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당터널
우연히 들어간 터널에서 떠오른 잡생각들
바지가 또 작아졌다. 아니, 그냥 내 배가 늘어났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빨래를 잘 못 해서 바지가 줄어든 건 아닐까. 아니, 옷장 안의 모든 셔츠와 바지가 다 줄어들었을 리 없다. 살과의 전쟁을 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아마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 받은 신체검사장에서 몸무게와 신장을 동시에 측정해주는 기계에 올라갔다. “지-잉”하는 소리와 함께, 슬그머니 내려와 내 정수리를 건드린 그놈의 기계는 “경도 비만입니다”라는 멘트를 차갑고 또렷한 말투로 내뱉었고, 그 후로부터 군 입대하기까지 ‘돼지’라는 별명이 늘 붙어 다녔다. 혹독한 군 생활로 15kg를 감량해서 제대하였지만, 그놈의 살은 여름철 모기처럼 지겹게도 나를 따라다녔다.
밤공기가 선선한 것이 제법 가을 흉내를 내고 있었다. 다이어트를 결심할 때마다 들르는 동네 운동장 트랙이 그날따라 참 지겹기도 했다. 땀복이라고 입고 나온 촌스러운 비닐 점퍼가 매우 거추장스러웠다. 몇 바퀴나 돌았을까, 때마침 이어폰에선 새로 넣은 빠른 템포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나도 모르게, 운동장을 벗어나 전혀 모르는 길로 뛰어가고 있었다. 새 노래엔 새로운 길이 어울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빨간 신호등이 나의 일탈을 막아섰다. 돌아가야 하는 걸까. 아직 이 낯선 노래는 끝나지 않았는데. 그래 멀리 가보자,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머지않아 낯선 오르막 길 끝 저 멀리에 터널이 보였다.
'금당터널, 100M'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을 계속해서 토해내는 터널의 위압감은 상당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것이 맞겠다. 매연도 심할 것이다. 위험할 것이고, 길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는데, 문뜩 상산의 초 옹을 둘러업고 강을 넘었던 유비가 생각났다. 그래, 한 번 가보자. 설령,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가까이 보니 터널 옆에 꽤나 깨끗한 보행자 터널이 있었다. 저 정도라면 해 볼만 해 보였다. 조심스레 들어간 보행자용 터널은 깨끗했다. 왼쪽 벽은 화장실에서나 볼 법한 하얀 타일로 온통 덮여 있었고, 오른쪽 벽은 반투명 아크릴판으로 벽을 쳐 놨다. 그 벽 너머로 자동차들이 나를 향해 질주해 오는 것이 보였다. 나와 차들의 거리는 채 2M도 되지 않았으며, 운전자가 조금이라도 핸들을 돌리면 이 얇디얇은 벽을 뚫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자세히 보니 왼쪽 벽의 타일들이 꼴이 참 우습다. 아래쪽의 타일들은 사람들의 발에 수차례 차여 흰색인지 회색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중간 쪽의 타일들은 깨끗한 편이지만 여기저기 균열이 간 놈들이 보였다. 내 머리 위쪽부터 천장까지의 놈들은 때를 타긴 했으나 아래 두 놈들보다는 훨씬 보존상태가 좋았다. 나는 어디쯤에 속하려나.
얼마나 갔을까, 이어폰에선 마이너 키의 이별노래가 흘러나왔고, 터널 안의 공기는 삽시간에 다소 무거워졌다. 다시 돌아갈까 뒤를 돌아봤지만, 남은 길이 걸어온 길 보다 짧아 그냥 가기로 했다. 문뜩 기분이 야릇했다. 분명 같은 장소인데, 노래만 달라졌을 뿐인데.
나름 큰 결심을 하고 들어온 터널의 끝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터널 너머의 풍경은 들어오기 전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고, 전혀 특별하지 않은 길이 거기 있었다. 터널은 그저 한 차례의 사건 같은 것이었고, 그 사건은 과거로 남게 되었다.
터널 밖으로 한 두어 발짝이나 갔을까,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터널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전히 낯설지만, 그래도 한 번 왔던 곳이라고 조금은 익숙하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맹렬히 나를 향해 달려오던 차가, 이제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나의 충성스러운 장군들처럼 나를 호위한다. 이어폰의 소음에 이젠 귀가 아프기도 하고, 줄이 약간은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이젠 익숙해진 터널을 여유롭게 빠져나왔고, 나는 이어폰을 두 귀에서 빼내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소음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더 크게 들려왔다. 그러나, 차들이 지나가지 않는 그 찰나의 공백들을 다른 소리들이 성실하게 채우고 있었다. 벌써 떨어진 낙엽 밟는 소리, 귀뚜라미 소리, 오래된 전구가 신음하는 파열음까지. 아까는 들을 수 없었던, 비닐 점퍼 부대끼는 소리가 일정하고 또렷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