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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수부 Jan 03. 2023

기억의 불완전함에 대한 영화의 고찰

코고나다 <애프터 양>


인간의 기억에 대한 영화의 관심은 꾸준했다. <메멘토>, <이터널 선샤인같은 영화들은 노골적으로 기억의 불완전함을 다룬다. <메멘토>는 기억 상실증이라는 병적 증세를 통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인간의 인지적 한계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다. <이터널 선샤인>에선 클레멘타인을 향한 조엘의 사랑이 변함에 따라 그녀의 머리카락색이 변한다인간의 기억은 한번 입력되면 사라지지 않는 불변적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환경과 물리적인 관계 내에서 유동적으로 변화한다클레멘타인의 머리카락색이 주황색이었다가 파란색이 되듯기억이란 현재와의 관계 맺음 양상에 따라 변화하고때로는 새로 생성되기도 한다. <애프터 양>에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인간 기억의 불완전성이다더 나아가 현재를 기록하는 영화 매체가 인간의 기억과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도 들여다볼 지점이다.


<애프터 양속 안드로이드 양은 제이크와 카이라 사이의 (입양아로 추정되는)딸 미카에게 중국 문화에 대해 알려주는 기능을 위해 존재한다제이크 부부는 양을 미카의 교육을 위한 기능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으나사실상 양이 가족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가정 내에서 양의 여러 역할 중 하나는 카메라의 역할이다영화의 첫 장면은 제이크 가족 세 명이 카메라 앞에 있고어서 이리 오라는 그들의 부름에도 잠시만요라며 카메라 앞에 서 있길 자처하는 양의 모습으로 시작한다양이 그들과 함께 프레임에 담기길 머뭇거리는 이유는 자명하다카메라는 영화에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영화의 시작부터 안드로이드의 시선과 카메라에 담기는 대상인 인간의 시선은 엄밀하게 구분된다찍는 주체인 카메라의 세계와 찍히는 대상인 제이크 가족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다영화가 후반부로 가며 그 세계는 오묘하게 뒤섞인다


카메라는 세계의 불완전함을 찰나에 포착한다영화는 그 찰나들을 의도대로 재배열하는 아카이빙 작업이다양의 기억장치 속 저장된 영상들은 양이 기억하고자 하는즉 의도대로’ 찍힌 기록물이다양의 기억 장치에 저장된 짧은 순간들은 양이 원해서 저장해둔 것들이다인간이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랑하는 이의 모습 앞에서 카메라를 들어 그 순간을 포착하듯양은 자신의 눈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원하는 순간을 저장해둔다그가 하는 작업은 영화를 만드는 일과도 같다영화는 사각의 프레임 속에 세상의 일부를 담는다욕망과 의도에 의해 배열된 사각 프레임 속의 세계는 불완전한 도구인 인간의 눈과 뇌를 대신한다

양의 기억을 재생하는 장면에서 영상을 보는 이와 양의 기억이 이질적으로 겹친다교차편집을 통해 두 기억의 차이점이 도드라지고누구의 기억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코고나다 감독은 어떤 것이 사실인지 증명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사실은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카이라와 양이 나비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에서 두 인물의 기억이 다르다카이라의 기억 속에서 양은 눈물을 흘린다그러나 양의 기억 속에서 그가 눈물을 흘렸는지는 교묘하게 얼굴이 가려져 알 수 없다제이크가 들여다본 양의 기억에 의하면양은 비록 안드로이드이지만 인간에게 애정을 느낀다그에게도 인간처럼 애착사랑 등의 감정이 존재하는 것이다그렇기에 카이라와의 대화 장면에서 양이 울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순 없다카이라와 양의 기억 속 드러난 차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더 확실한 쪽은 카이라의 기억 속 양의 눈물이 그때 당시 카이라의 슬픔으로 인한 왜곡된 기억이란 것이다. 두 기억 중 하나만이 사실에 가까울 텐데, 왜곡될 확률이 높은 것은 안드로이드보다는 인간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기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양과의 기억을 떠올리는 카이라의 감정과 그녀의 기억이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변화했을 수도 있다. 그때 양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지언정 그 당시를 회상하는 '지금의' 카이라가 슬프기에 기억 속 양은 눈물을 흘린 것이다. 과거가 현재로부터 영향을 받아 변화한 경우이다.

이렇듯 기억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사실은 가려진다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말했듯 오직 현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그렇기에 기억은 유기체다이미 지나가 버린여기 현실에 없는 것을 현재라는 도구를 통해 재구성하고꿰맞추며제거하거나 새로 탄생시킨다영화는 이 유기체를 이미지를 통해 잡아두고 재구성하는 운동이다.

인간의 기억이 사실에 근거한 불변적 진리라는 오만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진짜 인간이 되고 싶지 않느냐는 제이크의 물음에 복제인간 에이다는 그것이 지극히 인간 중심주의적 오만임을 환기한다코고나다가 설정해 놓은 영화적 세계에는 여러 문화가 융합되고 복제인간과 안드로이드가 사람 모습을 한 채 돌아다니지만인간이 모든 생물체 중 가장 고등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오만은 그대로 남아있다. <애프터 양>의 정적이고 아름다운 화면 사이를 들여다보면 사실상 그 안은 인간의 오만으로 가득하다영화의 등장인물 중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안드로이드와 복제인간들은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탄생한 것들이다인간은 휴먼로봇을 만들며 그들이 인간을 닮았으나 너무 똑같지는 않은 것을 원하고주체적으로 움직이길 원하나 감정과 자아를 가지면 공포심을 느낀다인간이 로봇에게 인간의 인지능력을 넣는 순간 그것은 창조자의 손을 떠날 수밖에 없다

에일리언 시리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휴먼 안드로이드들은 자신의 창조자를 배신한다목적 이외의 것을 행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고 자아가 형성되며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경계는 허물어진다시간이 흐른 뒤 나온 에일리언 시리즈의 프리퀄 작인 <프로메테우스속 안드로이드 데이비드는 자신의 창조자인 인간을 모두 학살하고 진짜 창조자를 찾고 더 나아가 자신이 생명의 창조자가 되려 한다더 이상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안드로이드는 이미 철 지난 희망임을 우리는 여러 영화를 통해 확인하였다그렇기에 양의 기억과 인간의 기억들이 교차하는 장면은 순간의 섬뜩함을 선사한다절대적 사실이라 믿었던 인간의 기억이 그 어떤 것보다 불확실하고 가변적이라는 것을 양의 기억이 증명하기 때문이다진실을 가려내는 작업 속에서 권위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의 의도대로감정적 요소가 작동하지 않는 로봇이다인간의 기억이 완전하다 믿으면서도 그것의 불완전함 또한 믿는 모순은 결국 카메라와 기계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이미지는 끝없이 진실을 가려내려는 인간의 욕망에 기대고 있다

양이 제이크와 차에 관해 대화하는 장면에서 양은 시간과 장소에 대한 진짜 기억을 가지고 싶다고 말한다그는 안드로이드의 기억 대신 사람의 기억이 갖고 싶은 것이다양이 말하는 진짜 기억이 무엇인지는 영화를 관통하는 화두이다양이 말하는 진짜 기억은 제이크가 차에 대해 설명하던 것처럼 그 안에 맥락과 감정이 담긴 재구성된 산물이다그는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기록물일 뿐인 자신의 기억을 진짜 기억이라 생각하는 대신불완전한 인간의 기억을 진짜 기억이라 여긴다단순히 이미지화되어 기록된 정보는 양에겐 진짜가 아닌 기억이다이 지점에서 이미지와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 사이의 위계질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을 불신하여 순간을 이미지로 기록한다카메라는 도구일 뿐이다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미지는 인간의 눈과 뇌가 가지고 있는 기능을 모방한다양이 인간의 기억을 진짜 기억이라 말했듯이미지는 결국 인간의 역동적이고 불완전한 기억 능력을 따라가려 한다

영화의 역사는 기차가 도착하는 모습을 포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사 양식을 통해 삶을 모방하고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영화는 단순히 현실을 모방하는 매체가 아닌인간이 욕망하는 대체 현실로서 작동한다불완전한 인간의 기억을 대신하여 이미지를 기록하는 영화의 역할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기억만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을 흉내 내는 것이다다소 비약적일 수 있으나 <애프터 양>은 코고나다의 영화 만듦에 대한 메타적 고민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전작인 <콜럼버스>는 지나간 기억을 다시 현재로 호출해 그것들이 운동하는 순간을 건축적으로 구성했고, <애프터 양>은 카메라와 인간의 눈이 가진 관계의 고찰을 통해 진짜 기억의 존재를 물었다과거의 호출과 현재의 포착은 결국 영화를 통해 투사된 인간의 욕망이다그러니 우리는 코고나다의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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