 시켰던 구운 연어 에너지 볼. 아래엔 귀리와 퀴노아 밥이, 위엔 구운 연어와 샐러드가 얹어진 탄단지 균형 메뉴.

메뉴판을 보자마자 앞으로 혼자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하고 뭘 먹어야 할지 막막할 때 내가 자주 여기 올 것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샐러드와 착즙 주스같은 가벼운 건강식부터 파스타나 쌀국수, 로스트 치킨 같은 배가 든든한 메뉴까지 모두 단품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가게 내부엔 일인용 식사 테이블이 빼곡했고 메뉴판의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직원들은 단정한 톤다운 앞치마를 맨 채로 정해진 구역 안에서 바삐 움직였고 가게 안 공기에서는 착즙 과일 주스, 희미한 간장냄새, 고기 굽는 냄새, 커피, 시나몬 롤 냄새가 한데 섞여 나고 있었다. 



  '어떻게 출근은 잘 했고 밥은 먹었냐'는 엄마의 카톡에 '어 잘 했고 이제 먹으려고 주문했어 걱정마' 하는 약간의 뻥을 가미한 답장을 보내고 나니 내가 주문한 구운 연어 에너지 볼이 금새 준비되어 나왔다. '살 찌지 않게 기름진거 많이 먹지 말고 음식 잘 가려 먹어라' 하는 엄마에게 '탄단지 밸런스 훌륭한 식사임' 이라고 사진을 한 컷 찍어 보내며 포크를 들고 연어 귀퉁이 한 조각을 떼어 먹었다. 기름에 데치거나 볶지 않은, 아삭한 생 채소를 찰기 없이 다글다글한 귀리 알갱이와 떠 먹으니 -몸매 관리를 포함한- 자기 관리 잘 하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된 느낌이었다. 이건 이렇게 잘랐고 저건 저렇게 잘랐구나 연어엔 소금 후추 말고 데리야끼 소스를 얇게 발라서 구운건가? 하며 한입 한입 먹다보니 어느 새 한 그릇이 비워졌다. 처음 하는 근무 중 혼밥이지만 놀랍게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하루에 대여섯잔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헤비 커피 드링커 답게 뜨거운 커피 한잔을 또 사서 오른손에 들고 사무실로 향하며 생각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혼밥이라면 앞으로 맨날 해도 할만하겠는데?' 허세로운 자신감에 피식 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으며 색색의 사원증을 목에 맨 수많은 회사원 무리에 섞여 다시 회사 건물로 총총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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