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의 삶을 짊어지는 무게
500원짜리 컵 떡볶이 하나에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던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김동률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마치 단편 영화 같은 서정적인 분위기와 감성적인 가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그때부터 김동률의 음악은 철없던 어린이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어른이 되니 그의 노래가 전하는 감정이 더 깊이 와닿았다.
김동률의 노래는 마치 새벽녘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 같다. 잔잔히 스며드는 빛의 줄기가 마음을 비치며 그동안 잊고 있던 감정들을 서서히 깨운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지만 깊은 울림을 담고 있다. 가사는 볕뉘에 깃든 섬세한 온도로 마음을 어루만진다. 특히 ‘동행’이라는 노래는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여정을 담고 있으며 진심 어린 위로와 공감을 전한다. 그의 음악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온기를 남긴다.
“네 앞에 놓여 진 세상의 짐을 대신 다 짊어질 수 없을지는 몰라도 둘이서 함께라면 나눌 수가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김동률의 ‘동행’을 들을 때마다 ‘이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상대방의 짐을 온전히 대신할 수는 없지만 그 무게를 함께 나눌 수는 없을까 하는 질문처럼 말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이해’를 이렇게 정의한다.
1.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2. 깨달아 앎.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임.
3.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자세. 누군가를 ‘이해’하는 마음은 세 번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해한다’라는 말을 할까? "정말 힘들었겠다." "그 마음 알 것 같아."라는 말로 마무리했던 순간들이 있다. 때로는 상대방의 고민을 다 듣기도 전에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라고 단언하며 그들의 상황을 단순화해 버린 적도 있다. 그때 내가 이해했다고 믿었던 것은 정말 상대방이었을까, 아니면 내 안의 작은 위안이었을까? 그 말을 들은 상대는 정말로 마음이 가벼워졌을까?
반대의 상황도 있다. “저 사람은 왜 저래?”라며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이나 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 그들의 태도를 납득할 수 없는 이유가 겹겹이 쌓일 때마다 무력해진다. 그들을 이해하려 애쓰다가 염증이 나듯 온몸이 쑤신다. 결국 ‘이해’라는 단어를 뜬돈을 낭비하듯 사용하다 보니 스스로가 무너지고 정작 소중한 나 자신을 이해할 여력마저 잃는다. ‘이해’는 무거운 뜻을 지니고 있는 것에 비해 가볍게 소비된다.
이해라는 건 단순히 맞장구를 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아니다. 이해는 김동률의 ‘동행’처럼 짐을 함께 짊어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삶을 두 손 위에 올려두고 그 무게를 온전히 느끼는 과정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결국 그 짐을 덜어내려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이해했다.”라며 믿는 척을 했다. 이해는 절대 가볍지 않다. 그 사람의 아픔, 고민,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두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제는 이해를 쉽게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이의 삶의 무게를 가늠한다. 그래야 스스로를 놓아 버리지 않고 상대방을 향해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진정한 이해란 때로는 느리게 걷더라도 곁을 지키는 과정이다. 그 사람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 무게를 인지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무거운 짐을 기꺼이 나누려는 노력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네 앞에 놓여 진 세상의 길이 끝없이 뒤엉켜진 미로일지 몰라도 둘이서 함께라면 닿을 수가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언젠가 무엇이 우릴 또 멈추게 하고 가던 길 되돌아서 헤매이게 하여도 묵묵히 함께하는 마음이 다 모이면 언젠가는 다다를 수 있을까.”
노래의 마지막 가사가 머릿속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