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밀스 <비기너스>
모든 사랑은 지독한 빈자리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결국 나는 저 구석으로 나를 밀어넣고야 만다. 상투적인 사랑의 말조차 허공을 맴돌다가 구겨진 종이로 가득찬 저 쓰레기통으로 쳐박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작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작한다.
영화의 후반부 올리버와 안나가 말다툼을 하는 장면은 묵음 처리된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들이다. 안나가 올리버의 집에 들어와 짐을 풀고 혼자 우는 장면은 끝내 설명되지 않는다. 왜 울었냐는 올리버의 질문도 대답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울음이 꼭 내 울음과 닮아있어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서 올리버는 대답을 종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슬프니까. 당신이 느끼는 이 빈자리가 결국은 나의 빈자리니까.
모든 것이 반복된다. 해가 지고 뜨고, 비가 내렸다가 그친다.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하는 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겨워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새로운 기대를 건다. 올해는 뭔가 행복한 일이 생기겠지, 생기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든 만들어야지. 분명 지난 해 나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모든 일상이 내가 나 자신을 실망시키는 것의 무한 반복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새로움을 기대할까.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는데도 왜?
결국 우리는 모두 초심자다. 영화의 제목처럼 비기너beginner다. 해가 바뀌고, 새로운 환경에 놓이고, 죽음을 지켜보고, 새 사람을 만난다. 계속되는 시작 앞에 입문자로만 남아있다가 상급자 코스는 밟지 못한 채 엔딩을 맞이한다. 암 말기인 아버지 할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본인이 게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밝힌다'는 것이다. 할은 청소년기부터 본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평생을 숨겨온 성지향성을 죽음 앞에서야 밝힌 그도 어찌보면 삶의 초심자인 것이다. 안다는 것은 어찌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의 머릿속에서만 벌어지는 일들은 결국 거기에서 끝날 뿐이다. 모든 시작은 행동으로부터 출발한다. 메타버스 같은 가상현실이 실현시켜주는 것도 결국 이러한 욕망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상상이 상상에서만 그치지 않고 실현되길 원한다. 비록 그것이 '진짜' 현실이 아닐지라도(이제는 그 '진짜' 현실이 전복되거나 대체될 가능성도 있다). 행동으로서 비로소 시작된 아버지의 욕망 실현은 제법 가까웠던 죽음으로 인해 얼마 가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관객으로서, 타자로서 할의 임종이 그리 슬프지만 않았던 것은 그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도 평온하고 행복해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온 할의 모습은 이제 막 새로운 것을 배우는 아이와도 같다. 책을 마구 사들이고, 정원을 가꾸고, 늦은 새벽 서재를 뒤집어 엎는다. 한 욕망의 실현이 모든 것을 새로 일깨우는 것이다. 올리버는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낀다. 나는 당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데, 당신은 마치 이제 시작인양 움직이고 있으니. 현재와 과거의 교차편집은 할의 시작과 죽음, 올리버의 시작을 번갈아 보여준다. 나를 가장 슬프게 만드는 것은 죽음을 앞둔 할의 얼굴이 아닌, 아직 한참 젊은 나이인 올리버의 얼굴이다. 암 말기 환자보다 건강한 청년의 모습이 더 죽음에 가까워보이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안나의 슬픔은 올리버의 상실로부터 비롯된다. 안나는 올리버의 슬픔을 한 눈에 알아본 사람이다. 파티에서 만난 두 사람은 몇 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슬픔을 짐작한다. 안나는 끊임없이 떠도는 인물이다. 그녀가 대체 어디서 왔고,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올리버도 우리도 알 수 없다. 몇 되지 않는 실마리로 그저 그녀 또한 지독하게 외롭고 슬픈 사람이라는 것이다.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올리버의 집에 들어온 안나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신의 슬픔이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녀는 슬프다. 그리고 나 또한 너무 슬픈 사람이라, 우리는 도저히 이 늪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는 검은 절망이 그녀를 뒤덮는다. 떠나는 안나를 잡지 못하는 올리버는 벽에 대고 울음을 터뜨린다. 슬픈데, 익숙해서 더 슬프다. 자꾸만 사람들이 나를 떠나는 게 너무 익숙해서 도저히 안나를 잡을 수가 없다. 그의 '시작'은 비로소 안나를 찾으러 떠나는 것에서 출발한다. 안나를 처음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은 결국 또 하나의 상실의 출발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올리버는 이 상실을 어떻게든 잡아보려 한다. 반복되는 상실의 굴레 속에서 무력하기만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시작하는 것 뿐이다. 그것의 결말이 상실일지라도, 시작조차 안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슬픈 일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이제 어떡하지?', '나도 몰라'라는 대화로 끝난다. 실패와 상실의 무한한 가능성에 두 사람은 서로를 던진다. 영화가 끝나면서 비로소 영화는 시작된다. 우리는 어차피 평생을 미숙한 인간인채로, 연습만하다가 떠나야 하니까. 우리 인생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일 뿐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그렇게 시작과 실패의 연속을 헤매다가 죽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한다. 그 무한한 실패의 가능성을 사랑한다. 우리 모두 지독하게 외로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내 외로움을 떠안는 것조차 힘겨움에도, 당신의 외로움이라도 서툴게 안아보려 한다. 그것이 내가 이 고독한 삶을 조금이나마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