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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Feb 17. 2024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는 필연적이었다

얄마르 샤흐트와 1930년대 독일 경제 이야기로 보는 전쟁의 기원

서론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두 국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범 국가로 취급받아오고 있다. 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은 추축국들이 인종주의적인 경향에 입각한 제노사이드를 본격적으로 자행했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냉전 시작 이후로도 미국, 소련 양쪽 모두에서 절대악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그 말대로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전근대 시절의 정복군주인 훈족의 아틸라와 몽골의 칭기즈칸을 능가하는 대학살극을 벌였고 그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전범 행위를 저질렀다. 이 점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고, 분명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안타깝게도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별로 없는 상황이다. 기껏 나오는 대답도 히틀러나 일본 군부가 무조건적인 절대악이고 일본인, 독일인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미개한 호전성과 광기, 인종 차별주의만으로 전쟁을 일으켜 살육을 즐겼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다만 분명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러한 단편적인 논리만으로는 아무리 절대악에 가까운 행위를 저지른 국가라 할지라도 팽창주의를 위한 침략 행보 전체를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상대방을 매도하기만 하다가 진짜 알아야 할 원인과 교훈을 놓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하 본문과 다음 글에서는 단편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다각도로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라는 두 국가가 그러한 침략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체제의 모순과 필연성이 어떻게, 그리고 왜 존재하였는지 분석해 볼 것이다.


https://youtu.be/qStRYrJUMrI?si=aj7-SMZ1PRfbFyfa

본론으로 들어가 나치 독일이 팽창주의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아주 불가피한 환경적인 이유는 바로 전간기 상황에서의 경제 성장 및 재군비 정책 속 모순 때문이다. 비록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범국이라 할지라도 나치 독일이 그나마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요소가 있다면 경제 성장 정도가 있을 텐데 그 경제 성장의 과정 속에서 이미 어떻게든 팽창주의로 나서지 않으면 더는 유지될 수 없는 구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즉 표면적으로는 1930년대 독일은 대공황의 후폭풍에서 빨리 탈출하여 거의 완전 고용 상태를 달성하는 등 확실하게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대부분의 성과를 군수 공장을 비롯한 재군비 쪽으로 돌리면서 무언가 팽창에 나서지 않고서는 계속 호황이 유지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랬던 당시 독일의 경제 호황의 중심에는 라이히스방크 총재이자 경제장관이었던 얄마르 샤흐트가 있었지만 결국 군비에 온 힘을 집중시키던 나치당의 기조상 성장에는 한계가 명백했고 모순적이었다는 얘기다.


사실 얄마르 샤흐트는 나치 인사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다. 전범재판에 회부된 다른 이들이 워낙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망각의 그늘에 가려진 탓도 있고 애초에 이 자가 나치당 밑에서 경제관료를 했던 시절은 1930년대까지, 정확히는 1939년 전쟁 직전까지였다. 오히려 나치 독일이 본격적으로 팽창 전쟁에 나선 후로는 전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히틀러의 분노를 사서 쫓겨나게 되었고 심지어 1944년에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돼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전후에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기소되었으나 재군비 외에는 그다지 나치에 협조한 것이 없었기에 무죄로 풀려났고 남은 여생을 브라질, 에티오피아, 인도,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 신생 독립국가들에서 경제 참모를 하면서 보내다가 1970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샤흐트는 사실 원래 나치당 성향은 아니었고 오히려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 하에 자유주의 정당이었던 독일 민주당에서 활동했었던 전형적인 부르주아 정치인이었다. 그랬기에 1923년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수상이었던 슈트레제만은 샤흐트를 라이히 통화위원으로 임명하였고 이 시기에 그는 라이히스방크가 통화량을 그에 상응하는 등가물로 메우기 위해 금 보유량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는 토지를 기초 삼아 허구의 토지 채무를 부과했다. 그리고 라이히스방크는 이자가 붙은 렌텐 은행 증서를 발행하는가 하면서 인플레이션의 악순환 방지를 위해 이른바 렌텐마르크라는 새로운 통화의 총규모를 12억 마르크로 제한했다. 더 이상의 발행은 없었고 기존의 1조 마르크는 1 렌텐마르크에 해당했다. 결과적으로 매우 큰 성공을 거둬서 독일 화폐시장은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았고 샤흐트는 이 기세를 몰아서 1923년 12월 라이히스방크 종신 총재직에 오르게 된다.

1930년대 독일의 경제 부흥을 이끈 일등 공신 라이히스방크 총재 얄마르 샤흐트

또한 샤흐트는 은행 총재로 있으면서 영국 금융권과 접촉하여 제2독일통화은행에 자금을 대기 위해 일부 파운드화 표시 외채를 차입하려는 계획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금융 국가인 영국의 지원을 받은 샤흐트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다른 나라들의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계기를 개척해 나갔고 국내 정치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이자 정책과 대출 정책을 운용하여 국제사회에서도 높은 신뢰를 받았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곧 샤흐트가 마르크화의 구세주이고 확고한 통화의 보증인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특히나 도스 협정 과정에서 샤흐트는 독일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독일의 신용 능력 회복과 더불어, 경제적 건전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에 일조함으로써 1920년대 초중반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황금기를 개막하는 나비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공무원 임금 인상 문제와 배상금 문제로 인해 샤흐트는 독일 민주당, 더 나아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와 결별하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새롭게 손을 잡은 파트너가 떠오르는 신흥 세력이었던 히틀러의 나치당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의 시점에서 독일은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크게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라이히스방크 총재로 나치에게 선택된 사람이 바로 샤흐트였다. 그 당시 경제 상황은 정말 최악이었다. 물가가 급속도로 치솟았고 부채 규모도 커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쟁 배상금 지불 문제로 휘청이고 있었고 외환 보유고마저 바닥나서 자력으로 회복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국가들은 관세장벽을 구축하였기에 수출에 의존하는 독일 산업은 말라죽을 위험이 컸고 만약 이 상황이 지속되면 국내의 650만 실업자들은 봉급, 식량 지급마저 위태롭게 될 처지였다.


하지만 샤흐트의 주도 하에 상황은 급속도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1933년 연말 실업자 수는 2백만으로 줄어들었고 1930년대 중반에는 완전 고용이 이루어졌다. 또한 외국에 진 독일인들의 부채가 대부분이 상환되었고 수출이 번창했으며, 라이히 마르크는 안정적인 통화로 증명되었다. 공공 재정은 확실히 회복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샤흐트는 별도의 부채 없이 경기 부양에 자금을 댔고 실업자들을 구제하였으며 이 때문에 한동안, 적어도 나치에 부역했다는 악명을 받기 전까지 그는 역사상 가장 비상한 실업자 고용 계획을 세운 뛰어난 경제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때문에 샤흐트의 유능함을 눈여겨본 히틀러는 1934년 8월에 그를 경제장관으로 내각에 영입하였고 머지않아, 1935년 5월에는 아예 전시경제 전권 대리인 직위까지 줬다.

전범 재판에 기소당한 말년의 샤흐트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공 투자를 확대해야 했었던 목표와는 달리 현실은 미국처럼 공격적으로 통화량을 늘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샤흐트는 제품 생산은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동시에 통화량을 늘리면 바로 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방안으로 골랐던 정책이 "외파 어음"이었다. 외파 혹은 "공공 노동 독일 협회 주식회사"라는 이름의 기관은 공기업에 어음을 받고 신용 대부를 해주는 업무를 하고 있었고 은행들은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어음을 라이히스방크에 담보로 제공할 수 있었다. 원칙상 할인해서 매입할 수 있는 이 어음은 현금이나 다름없었는데, 특히 통화량이 증가하지 않았고, 이로써 인플레이션의 위험도 커지지 않았다. 이 어음은 현금 잔고를 대신했는데 그래서 샤흐트가 1920년대 초반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경험에 기반한 공포를 가진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었다. 사실 이는 엄밀히 얘기하자면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인 1932년부터 인프라 건설 및 공공일자리 창출 프로젝트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방안이다.


일단 첫 실업 대책 조치를 위한 자금은 이 외파 어음으로 마련하였고 후속 조치 자금 마련을 위해 샤흐트는 또 다른 수단으로 "메포 어음"을 만들었다. 그렇게 1백만 마르크의 창립자금을 가지고 "야금회사"라는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면서 4개 콘체른인 크룹, 지멘스, 라인슈탈, 구테호프눙 제련공장에게 각각 25%씩 메포 지분을 인수시켰다. 그런 다음 메포는 4%의 이자를 지불하고 3달 뒤에 액면가로 라이히스방크에 상환할 수 있는 공채를 발행했다. 이로써 원래 계획이었던 독일 재군비 정책의 필수적인 재료를 납품하는 회사들은 이 공채로 대금을 받았으며 독일의 전 산업계는 독일 국방군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생산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즉 시중 통화량 조절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자산은 실물자산이 뒷받침되는 상거래어음이 유일했고 민간소유의 유령회사를 앞세운 메포어음은 이러한 법제도적 제약을 우회할 수 있는 묘책이었던 셈이다.

 

한마디로 간단하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메포 어음은 예산을 끌어다 쓰고 싶은데 세금을 늘리기도 국채를 발행하기도 힘든 독일의 상황에서 샤흐트가 꺼내든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도박이었다는 말이다. 기본 구조는 크게 세 단계로 첫째 우선 민간기업들에게 어음을 잔뜩 발행시키고, 둘째 이것을 정부가 지급 보증하며(즉 사실상 정부가 민간 어음을 쓰는 것이다), 셋째 정부는 자기 회계부에 돈을 1원도 안 늘리고 민간 어음을 끌어다 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샤흐트는 군수 기업체들에게 메포 어음을 발행하게 하면서 정부에게 이를 지급 보증하게 하는 방향으로 경영에 개입했으며 심지어 나중에는 페이퍼 컴퍼니를 세워 재할인, 즉 정부가 어음을 사가지고 정부에 의뢰해 가격을 떨궈서 그만큼 정부 쪽이 가져가게 하였다. 그런 식으로 확보한 예산은 다들 아는 것처럼 당연하게도 군비 증강에 투자되었다. 실제로 메포 어음의 도입목적이 군수산업 육성이었던 만큼 같은 기간 국방비 지출의 45%가 메포 어음으로 충당되었으며 일자리는 대부분 군수공장 쪽에서 나왔다.

메포 어음의 기본 구조
1928~1940년 사이 독일 경제에 대한 통계들

결과적으로 메포 어음의 고용 효과는 외파 어음 그 이상이었다. 대공황의 직접적 여파로 1930년부터 급증하던 실업률은 1933년부터는 역전되어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가령 1932년 28.1%까지 치솟았지만 1937년 4.2%, 1939년 1.9%로 급감하여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 실업자 수의 경우는 1932년 557만까지 늘어나 1933년 초반에는 600만 명을 넘어섰으나 1937년에 1백만 명 아래로 급감했으며 그 이듬해인 1938년에는 4만 3,000명까지 줄어들었다. 한편으로 히틀러 집권 직전에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였던 상황이었지만 1933년 독일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회복세로 전환하여 1933년부터 1938년까지 연평균 실질경제성장률이 9.5%에 달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메포 어음이라는 비정상적인 재정조달 방법과 정부부채 화폐화가 깊숙한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 나치 독일이 1930년대 동안 이뤄낸 경제적 성과는 매우 대단하였고 성공적으로 보이겠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경기 부양 이상의 효과를 낳지 못했으며,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이었다고 분명히 결론 지을 수 있다. 전쟁 직전 독일 상황은 생산성이 크게 뒤떨어지는 군수산업에 너무 극단적으로 모든 면에서 집중한 나머지 다른 산업들과의 격차가 극심해졌고 더 이상 재정은 통제되지 않는 수준에 이르었다. 초반에는 메포 어음을 통해 재정을 대규모로 충당하는 것이 가능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1930년대 후반쯤에 120억 라이히스마르크를 발행할 시점에 가면 연 이자만 5억 라이히스마르크를 초과하였고 이대로 가면 빚 때문에 파산할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이때까지 써버린 매포 어음을 전부 갚기 위해 정부가 가지고 있는 금 보유고를 다 털어도 부족한 수준이다.


그렇기에 히틀러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외부로 팽창을 해나가면서 빚을 갚고 경제 성장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나치 독일은 계속 메포 어음을 발행했는데 이렇게 하고도 파산하지 않았던 이유가 전쟁 때문이었다. 당장 오스트리아 병합 때부터 시작해서 폴란드, 프랑스, 베네룩스 4국,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를 침공하고 점령하는 과정에서 나치는 해당 국가의 중앙은행이나 국영기업, 유대인들의 자산을 몰수해서 메포 어음 채권자들에게 불하하고 점령지 주민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빚을 갚아갔다. 물론 이것도 전쟁이 끝나면서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기는 했으나 이미 메포 어음을 무작정 남발한 탓에 적자가 누적되었던 독일의 상황에서 하필 지도자가 장기적인 것을 못 보고 눈앞에 닥친 것만 생각하던 히틀러였으니 독일이 전쟁을 감수하면서 팽창에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얄마르 샤흐트의 정책 요약

다만 그렇다고 당시 나치 독일이 전쟁 말고 파산을 피할 방법이 아예 없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장 1930년대 독일 경제 호황의 일등공신이었던 샤흐트조차도 전쟁을 반대하면서 내세웠던 대안이 존재했다. 그는 1938년 3월 말 메포 어음 발행을 종료하고 출구전략을 가동했다. 샤흐트가 생각한 출구전략은 만기가 돌아오는 메포 어음에 현금을 지급하는 것과 병행하여 단기국채를 신규 발행하여 이를 메포 어음과 교환하는 것으로 재정건전성을 서서히 개선해 나가는 사실상 장기 회수계획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그가 히틀러의 팽창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 크게 작용했고 애초부터 샤흐트는 본래 메포 어음을 감당이 불가능한 범위까지 남발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나 히틀러 앞에서 대놓고 군비 축소와 재정 건전성 강화를 주장한 샤흐트는 라이히스방크 총재직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제장관 자리조차 나치당의 2인자 헤르만 괴링에게 넘겨주며 권력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사실 냉정히 보면 히틀러라는 사람의 특성상 누가 봐도 샤흐트의 대안보다는 팽창을 통해 경제를 유지하고 성장하는 것을 선택할게 뻔했다. 히틀러는 대중 선동을 통해 국가 지도자에 오른 사람이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보였던 행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기적으로 멀리 보고 계획을 수립해서 움직이기보단 즉흥적으로 바로 눈앞에 있는 이득을 찾는데 에만 열을 올리는 부류에 불과했다. 그러니 비스마르크와 같은 뛰어난 수완가의 자리에는 절대 오를 수가 없었던 지도자였으며 샤흐트가 제시한 대안을 따르느라 자신의 대중적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감수할 수 있는 노련한 정치가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미 1930년대 후반부에 오면 너무 강박적으로 군수산업을 국가 주력 산업으로 키웠던 나머지 이걸 발전시켜야만 경제가 성장될 수 있었다고 판단해서 히틀러가 전쟁을 고른 것 또한 있다. 뭐, 전쟁한다고 해서 역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 역시 만만치 않은 데다가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는 점이 함정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1930년대 독일 경제가 폭풍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나치가 팽창할 것이라는 부분은 예정된 사실이었다는 평도 가능하다. 이미 그 기간 동안에 투자와 일자리 창출의 대부분은 생산성이 뒤떨어지는 군수산업에 집중되었고 또한 메포 어음의 남발은 재군비에 쓸 예산을 확보하는 것에는 유용했으나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적자가 누적되어 파산 상태에 빠질 수 있는 리스크가 컸다. 물론 이 상황에서 샤흐트가 했던 주장과 같은 해결책은 분명 존재했었지만 히틀러 정권의 태생적인 한계상 그걸 수용할 가능성은 낮았기에 나머지 선택지인 팽창주의로 가는 것은 놀라울 만한 일도 아니었다. 이는 부르주아 엘리트 출신 관치금융 전문가 얄마르 샤흐트와 독일 제국군 상병 출신 대중 정치가 히틀러가 원래부터 정치적 동지가 아니었고 세계관 자체가 360도 달랐기 때문에 벌어졌던 일이다. 그러니 나치 독일이 전쟁을 감수하면서 팽창으로 가는 방향성은 히틀러 정권의 특성과 메포 어음으로 인한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참고 문헌:


귀도 크놉, <히틀러의 매니저들>, 울력, 2018

https://alternative.house/finance-story-04/

https://www.joongang.co.kr/article/9780666

https://www.theholocaustexplained.org/life-in-nazi-occupied-europe/economic-policy/economic-recovery/

https://cepr.org/voxeu/columns/macroeconomics-germany-forgotten-lesson-hjalmar-sch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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