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나도 모른다
기나긴 일과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긴장이 풀리면 울컥할 때가 있다. 울컥하면서 하루 동안 내면에 쌓아둔 분노가 줄줄 흘러나온다. 마치 전자레인지에 돌린 호빵 옆구리가 터진 것처럼. 그럴 때 아무도 주변에 없으면 그냥 울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한다. 담아둔 말을 죄다 하고, 후폭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슨 얘기든 속시원하게 다 해버리고 나서 곁에 있는 사람을 모두 다 잃는 공상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떤 말을 할 건지 나는 다 알고 있지만 그런 말들 중 어떤 단어 하나 입에 올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일단 말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그저 후회하게 될 거고, 대체로 침묵이 수다보다 나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분노를 쌓아두면 탈이 난다. 한의학에서는 이렇게 자꾸 울화를 품고 있으면 홧병이 날 거라고 한다. 어쩌면 이미 났는지도 모른다. 입 안이 헐어버린 것도, 턱 근육에 자꾸 문제가 생기는 것도, 자꾸 뒷목과 어깨가 뭉치는 것도 그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혜롭게 화를 내고, 감정을 잘 분출하고, 그러고도 주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저 침묵하기를 택하고 이런저런 나쁜 상상을 한다. 내가 그동안 하고 싶었으나 참았던 말을 다듬지 않은 상태로, 날 것 그대로 다 토해내고 관계를 와장창 망가뜨리는 상상을. 그러나 사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상대에 대해 좋은 감정도 분명히 있고 나도 상대를 싫어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계속 침묵하고 싶지가 않다. 이렇게 계속 살면 답답하기 때문이다...아, 어쩌란 말인가.
오랫동안 건전한 분노 해소법에 대해 고민해왔다. 불만을 품은 채 얼굴이 퉁퉁 부어서 살아가지 않고,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똑바로 어른답게 말하고 잘 풀어가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그렇게 조화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어려운 일이라면, 어떻게 내 내면의 타협을 잘 이루면서 불 같은 감정을 잘 식힐 수 있을까? 그 방법 중의 하나로 복싱을 배워볼까 했는데 일단 기본적인 체력부터 기르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사람에게 쌓인 것을 털어놓는 건 너무 어렵다. 계속 고민한다. 결국 누군가와 잘 지내려면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은 참고 견뎌야 한다. 그걸 참고 견디기가 힘들다고 해서 말을 하는 게 현명한 행동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말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고 어쩌면, 그걸 말을 해야 할 만큼 내가 힘들다는 것부터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인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지만 나는 여기까지란 것도 인정하기 싫고, 담아두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좋게 해결하는 건 너무 요원해서 혼자서 훌쩍훌쩍 울기만 한다. 20년을 넘게 살았고 이제 곧 태어난지 30년이 되는데 이렇게 울컥하기만 해서야.
오늘은 한의원에서 찜질팩을 배에 올려놓은 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역시 내 마음의 문제가 아닐까. 내가 적당히 혼자서 감정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하는 건데, 자꾸만 상대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니까 이렇게 울화가 치미는 거 아닐까. 결국 평화와 안정은 다른 누구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나 자신을 잘 챙기는 것, 따뜻하게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데 있는 것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