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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Dec 03. 2021

무례와 굴욕 사이

    배려심을 적절히 발휘할 줄 아는 능력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일터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거나 원만하게 지내기 위해 한발 물러서곤 한다. 그러나 차례를 양보하고, 사려 깊은 어투로 대화를 하는 행위는 상당한 양의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한다. 사회는 그런 정신적 자원을 윤활유 삼아 그럭저럭 갈등 없이 굴러간다고 볼 수 있다.


    이상적인 사회에서 예의와 배려는 양방향으로 주고받는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베푼 만큼 호의를 돌려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은 B가 불쾌할 만한 화제는 절대로 꺼내지 않는데, B는 늘 A의 사생활을 캐묻거나 은근슬쩍 비하한다는 식의 일화는 무척 흔하다. B가 배려심을 발휘할 의지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럴 지능이 모자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A 입장에서는 관계를 빠르게 정리하는 것이 해답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문제를 조금 더 깊이 파고들 여지가 남아있다.


    예의를 차리는 것과 상대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굽신거리는 행위는 명백히 다르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방향의 배려와 양보란 굴종일 수밖에 없다. 상대방을 헤아려주는 태도는 개인의 소중한 정서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며, 상대방과 비슷한 수준의 호의를 주거니 받거니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고갈되고 만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배려를 헌납하고 상대에게서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하는 경험은 우리를 내면에서부터 갉아먹는다. 곱씹을수록 비굴하리만치 일방적으로 잘보이고자 애썼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될 때, 차오르는 굴욕감 앞에서 우리에게 남는 선택지는 합리화 아니면 자기 비하뿐이다.  


    정서적 자원 낭비(또는 일방적 수탈)의 부작용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불공평한 관계의 역학을 관례라는 단어로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명백한 권력 차가 있는 관계에서의 불합리함을 받아들이면 그 사례가 마치 미덕인 것처럼 포장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연중에 강요되기 십상이지 않은가. 이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언제나 발생할 위험이 있는 일이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예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무례하지 않은 수준에서 자신의 정서적 자원을 보호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만약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를 물어본다면 그는 중용을 따르라고 답할 것이다. 중용의 관점에서 예의의 모자람은 무례이고, 반대로 과도한 예의는 굴종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실생활에 적용하기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 어느 선까지 예의를 차려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서부터 선을 그어야 하는지가 명확하다면 처음부터 우리가 혼란스러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의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일방적으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여러 관계를 유지해나가고 있는지를 짚어보는 것이다. 다음의 질문에 정직하게 답해보자. 첫째로, 나는 타인이 두려운가? 둘째로, 나는 사회적 평판이 깎이느니 굴욕적인 상황을 감수하는 편을 선택하는가? 두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면 당신의 배려는 잘 포장된 두려움일 수 있다. 상사, 교수, 대표, 가족, 때에 따라 사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순수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 그들을 배려한다기보단, 그들에게서 나올 당신에 대한 평가와 평판이 두려워서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문제 해결의 핵심은 누구도 어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넘치고 잘난 사람이어도, 당신이나 나와 같은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아무리 집단 내의 영향력이 커서 당신의 평판을 망가뜨리기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큰 그림에서 당신의 인생을 스쳐 지나가는 아무개일 뿐이다. 정말로 대단한 위인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당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전전긍긍한다고 해서 무엇 하나라도 이득이 있는가? 물론 그들도 당신의 배려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계속해서 그런 다정함을 베풀지, 아니면 그만둘지는 오롯이 당신의 의지에 달린 일이다.


    당신이 관례를 벗어나는(얼핏 무례해 보일 수 있는) 대응을 하고, 여기에 대해 제아무리 말이 돈다고 해도 소문은 금방 사그라든다. 상사의 불쾌한 농담에 맞장구쳐주지 않고, 나와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충족시키려는 지인에게 답장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일시적으로 튀는 행동으로 보이겠지만, 모든 순간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설령 당신이 온 힘을 다해 노력하더라도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이해 안 간다는 식의 험담을 들을 수도 있다). 안하무인한 태도로 살아갈 이유는 없지만, 모두에게 강박적으로 배려를 나눠줄 필요도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어려운 상대를 떠받들어주지 않을 때 받는 의아한 시선과 뒤따르는 말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때론 그런 감정에 의해 습관적으로 저자세를 취하고, 불쾌함을 숨기고, 진정성 없는 싹싹함으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그런 행동들은 어디까지나 선택 사항이지 의무가 아니다. 당신의 배려는 귀하고 다정함에는 한계가 있다. 누군가에게 주는 배려를 거둬들일 때가 온다면 그렇게 하라. 그렇게 해서 잃을 평판이나 관계라면, 그렇게 두어라.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큰 선물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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