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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Jul 09. 2023

자발적 이사

‘한남동에서 3년을 살았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어느 날 선호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두 문장은 우리의 3년을 그대로 담고 있다. 한남동에서 3년을 살았고, 정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한남동으로 우당탕탕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처음 도착한 한남동이 너무 낯설고 분수에 맞지 않는 장소 같아서 하루는 선호를 붙잡고 펑펑 울기도 했다. (나는 아주 쉽게 우는 사람이어서 내 눈물이 극적인 감정의 기준이 되진 않지만 울긴 울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감각을 떨칠 수 없었고, 그래서 뭐라도 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남의 흉내를 내보기도 하고, 삐걱거리는 나를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어 그건 얼른 접고, 한남동에 하루라도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 이 동네의 생태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3년쯤 지났더니 집 근처를 오가면서 어색하거나 부끄럽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자의에 의한 적응이었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약수에 이사 온 일주일 사이에 이 동네가 이토록 마음에 드는 걸 보면, 알 수 없는 해방감에 숨이 탁 트이는 걸 보면, 지금까지는 억지로 무언가를 붙잡고 있었다는 걸 그 구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시간을 접고, 스스로 결정한 삶의 터전에 왔다. 이 동네에서는 아주 긴 산책을 할 수 있다. 걷다 보면 매미의 허물이 보이고, 오늘 들어온 싱싱한 과일이 손에 잡힌다. 골목골목 자리 잡은 낡은 가게 사이로 드르륵 미싱을 돌리는 뒷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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