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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이야기꾼 Sep 25. 2023

소리로 듣는 어느 해 가을 풍경

호랑, <어느 해 가을>

        어느 해 가을

                        -호랑     


    초가을 햇살 이고

    창호지 문 바르는 아버지 곁에서

    사락사락 바람과 볕이 노니는 오후     


    마당에서 씨를 익히던 노란 탱자

    꽃망울 조롱조롱 매단 국화 무더기 속으로

    황급히 구르고,

    시름없이 청대추 떨어뜨리며 오는 가을     


    추석 무렵 대추 따는 손 붉다

    오래 바람 거둔 손     


    새벽 찬 이슬 맞으며 걷던 밭고랑 사이로

    아버지의 세월 달아났다     


    더디게 말라가는 문살 위로 드나들던

    통통통, 햇살 소리     


    흰빛으로 쓸리는 바람

    문풍지 우는 소리로 듣는다          


  이 시는 어느 가을 농촌 풍경의 한 장면을 따뜻한 소리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겨울의 눈보라와 여름의 뙤약볕을 견뎌낸 얇은 창호지에게 볕 좋은 가을날 새옷을 입힙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문들 죄다 떼어서 마당에 세워놓고 일년을 견딘 창호지를 걷어내고 새 창호지로 단장을 합니다. 풀을 쑤어 문살에 바르고 넓은 창호지를 문살에 반듯하게 붙이고 마른 솔로 슥슥 구김이 없게 펼칩니다. 그리고 막 심은 식물에 물을 주듯 입에 물을 한가득 머금고 창호지 위에 푸 뿜어 창호지에게도 물을 줍니다. 좋은 구경이라 아이들도 병아리들도 모여들어 구경합니다. 햇살과 바람은 창호지를 말리기 위해 ‘사락사락’, ‘통통통’ 소리를 내며 창호지 위에서 노닙니다. 

  마당의 가장자리에는 노란 탱자들이 익어가고 국화들이 꽃망울을 탐스럽게 매달고 있습니다. 대추나무에는 아직은 푸른 대추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습니다. 대추는 너무나 많이 열렸습니다. 저렇게 많은 청대추를 모두 붉게 물들이는 것은 작은 대추나무에게 벅차 보입니다. 아버지는 시름없이 청대추를 속아냅니다. 추석 무렵 아버지는 붉은 대추를 따느라 손이 분주합니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가을걷이를 하시던 아버지는 밭고랑 사이로 불어오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창호지 위에서 노니던 가을 햇살 소리에 차츰 사위어 갑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를 스쳐간, 사락거리던 햇살 소리는 바람이 불 때마다 문살 위로 드나들던 문풍지 우는 소리로 듣습니다.    

  

  이렇게 시의 도움을 받아 수십년 전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하고, 가을 풍경을 햇살 소리로 만나기도 합니다. 시란 녀석은 참으로 고마운 녀석입니다. 이런 시를 낳은 시인은 더욱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 시를 쓴 작가는 현재 ‘브런치’에서 ‘호랑’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입니다. ‘호랑’ 작가의 시들을 읽으면 시간 여행과 공간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바람과 볕이 노니는 가을의 소리를 이 시를 통해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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