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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렌디피티 May 09. 2023

김밥집 아주머니가 내 딸을 보더니 한 말

황희정승과 소 두 마리

몸살이 왔다. 으슬으슬하고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쫄깃하고 탱탱한 매콤한 쫄면이 생각나서 아이가 다니는 학원 근처 김밥집으로 향했다. 쫄면 맛에 취해 아이의 하원시간이 다 된지도 모르고 있다가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잠시 후 딸아이가 들어왔다. 작고 귀여운 아이의 등장에 점심식사를 하시던 김밥 집 아주머니들이 시끌벅쩍하게 아이를 반겨주셨다. 한 아주머니가 "한 1학년쯤 됐겠네." 딸아이는 "저, 2학년이에요."라고 답했다. 그 아주머니는 "어머, 2학년 치고는 애가 작다, 약해 보이네. 얘, 밥도 잘 안 먹죠?"아주머니 들을 등 지고 앉아있던 딸아이의 얼굴에 먹구름이 낀다. 그렇다, 아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 또래보다 한참 작은 키, 또랑또랑한 큰 목소리를 지니고 발표를 잘하는 발표대장인 딸아이는 '키'라는 단어 앞에만 서면 자신의 키보다 한 없이 작아진다. 아이의 얼굴을 보며 아주머니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을 할까 망설여졌다. "성장호르몬에 문제가 있어서 또래보다 좀 작아요, 그렇지만 현재 치료를 받고 있고 조만간 많이 클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순간 아이가 날 보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주머니는 내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계속해서 애가 잘 안 먹어서 그럴 거라는 둥, 너무 작다는 둥, 본인 아들은 학교 다닐 때 키가 젤 커서 항상 키로 반에서 일등이었다는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아이의 얼굴과 아주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쫄면을 후다닥 입에 쑤셔 넣었다.  좀 전까지 시원하고 아삭한 양배추와 어우러진 쫄깃한 쫄면의 면발이 이상하리 만큼 흐물거리고 느끼하게 느껴졌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들판에 소 두 마리가 밭을 갈고 있었다. 누런 소와 검은 소였다. 그 길을 지나던 황희정승은 농부에게 가서 큰 소리로 물었다. "이 두 마리 소 중에 어떤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 그러자 농부는 중요한 비밀을 말하듯 황희정승이 있는 곳으로 뛰어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런 소가 더 일을 잘하오, 검은 소는 가끔 꾀를 부린다오."

왜 여기까지 달려와서 귀에 대고 말했냐고 되묻자 농부는 말한다. "아무리 짐승이라고 해도 제 흉을 들으면 좋아하겠소?" 황희정승은 큰 깨달음을 얻는다.

아무리 9살짜리 아이라고 해도 제 흉은 듣기 괴롭다. 아이에게도 생각이 있고 판단이 있고, 감정이 있다.

식당을 나와 길을 걷다가 가만히 아이에게 물었다.

"아까 기분 나쁘지 않았어?"

아이는 대답한다.

"아이 뭘요, 저 키 가지고 기분 나쁜 거 그런 거 이제 안 해요."

괜찮다고 말하는 아이의 눈가에는 아침이슬 같은 것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세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이 있다. 오늘 나와 말씀을 나눈 세 분의 아주머니 중에도 나의 스승은 있었다. 남의 허물을 보기 전에 나 자신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또 나는 어딘가에서 말을 함부로 하여 소중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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