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뛰어넘는 가치란 게 있기는 한가
치기어린 대학생 시절 거의 매일 어울려 다니던 친구가 어느 날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생은 살아가는기 아이라 살아내는 기야”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몰라도, 낭만은 커녕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보고 쭈글쭈글하게 대학 2년 차를 보내던 우리에겐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앞으로 몇 년 후애 닥칠 인생의 풍파가 어떨지 전혀 모르는 애송이들 이었지만, 나름 인생의 고뇌와 허무가 왜 없었겠는가.
군대를 다녀온 뒤 나는 학생운동 주변부를 맴돌았고 그 친구는 취업전선에 매달리느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간간이 보긴 했지만,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졸업 후 그는 어느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고, 나는 지역 신문으로 들어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면서 드문드문하던 연락도 완전히 끊겼다.
가끔씩 그 친구가 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아무 목적 없이 의미를 찾을 여유도 없이 단순히 살아내는 게 목적인 삶은 참으로 허무할 거라 생각했다. 동물이 아닌 다음에야, 살아내는 것 그래서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람으로서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게 아닌가 자문자답하며, 내 삶을 변명하고 싶어 했다.
졸업 후 25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삶은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고 살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의미를 찾으려 애를 쓰지만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 쫓기며 허겁지겁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름 빛나는 삶을 산 사람이나 성공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던 이들도 사는 자리에 따라 가치와 생각이 달라지는 것도 보았다. 살아남는 것을 뛰어넘을만한 가치란 게 과연 있기나 한지 회의감이 든다. 똑똑하고 훌륭하던 사람이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이상해지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내로라하는 대선 후보들이 이런저런 세력의 눈치와 표계산에 영혼을 팔고 내뱉는 우스꽝스러운 말들을 들어보면 더욱 그렇다. 애초 영혼이란 게 있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모두가 단 한 가지, (오래오래 튼실히) 살아남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러니 힘없고 백 없고. 그나마 연줄이라도 없는 이들은 버텨내기가 힘든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여유가 있어서 그 친구들을 만난다면, 살아남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