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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하면된다는 선입견

결국 생활과 삶을 디자인할 수 있어야 한다

by 김정완


스크린샷 2025-08-21 오후 2.53.19.png 출처 : 죽림주간 유튜브 <고양이들도 우리도 꽤 무덥습니다만>

9년차 스타트업 디자이너로 근무하다가 회사를 접고 경북 예천 시골의 빈집을 수리해 여행자들이 머무는 숙소를 운영한지 벌써 4년째이다. 청소와 빨래를 하느라 구슬땀을 흘리다보면 가끔씩 나는 누구인가? 내 직업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사람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그럴때 나는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나는 디자인이라는 행위와 개념을 예전부터 굉장히 유연하고 폭넓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 회사 동료들로부터 '정완님은 다른 디자이너와 조금 다른 것 같아요'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건 아마도 디자인분야 바깥의 다른 세계를 향한 내 관심과 오지랖때문일 것이다.


대학을 마칠때쯤 엄마는 내게 대학원을 가라고 했다. 그저 가방끈이 길면 길수록 도움이 된다는 단순한 발상이 나는 싫었고, 무엇보다 나는 삶의 현장이 궁금했다. 직접 부딪혀보고 깨져봐야 소중한 뭔가를 얻을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지식, 지혜가 아닐까 기대했다. 대학생활도 군생활도 나름대로 알찼고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연습일뿐, 그것들은 진짜배기는 아니다. 진짜 사회는 가혹하고 훨씬 더 세다. 하지만 거대한 사회앞에서 나는 살짝 주저했다. 뭔가를 대담하게 시작해보고 싶었지만 가벼운 주머니가 항상 신경쓰였다. 어렸을때부터 우리집은 항상 가난한 편이었고, 지금 내 형편에는 이렇게 서울에서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오히려 쪼들림과 위기감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약간 주눅이 들어있던 것도 사실이다.


대학에서 좋은 스승을 만난것은 행운이었다. 그분은 학교 정식교수는 아니고 겸임교수이자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디자이너였는데, 그분에게서 삶을 이롭게 하는 디자인과 폭 넓고 유연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배웠다. 어떤 친구들은 그분의 말은 세속적이지 않고 허황되며 소녀처럼 순수함만을 부르짖는다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나는 디자인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그분의 디자인론을 내가 감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디자인이란 현실적인 여건과 타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장르와 경계를 넘어 우리 삶을 아름답게 보완해주는 모든 것. 디자인을 향한 이러한 태도는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의 말과 닮아있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

최근 나는 L이 성공한 인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9년동안의 디자이너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럽다가도 한없이 허무해지고, 다시 희망이 생기다가도 또 절망하는 그런 반복의 연속이었다. 그럴때면 잠깐 일을 멈추고 길게 쉬기도 했다. 그래서 말이 9년이지 실제로는 8년쯤 되려나. 학생때보다 경제적인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유로운 생활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어서 과감한 전환도 도전도 하지못했다. 가슴속에는 장르와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것을 디자인해버릴 포부가 있었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하루하루 회사와 집을 오가며 점점 시들어가는 회사원일 뿐이었다. 변화가 시작되는 작은 흐름은 때마침 절망감의 바다 깊이 가라앉고 있을 때 찾아왔다. 주위에 논과 밭, 그리고 노인들이 사는 오래된 집 몇채가 전부인 경북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빈집 한 채를 내 손으로 직접 고쳐보기로 한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무엇을 할지,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내앞엔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절망감으로부터 벗어날, 손끝의 감각을 되살리고 열정을 다해 몸을 바칠 대상이 필요했다.


그때의 사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좀 길지만 그 '사건'은 결국 나에게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장르와 경계를 넘어 나는 내가 가졌던 모든 역량을 이 빈집 한채를 되살리는데 쏟아부었고, 그동안 배우고 경험했던 모든것들을 100프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얇고 넓은 나의 오지랖을 회사에서 반의 반토막도 안되게 사용했다면, 이 일을 하면서는 내가 가졌던 잡다한 능력을 전부 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아낌없이 국물까지 싹싹 먹어치우는 느낌. 내가 여전히 디자이너로 살아있다는 느낌. 그리고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을 만났다. 나의 소중한 고객들, 매일 잠깐 스치듯 만나는 그들은 내가 만든 공간을 인정하고 감사해하며 환한 미소와 함께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고객들의 만족은 곧 디자이너의 행복이다. 지난 9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디자이너로서 누군가의 얼굴에 이렇게 예쁜 미소를 선물해주었던가? 고객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반응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이 같은 현장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삶의 현장이자 디자인 무대이다.




현장에서 뛰는 디자이너


오랫동안 인류는 생계를 유지하고자 육체적인 고된 노동을 어쩔수없이 해왔지만, 빠른 도시화와 첨단기술의 발전덕분에 이제 그렇게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전히 블루칼라 노동은 존재하지만 해가 갈수록 새로운 세대들은 노동을 최대한 기피하려 하고 AI와 자동화기계는 그 자리를 빠르게 메꾸고있다.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 외친다. 사람을 힘들게하는 블루칼라 노동은 싸그리 없어져야 마땅하다! 대학을 졸업하는 대다수의 취업준비생들이 희망하는 일의 형태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사무실에서 회사로부터 받은 최신컴퓨터 앞에서 하루종일 모니터를 노려보는 일이다. 지금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지금도 10년전, 20년전에 비해서 사무실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만 앞으로도 업무자동화 덕분에 더욱 더 편한 환경이 될것이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일하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사회초년생일 때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지망생이라면 나보다 훨씬 높은 누군가가 나를 적당히 높은 금액에 입사시켜서 쾌적한 환경에서 멋진 일을 시켜주기만을 바란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되기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디자인 실적을 쌓는데 집중했다. 나도 그랬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랬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던 내 아내도 그랬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서 4년동안 흔한 사무직으로 일했던 아내는 높은 연봉과 쾌적한 업무환경을 박차고 나와 그제서야 자기만의 길을 찾는 노력을 시작했다. 생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내게 맞는 일과 방식을 찾기위해 바깥세상과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사를 버린 건축가'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4c36c5c9-9232-4232-ad00-7a2339998442.jpg 이미지 출처 : 쿠팡 가격 변동 추적 그래프


내가 지금 관심을 가지는 젊은 건축가는 도면을 그릴뿐 아니라 직접 장사까지 하는 사람들이야. 옛날이라면 불순한 녀석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같은 건축가로 취급해주지도 않았을 일의 방식이며, 생계유지 방법이다.

예를들어 빈집을 숙박할 수 있는 방으로 개조하여 그것을 네트워크로 연결해서 딱딱하지 않은 열린 호텔을 변두리지역에서 경영하는 건축가가 있다. 디자인이 아니라 실제로 직접 경영하면서 그곳에서 얻는 수입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작은 빈집의 개수(리모델링)라는 것은 애초에 디자인 요금을 누군가에게 청구해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중략).. 이것이야말로 상업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과거의 무사적 건축가는 오로지 건축 잡지에 작품이 실리는 것을 목표로 일했다. 다른사람의 돈을 들여서 그저 사진에 멋지게 찍히는 것이 전부인 건축을 설계했다. 그러나 무사를 버린 건축가는 사진에 어떻게 찍힐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어떻게하면 손님이 올지, 어떻게하면 품을 덜 들이고 개수할수 있을지를 매일 고민하면서 그것을 디자인에 반영한다.

[상업적인 건축을 해야하는 이유, 구마 겐고 | 인구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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