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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완 Jul 07. 2023

물이 없었다면

숙소운영자의 물 예찬론


어느날 설거지를 하다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을 바라보면서 문득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접시에 묻은 음식물을 흐르는 물에 씻겨내리는데, 원상태의 접시로 돌아가는 그 과정이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애당초 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접시와 그릇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렵혀진 상태를 본디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것은 모두 이 깨끗한 물님 덕분 아니던가?


숙소를 운영하면서 설거지와 청소, 빨래는 제가 매일 반복해서 하는 일입니다. 아이가 셋 이상 있는 주부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이가 하나정도 있는 주부만큼은 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놓는 일입니다. 그릇과 접시, 방과 주방의 상태와 물건의 위치, 침구류 등을 손님이 방문하기 전의 상태로 복원하는 일을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모든일은 물 덕분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물이 모든 집안일을 가능케하리라


1. 설거지

물이 없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예전에 군대에 있을때 최전방 GOP에서 반나절쯤 단수가 됐었는데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난 식판을 여러사람이 돌아가면서 고여있는 더러운 물로 씻었습니다. 식판이 느껴야 할 말도안되는 찝찝함을 제가 대신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노지 캠핑을 가지않는 이상 물은 생활주변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그 소중함을 잊기 쉬운것같습니다.


2. 청소

크게 쓸기와 닦기로 나뉘는데 쓸기에는 물이 없어야하고 닦기에는 적당량의 물이 필요합니다. 가끔 욕실 청소를 할때 물이 바닥에 흥건할때가 있는데 이럴땐 쓸기를 할수없습니다. 바닥의 물을 먼저 제거하고, 말리는 시간을 가지고(30분 이상), 쓸고, 닦습니다. 닦을 땐 적당량의 물이 걸레에 있는것이 중요한데 흥건하면 닦은 후 물자국이 남기때문에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건조해도 잘 닦이지 않습니다.


3. 빨래

숙소에 있는 16kg 세탁기와 비슷한 사이즈의 건조기는 빨래의 대부분을 처리해주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숙소들은 세탁기와 건조기를 손님들의 동선과 겹치지않게 분리해놓는데, 저는 집이 좁아서 주방 한켠에 두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빨래와 건조가 필요한 손님들이 눈치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정말 이상하게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고장에 대한 위험은 극히 낮습니다. 


일상적인 빨랫감들은 이 똑똑한 기계들이 처리해주지만 가끔 특수한 상황이 생기곤합니다. 수건이나 이불에 눈에 띄는 얼룩이 발견됐을 땐 일반적인 빨래방식으로는 제대로 없애기란 어렵습니다. 그럴땐 전 락스를 사용하는데, 숙소를 운영하면서 락스에 대한 인식이 바꼈습니다. 이전에는 락스를 주로 욕실 변기주변에서 봐와서그런지 더러운환경에서 사용하는, 지독한 화학용액이자 피부에 닿으면 끝장인 무시무시한 녀석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켜 표백능력이 극대화되게 발명된 액체일뿐이라는걸 알게되었습니다. 과탄산수소나 구연산처럼요. 하지만 냄새가 좀 나기때문에 락스에 빨랫감 전체를 담그진 않고, 얼룩진 부분만 콕 잡아서 물에 희석된 락스에 10분이상 반응하게 합니다.


또다른 특수한 상황은 걸레나 행주에서 잡냄새가 나는 경우입니다. 이럴때는 보울에 행주를 넣고 구연산과 베이킹소다를 충분히 뿌린후 끓인물을 부어줍니다. 그럼 촤 하는 소리와함께 기체(CO2)가 발생하는데 이 상태로 물이 미지근해질때까지 두고 헹궈주면 잡냄새가 없어지고 뽀송한 걸레와 헹주로 되돌릴수있습니다.


4. 불림

행주를 뜨거운 물에 불리는 이유는 행주와 오염물질을 분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연산과 베이킹소다를 추가하고 물의 온도를 올리는 것은 '물에 불림'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고요. 오랫동안 물에 들어가있으면 손과 발 끝이 쪼글쪼글해지는것도 똑같은 '물에 불림' 효과입니다.


저는 이런 '물에 불림'이 물질의 상태를 바꾸는 스타일이 정말 신사답다고 생각합니다. 무슨말이냐면요. 불과 비교해보면, 불은 닿기만하면 물질의 원래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크게 변화시킵니다. 용서와 자비따위 없습니다. 하지만 물은 물질에 닿아도 충분한 시간을 주면서 느린 속도로 변화를 진행시킵니다. 게다가 변화의 방향을 다시 되돌릴수도 있습니다. 물속에서 쪼글쪼글해진 손과 발은 물바깥에서 복구됩니다. 만약 '물'이라는 주어를 숨기고 수수께끼 문제를 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초능력'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불이 성전환수술과 같다면 물은 간단하게 옷만 바꿔입는 정도입니다.


'불림'은 또다시 자비롭게도 모든것을 다 불리지 않습니다. (불은 모든걸 다 태우죠) 물은 욕조에 묻은 때만 불리지 욕조까지 불리진 않습니다. 물은 접시까지 불리지않고 딱 음식물만 불려주니 얼마나 고마운지요. 잘 안떼지는 얼룩도 오래두면 언젠가 불려지고, 그래도 안되면 물 온도를 높이면 되고, 그래도 안될때는 단단한 도구로 살살 긁으면 99.9%는 다 떼어낼 수 있습니다. 숙소를 몇년 운영하다보니 이세상 거의 모든것들을 원래와 비슷한 상태로 되돌릴수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모두 '물'의 자비로움때문입니다.




맑은 물은 언제 어디서나 맑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좔좔 흐르는걸 지켜보는데 참 맑고 깨끗했습니다. 마당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도 마찬가지이고 욕실에서 나오는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서 나오는 물도 맑기만 한다면 모두 똑같이 맑을겁니다. 적당히 맑고 적당히 탁한 물을 우리는 단번에 구별할수있습니다.

"이 물은 좀 탁하네? 쓰지 말자'

'물이 맑네, 마셔도 되겠는걸'


물은 보이기에 투명하고 이물질이 없는 상태라면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칼슘과 미네랄이 몇프로 포함되어있어야 한다거나, 물의 결정구조가 좌우대칭의 아름다운 형태를 띨 필요는 없습니다. 알프스산맥의 빙하를 녹이지 않아도 되고 반드시 알칼리성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저 맑게 정화하기만 한다면 그걸로 끝입니다. 최고의 물이라 할수있습니다. 



물에게 좋은말을 하고 현미경으로 관찰해보니 예쁜결정구조가 되고 나쁜말을 하면 못난결정구조가 된다는 내용. 발간당시에는 화제가 됐지만 최근에는 근거없는 유사과학으로 취급받고있다.


칠레 트레킹코스로 유명한 토레스델파이네. 이곳에서 옥색 빙하수를 마시며 공짜로 에비앙을 마시는 기분을 느꼈다



주방에서 그릇이나 접시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일, 방에서는 바닥을 쓸고 닦는 일, 욕실의 수건과 침구류를 어제 상태대로 복구하는 일을 물은 마법처럼 해냅니다. 물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그저 '맑음'뿐입니다. 물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대체로 맑은편이라 마당청소용으로는 손색이 없으며,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디든지 수도꼭지만 틀면 맑고 깨끗한 물을 매우저렴한 비용으로 사용할수있습니다.


능력에 비해 겸손하고 자비로운 물님, 오늘도 물님 덕분에 숙소를 재정비해서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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