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2개월을 마치고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돌아오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과 네덜란드는 평행우주 같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전혀 새로운 곳이랄까? 일주일 정도 지난 지금은 시차도, 뚝 떨어진 기온차도, 너무 다르지만 어쨌든 우리가 계속 살아온 우리 가족의 생활습관이 다시 익숙해지고 있다.
귀국하는 날 다정한 시부모님이 공항에 마중을 나와주셨다. 우리가 한국에 있는 마지막 주에 주말에 먹을거리 장도 보아주셨는데, 네덜란드 주식이다.
빵, 계란, 치즈, 우유, 버터.
20개월 아이한테 줄 우유와 토스티(치즈를 넣고 파니니 기계에 눌러 따뜻하게 먹는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다. 오랜만에 먹은 네덜란드의 빵은 건강하고 고소하다. 빵에 질려하던 아이가 한국의 보드라운 우유식빵을 너무 잘 먹어서 첨가물 확인을 했을 때 설탕이 들어가 그렇다는 걸 알았는데, 이 빵은 설탕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연탄처럼 새까매서 비주얼 쇼크였다. 호밀빵보다 더 검지만 오징어 먹물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냥 검더라. 보드랗고 달콤한 우유식빵과 새까맣고 퍽퍽하지만 담백한 네덜란드 식빵의 대조다.
빵이 주식인 네덜란드라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구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맛이 없지는 않다. 뭐든 익숙해지기 나름이지만, 달지 않은 빵을 먹으니 어쩐지 디톡스 하는 기분이고 귀국 후 먹는 네덜란드의 음식으로 이만한 게 있을까 싶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소울푸드는 이런 단순한 식빵이다. 그리고 자리 잡을 때까지 샌드위치에 이것저것 넣어먹고 봉지를 뜯어 데우는 수프 (토마토 수프)를 먹었다. 금방 없어져 버린 빵 한 봉지 (우리나라에서 파는 한 봉지의 2.5배이다)를 보며, 우리 가족이 더치가 되었나 싶었다. 하루에 두끼에서 세끼가 빵인 네덜란드 가족들처럼 말이다.
자연스레 요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의 그리운 점, 돌아와서 느끼는 문화차이다. '탈네덜란드'를 꿈꾸는 남편은 모든 게 다 한국이 낫다고 하는데 (그중 하나가 어린이집이다 -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그래도 네덜란드의 의료시스템에 대해서는 좋은 생각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오늘도 아이 독감 예방 접종을 위해 가정의에 전화를 하니 '의료적 필요가 없다. 의무가 아니다'라는 답을 들었다. 한국의 의사 선생님은 독감 주사가 필수인 건 세계 어느 나라나 똑같다는데, 네덜란드가 아니라는 점은 몰랐나 보다. 네덜란드에서 일반 영유아에 대한 독감 주사는 필수가 아니지만 원한다면 맞힐 수 있다. 가정의는 B형 간염 백신을 맞으려는 남편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다. 맞을 필요 없지만 맞고 싶으면 보험 없이 자기 돈을 내고 맞으면 된다. 피부 염증 문제로 전화를 해도 비슷한 말을 듣는다.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항생제를 처방하고 쓸 수 있지만, 항생제를 쓴다면 나쁜 세균뿐 아니라 몸 안의 좋은 세균도 죽인다. 몸이 자연히 치료하는 방법도 있으니 기다려볼 수 있다'. 항생제와 관련된 모든 질문에 무슨 대본이라도 읽듯이 매번 같은 대답을 하는 것이 우리 가정의다. 내가 한국에서 손가락이 까졌다가 염증 때문에 부풀어 올랐을 때 동네 피부과에서 항생제를 1주일치 처방받고, 그날 엉덩이 주사까지 맞았던 것에 비하면 정직한 느낌이다.
요는 네덜란드는 치료 방식에 있어 어떤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를 준다는 점이다. (의료지식이 없는 일반인에게 선택이란 책임의 전가일 수 도 있다.) 역아인 아기를 자연분만할 수 있는 것도 선택이다. 우리나라라면 백 프로 제왕절개이다. 좀 더 복잡한 의료상황에서는 (내가 겪은 건 시험관아기 시술이다) 절차에 갇혀있는 것 같은 게 네덜란드라 사실 단정해 말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설탕이 안 들어간 담백한 빵처럼 대체로 정직하고, 소비자로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 네덜란드식 사회의 단면이다. 스산한 공기가 가득한 네덜란드의 가을이지만 공기청정지수는 높다. 깨끗하고도 차가운 공기 속에서 다가오는 겨울을 느낀다. 이번 겨울에는 또 어떤 일들을 마주할까. 우리는 네덜란드의 어떤 점이 반갑고, 한국의 어떤 점을 그리워할까. 두 가지 문화를 동시에 사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