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흔적>
생전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도 피운 나무가 있다.
해마다 가지가 휠 만큼 탐스런 열매를 맺은 나무도 있고,
평생 번들거리는 잎새들도 몸단장만 한 나무도 있다.
가시로 서슬을 세워 끝내 아무한테도 곁을 주지 않은
나무도 있지만,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서
햇살과 바람에 하얗게 바래가고 있다.
지나간 모든 날들을 스스로 장밋빛 노을로 덧칠하면서.
제각기 무슨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신경림, <흔적>
해마다 꽃은 피고 집니다. 섭리이기 때문에 시차는 좀 있을지라도 어김없이 꽃의 생명 작용을 지속됩니다.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꽃 축제를 성대하게 개최합니다. 벚꽃 축제도 있고 복숭아꽃 축제도 있고 국화 축제도 있고 코스모스 축제도 있습니다. 이런 축제는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지자체의 흔적을 남기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꽃을 피워내는 것은 생명체의 섭리인데 그 섭리의 상품화가 수요를 유발하기에 축제가 성행하는 것이겠지요.
꽃 축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 축제, 복숭아 축제 등 과일 축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는 것은 종족 보존을 위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곱게 몸단장한 잎새들은 강렬한 햇빛을 받아 열매에 필요한 에너지를 쉼 없이 공급합니다. 과일이 익을 때쯤 흔적 남기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달리, 잎새들은 한 줌 재로 사위어가고, 겨우내 역할이 없어진 자신을 몸체에서 떨쳐냅니다.
한 해 두 해 그렇게 섭리를 지키면서 하얗게 바래가는 것이 나무의 일생입니다. 나무는 자신의 일을 뽐내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다 하다가 때가 되면 바래갈 뿐입니다. 과거의 영광에 매몰되지도 않고 과거의 모습에 덧칠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도 않습니다. 그냥 한세월 살다가 때가 되면 갈 뿐입니다. 벚나무도 복숭아나무도 이름 모를 풀들도 다 그렇습니다.
이 시도 겉으로는 나무의 일생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어떤 대상을 전면에 내세우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한 비유적 장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의 늘그막에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화려했던 순간이 많습니다. 그 순간들을 자랑하기 위해 과장하고 장밋빛 노을로 덧칠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에게 드러내어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삶보다 그냥 현재를 살아내는 삶, 좀 여유가 있다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해파랑길이 있습니다. 오륙도가 보이는 해맞이공원으로부터 통일전망대까지 동해바다를 옆에 둔 750km의 길입니다. 그 길을 걸으며 풍경에 감탄하고, 건강에 감사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록으로 공유하면 그뿐입니다. 그 아름답고 먼 길을 내 두 발로 걸었노라고 자랑할 필요도 없고, 장밋빛 노을로 풍경을 덧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흔적이란 남기려고 안간힘을 쓸 때 남는 것이 아니라 눈 위의 발자국처럼 저절로 남을 때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나무는 눈 내리면 눈으로 꽃을 피우고, 새봄이 오면 눈꽃 핀 자리에 봄꽃을 피우고, 또 때가 되면 봄꽃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열매를 맺고 햇빛을 받아 열매를 익게 합니다. 열매가 다 익었으면 미련없이 잎조차 떨쳐냅니다.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바람과 눈비 맞으며 혹독한 추위를 이겨낼 뿐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습니다.
이런 나무를 보면서 장밋빛 노을로 덧칠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꽃을 피우고 자신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의 소중함을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