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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렌디피티 Apr 21. 2023

나 화나는데, 화내도 되는 상황인 거 맞지?

오늘도 내 감정의 정당성을 검사받기 위해 남편을 기다리며

허구한 날 싸움을 하는 부모를 보고 괴로워하는 만 7세 딸은 엄마에게 말한다.

"내가 괜히 태어난 거 같아, 내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엄마는 늦게라도 아빠 말고 다른 남자랑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 (딸아이의 임신으로 이 부부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이 말을 듣던 엄마는 얼굴을 찌푸리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응수한다.  

요새 한창 방영 중인 '오은영의 리포트' 중 한 장 면이다.  이 장면을 되돌려 보며 오은영 박사는 말한다. "어머님은 아이가 이런 말을 하는 상황에 대해서, 그 말을 하는 아이의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이 상황이 불편하고 힘드신 거 같네요, 아이가 어렵게 꺼낸 말에 '쓸데없는 소리'라고 말해주는 건 아이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노력(부부싸움을 말려보려는)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무력감과, 두 번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쓸데없는 거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나중에 아이가 커서 화가 나는 상황이 생기더라고 자신이 화가 나는 감정을 쓸데없다고 느끼게 돼요."


오은영 박사의 말씀을 듣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이 멍해졌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바로 '내 모습'이었다. 그때그때 느끼는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그 감정이 들었던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러고 나서는 타인이 "네가 화가 날만 하다."라는 말을 얹어 줘야 비로소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당하다는 당위성을 갖게 되는 것, 바로 '감정검열'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나니 사십 평생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한마디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학교에서 속상했던 일, 사회에서 속상했던 일을 설명하며 내가 화가 나도 되는 상황이냐고 되물었고 이젠 남편이 그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더 웃긴 건,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일은 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마음먹어놓고 얘기를 털어놓았을 때에도 남편이나 엄마가 "그걸 그냥 가만있었어? 나 같으면..." 하는 말을 들으면 갑자기 고요하던 내 마음에 다시 폭풍우가 내리치고 세찬 바람이 불어 요동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내 감정의 주인은 오롯이 내가 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아야만 마음껏 화를 낼 수 있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봤다. 어쩌다가 내 감정은 검열을 받게 되었을까?

딸하나 단단하게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던 나의 아버지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다.

아버지에게 호통을 들었을 때나 민망한 상황에서 훌쩍거리기라도 하면 곧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꼴 보기 싫어, 난 네가 우는 게 젤 꼴 보기 싫다."

그 말을 듣고도 울음을 그치지 못한 여자아이는 말미잘에 숨어 적을 피하는 작은 물고기가 되어, 말미잘의 더욱 깊숙한 부드러운 속살을 찾아 파고들었다. 우는 건 수치이다, 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고 꼴 보기 싫은 일이다라는 개념을 장착한 채로 한 살 한 살 자라났다. 그렇게 이런 내 모습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젠 알았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누군가에게 납득을 시킬 필요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필요도, 박수를 받을 필요도 없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라는 걸. 그리고 다짐한다. 나의 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검사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하고 싶다. 그때그때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당당히 마주하고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나의 감정과 나는 친숙해진다. 그런 친분을 쌓게 되면서 비로소  내가 나를 다룰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되어 간다. 나의 아이들은 그런 어른이 되어 가길 가만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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