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설명하는 문장 중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공부를 잘한다, 그 사람은 키가 크다, 저 친구는 수입이 적다는 발언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러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우리는 비교 없이는 누구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빈번하게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타인들을 비교하고, 가까운 사람과 나 자신도 비교하고, 내가 속한 집단과 그 외의 집단도 비교한다.
원활한 비교를 위해서는 대상으로부터 특정한 성질을 따로 분리해내야 한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X축만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그래프 위에서 비교를 수행한다. 평가의 지표가 재산이나 유명세가 되었든, 성품의 고귀함이나 지적 능력이 되었든 딱 한 가지 특성만을 꼽아서 어떤 이는 조금 더 좌측에, 또 다른 이는 조금 더 우측에 올려놓고 그 차이를 가늠하는 것이다. 두 가지 이상의 특징을 한꺼번에 비교하기 위해 Y축, Z축 등을 추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대상에게서 특정한 성질을 분리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대상의 완전한 물화(物化)를 뜻한다. 마치 전자기기에서 배터리나 저장 장치 등 각각의 부품을 따로 분해할 수 있듯이, 인간의 특성들도 그런 식으로 독립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는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을 막론하고 유기적이다. 그러므로 규격화된 제품처럼 일부분을 떼어내서 평가하는 것은 단편적이고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쓸모가 있지만, 그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내가 어떤 수준의 사람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비교를 통해 찾은 자기 위치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또는 소식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바뀌면 나 자신에게는 정작 아무런 변화가 없더라도 나에 대한 판단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설령 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인의 어떠한 특성이든 실시간으로 순위를 매길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평가일 뿐이지 누군가의 절대적이고 고유한 특성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습관적으로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잘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막연하게 불안하고 두렵고, 후회된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인 시각에서 내가 평균보다 잘살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판단의 기준이 소위 말해 ‘속물적’이든, 아니면 내적 성장이나 지적 성취와 같이 더 고차원적이든, 타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가늠하려고 하는 태도는 그만큼 내가 흔들리고,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비교하고 가늠하는 행위는 열등감과 우월감의 원천이다. 세상에 나무가 한 그루만 있다면 그 나무가 큰지 작은지, 굵은지 가는지는 알 수 없다. 개별 나무의 고유한 특징이란 옆에 있는 여러 나무에 의해서 정의된다. 유독 잎이 많거나, 유독 가지가 높게 뻗었다든가 하는 특징들은 나무의 독자적이고 내재적인 특성이 아니라, 단지 같은 종의 나무에 비해 이러저러한 양상을 보인다는 뜻일 뿐이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한 나무는 마치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키 큰 나무인 것처럼 우쭐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유독 잎사귀의 수가 적은 것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보고 우월감을 얻는다고 한들, 또는 과거의 나 자신과 비교하여 나아졌음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한들 그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스스로 저울에 올라가 과거의 나든,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이든 끝없이 반대편에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피곤한 행위를 하면서 평온이 올 수는 없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런 판단이 우리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데에도,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도, 심지어는 더 많은 성취를 이루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저울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의식에 불과하고, 내가 강하게 나의 특성이라고 믿는 사실들은 언제든지 변하고 사라지고 달라지기 마련이다. 스스로 이러하다 저러하다는 생각에 갇힌 사람만큼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사람도 없다. 외모부터 재산이나 지적 능력, 재능, 인간관계 등 나를 이루는 모든 특성을 완벽하게 만드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 자신을 분해하기를 그만두고, 스스로를 물화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온전히 존재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온갖 것들을 담을 수도 있는 그릇을 굳이 조각낼 필요가 있겠는가. 내게 본질이란 것이 없고, 있더라도 한 마디로 표현될 수 없으며, 그것의 객관적인 수준을 가늠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누군가의 우월감을 충족시켜주고, 또 누군가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어떤 저울질을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 저울에 올라가지 않기로 한다면 비교하고 싶은 마음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또는 못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알고 싶겠지만, 너무나 궁금한 그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저 존재하기를 선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